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14일차 (온타나스 - 보아디요 델 까미노)

carmina 2016. 6. 11. 22:40



2016. 5. 2


까미노에서 만나는 외국인들이 늘 내가 코리아에서 왔다하면

즉시 '남이냐 북이냐'를 묻는다.

그러면 나는 늘 그렇게 대답한다.

"내가 만약 북에서 왔다면 나는 Son of King일 것이다."

북한 사람이 이런 까미노에 올 수 없음을 알려 주고

왜 그 들이 늘 미사일과 핵 폭탄을 준비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정글속 외딴 마을같은 알베르게를 나와 어둠 속 저 멀리 높은 언덕이 보인다.

오늘 아침부터 땀 좀 흘려야곘네 하고 그 언덕가까이 가니

길은 고맙게도 언덕 밑에서 왼쪽 평탄한 길로 이어져 있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같은 6시 반이라도 벌써 해가 조금 빨리 뜨는 것을 느낀다.

실같은 초승달이 또 한 번의 초승달이 될 때 쯤 내 여정은 끝날 것 같다.


성당이 폐허가 되고 겨우 뼈대만 남아 세워 놓은 곳을 지나

나보다 먼저 떠난 남녀를 추월해 걷고 나니 또 다른 한 남자가 앞서 걷고 있기에

지나치며 보니 이제까지 전혀 보지 못한 한국인이다.

대전에서 왔는데 하루에 40km 정도를 매일 걷는단다.

빨리 걷는 편으 아닌데 놀라운 체력의 순례자다.

여기까지 아마 9일이나 10일 정도 걸린 것 같다.


밭길로 이어지던 길이 아스팔트 도로로 변했다.

뒤에서 몇 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곧 이어

이태리 팔레리아 일행이 지나가며 내게 반갑게 인사한다.


길이 오래된 병원과 수도원이 폐허가 되어 남은 건물 밑을 지나는데

그중 나에게 늘 살갑게 대하는 키다리 이태리인이 나와 사진을

찍고 싶다고 얘기하며 포즈를 잡는다.


주욱 뻗은 아스팔트 길에서 팔레리아는 힘이 넘치는 듯

배낭을 멘 채로 달리기를 하고 있다. 그러다가 불편한지 웃도리를 벗고

또 한 번 달려 본다. 참 시원한 목소리와 웃음같이 정열이 넘치는 여자다.

며칠동안 그 들을 보니 그 이태리 팀의 대장은 팔레리아고

경비는 누가 다른 사람이 맡아 보는 것 같았다.


길게 뻗은 가로수길을 2시간 정도를 걸어 만나는 첫 마을인 카스트로헤리츠 마을은

마을 뒤에 폐허된 성당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 마을의 입구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니 우리보다 키 작은 동네 아저씨 한 분이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선 채로 스탠드 앞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전형적인 유럽의 카페 풍경이다.


그 마을을 지나며 그간 궁금했던 것이 하나 해결되었다.

어떤 마을은 집들은 대문 옆에 철판이 있던데 저것이 무슨 용도일까

궁금하던 차에 여기 마을에서 주인이 출타중임을 표시하게 위해

그 철판을 대문 아래 대고 자물쇠를 채워 놓는다.


마을의 한 가운데 십자가의 윗 부분이 없는 형태의 돌 기둥이 세워져 있다.

아마 이 기둥은 중세시대에 죄인을 마을 광장에 매달아 놓거나 사형을 위한

기둥이었을 것이다.


도시를 나와 한참 벌판길을 걸어가다 보니 먼 곳에 모스텔라레스 언덕이

거대하게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거대한 것 같고 그 곳 정상을 향해

비스듬하게 이어져 있는 까미노 루트를 보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노래로 승화해 버렸다. 이태리 팀들과 같이

그 곳을 향해 걸으며 이태리 노래인 '푸니쿨리 푸리쿨라'를 내가

크게 흥얼거리니 그 들도 같이 따라 불렀다.


"얌모 얌모 얌모 얌모야, 얌모 얌모 얌모 얌모야,

푸니쿨리 푸니쿨라 얌모 얌모 얌모 얌모야,"

길을 같이 가던 다른 사람들도 흥얼거렸다.


그러나 나도 이 높이를 올라가기 위해 옷을 편하게 입고

스틱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중간 언덕까지

안보고 걸어가리라 다짐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길을 올랐다. 힘들다. 그러니 천천히 걷자. 그러다 보면

어느 새 정상이 내 앞에 있으리라."


그렇게 천천히 걷다 보니 중간 쯤에 도달했다.

