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23일차 (폰페라다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조)

carmina 2016. 6. 14. 10:45



2016. 5. 11


어제 저녁 알베르게에서 영어를 유난히 유창하게 하고

스페인어까지 말할 줄 아는 한국인을 보았다.

일찍 잤더니 일찍 눈을 떠 떠날 준비를 마쳤지만

알베르게의 규칙이라며 6시 반이전에는 문을 나서지 못하게 하기에

앉아 기다리는데 그 한국인이 내게 말을 건다.

그는 미국 콜로라도에 사는 재미교포였고 나이가 74살이라 했다.

이 곳에 오기 위해 미국에서 특별히 아는 사람들을 통해 스페인어를 배웠단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잤던 어느 부부는 문 앞에 대기하던 택시를 타고 가 버리고

나는 그와 같이 문을 나섰다.

그는 이번 까미노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과 같이 동행하고 있었다.

그도 거의 70살에 가까울 정도로 나이가 많다.

그런데 까미노를 무려 18번을 걸었단다.

풀 코스를 걸었는지는 물어 보지 않았지만 길을 걷는데 거침이 없었다.

두 사람을 따라가며 이야기하다 보니 지나가면서 보이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 동상이나 성당에 대해서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특히 이 곳 폰페라다는 템플기사단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오늘 아침에 지나가며 보리라 생각했는데 빨리 걷다 보니

어둠 속 동상 서 있는 것을 사진으로 확인만 하고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이 어둠속에서 까미노길을 찾지 못해

길가 청소부에게 길을 묻고 가기에 조금 이상하다 싶었다.

뭐 도심지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냥 무작정 따라갔다.

누구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방향 감각을 잃어 버린다.

마을 골목을 벗어나 놀이터와 공장지대를 지나고 낮은 언덕을 올랐다.

멀리 하늘을 보니 이제 비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인지 하늘이 훤했다.


폰테라다도 큰 도시라 30분을 걸어도 마을은 계속되었다.

기타를 배낭과 함께 멘 어떤 순례자가 길에서 쉬고 있기에

혹시나 그제 저녁 폰세라돈에서 같이 노래한 사람인가 했는데 다른 사람이다.

기타를 메고 이 먼 길을 가는 사람은 얼마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했을까?

나도 그렇지만 음악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외곽의 주택들이 모두 일정한 모습인 것을 보니

한국의 아파트처럼 똑같이 지어 분양을 하는 시스템이 여기도 있나 보다.

길가의 포도나무가 리오하지방에서 보던 포도나무에 비해 잎이 조금 더 자라 있었다.

폰페라다의 까미노 이정표는 조금 지방과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가리비에도 디자인 감각이 배어있고 노란 화살표는 지팡이를 잡은 손가락으로 대신했다.

까미노를 걷다 보니 각 지방마다 가리비의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니 두 사람보다 한참 늦게 걸었는데

콜럼브리아노스 마을에서 아침을 먹으러 들어갔다가 두 사람을 다시 만났다.


스페인 남자는 기업을 운영하며 시간 날 때마다 까미노를 오고

한국 남자는 한국에 살 때 부터 대단한 산악인이었다고 스스로 얘기했다.

암벽등반을 좋아했고 국내의 많은 산을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다리를 다쳐 산행을 포기하고 주로 자동차 여행을 했다.

그러다가 까미노를 걷고 싶어 오랜동안 준비했다한다.


그 사람은 한국을 떠나온지 오랜 세월 지났다며 내게 한국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국내의 걸그룹들이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으로 사랑을 받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정치와 경제. 국내 정치인들의 취향과 사람들의 인식 등등.


둘이만 이야기하다 보니 스페인 사람은 한참 거리를 두고 먼저 가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람 뒤만 따라 갔다.

얼핏 얼핏 눈에 보이는 특이한 것들만 사진을 찍으며 걷고 있다가

캄포나라야의 삼거리에서 얼핏 이 길이 까미노가 아닌데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스페인 사람은 다른 길로 가고 있었으나 18번이나 걸은 사람이기에

알아서 가겠지 하고 뒤를 따라갔다. 뒤에 다른 순례자가 한 명 따라 오고 있었으니

이 길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고...


그런데 한참을 걷다가 스페인 사람이 길에 정차되어 있는 차의 기사에게

길을 묻는다. 순간 그제서야 무엇인가 잘 못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국인은

그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를 하고 있기에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일 35km의 길고 험한 코스를 가야 하기에 오늘 많이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결국 우리 일행외에 이 길에 다른 순례자는 보이지 않았다.

길을 걷는 마을 사람에게 이 길이 까미노 길이 맞느냐 물었더니

맞다고 답변한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 동네사람인가? 아니면 내 직감인가?


그런데 한참 길을 가다가 마을 골목의 사거리 담벼락에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스페인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손짓하며 자기가 맞다고 표현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끝없는 아스팔트 길이었다. 이 길은 분명 까미노 길이 아닐 것이다.

까미노 코스라면 순례자들에게 이런 아스팔트 길을 올래도록 걷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 