내 옆에 있던 하이델 베르그에서 온 독일인 여자 마티나에게

왜 이 곳에 왔느냐 물었더니 자기는 크리스찬이라 이 곳에

오는 것이 오래 전 부터 꿈이었다 한다. 간호원인데 마침

시간이 되어 이 곳을 걷고 산티아고에서 남편을 만나기로 했다 한다.


올라가는 길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멋있었지만

올라가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더 멋있었다.

이런 길을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내게 축복된 일인지 가슴이 복받혀 온다.


정상의 안내판에 수없이 많은 낙서가 적혀 있어 나도 내 스탬프를 찍어

이 곳에 왔었음을 후대에 알렸다.


이젠 언덕을 내려가 다시 까마득한 길을 가야 한다.

사람들이 그 먼길을 걷기 지칠 때 쯤에 간이 쉼터가 보였다.

잠시 그 곳에서 쉬는데 한국인듯 보이는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내게

인사를 한다. 그는 코밑에 허옇게 콧물이 흐를 정도로 지쳐 있었고

배낭이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다리를 절고 있다.

그것도 두 다리를 모두...

나보다 4일전에 생장을 출발하여 배낭은 택배로 보내고 여기까지

걸어 왔단다. 참으로 놀랄만한 의지다. 걷기조차 힘든 사람이

조금씩 걸어 이제까지 많은 산과 언덕 그리고 벌판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상상이 안 될 정도다.

그리 양 다리의 무릎에 압박대를 매고 있었고 한 두 걸음 걷는것도

힘들어 보였다.


누군가 얼마 전에 길에서 본 돌멩이로 SUNSHINE 이란 단어를

다시 만들어 놓았다. 아마 어떤 사랑의 표현일 것 같다.


끝없는 평원을 한참 가는데 갑자기 앞에서 앰블런스 같은 차량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까지 걸어오면서 까미노에서 이런 차량을 보지 못했는데

사이렌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보니 일상 순찰인 것 같다.


앰블런스 차량을 지나 조금 더 가니 길 가 왼편에 순례자를 위한

산 니콜라스 병원이 있었다. 커피와 과자를 무료로 마실 수 있고, 잠 도 잘 수

있도록 침대와 구급대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곳 방명록에 내 스탬프를 찍으니 다른 사람이 이 스탬프를 다른 곳에서

봤다며 나를 알아 본다. 일단 스탬프 제작은 성공한 셈이다.


그 곳을 나와 다리를 건너니 다시 주 경계선 표시가 있는 나무판 밑에

따스한 햇빛이 좋아 양말을 벗고 한 참을 앉아 있었다.

레온이라는 표시가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 온다.


보아디요로 가는 길에 흔치 않은 일인데 길가 승용차 안에 있던 아가씨가

자신의 카페 선전 쪽지를 나누어 주며 순례자들을 호객하고 있다.

그 노력이 가상해서 그 곳에서 맛있는 햄버거를 먹었다.


까미노를 걷는 동안 수없이 보는 드넓은 밀밭의 경작을 어찌하는지

궁금했는데 이 곳 벌판을 지나며 제대로 보았다.

밭을 길이만큼 넓은 철구조물을 세우고 그 곳에서 스프레이처럼

물이 밭으로 살포되었다. 아마 이 동작도 컴퓨터를 하는 것 같다.


길이 지루한지 사람들이 서로 장난을 하며 지나간다. 그래도 길을 지루했다.

혹시나 앉을 자리라도 있으면 쉬어가면 좋으련만 뙤약볕 아래 그럴만한 장소도 없다. 

그냥 내 의지가 아닌 다리의 의지로 가는 것 뿐이다.


드디어 보아디요 델 까미노 마을에 도착.

늘 그래왔듯이 공립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갔지만 첫 눈에

무척 누추해 보여 그냥 나와 여기 저기 다른 곳을 찾다가

한국인 가족을 만났다. 부모와 건장한 남자 청년. 청년의

배낭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태극기가 반가왔다.


여기 저기 알베르게를 찾아 다니다가 한 곳에 들어 가니

마당에 연못같은 수영장이 있고 정원이 좋았다.

벽에 그럴 듯한 그림도 그려 놓고 정원 한 가운데

순레자 동상도 있었다. 체크인은 했지만

키친이 없어 저녁은 알베르게에서 주는 메뉴로 해야 했다.


날씨가 좋아 빨래를 해 널었더니 금방 마르고

사람들은 잔디에 웃통을 벗고 누워 일광욕을 즐겼다.

한국인 아가씨 한 명이 수영장에 물이 없는 줄 알고

덮여 있는 비닐 덮개에 발을 디뎠다가 물에 퐁당 빠지고 말았다.


잔디밭 위에 내 배낭에서 처음 꺼내는 깔개를 펴고

한국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었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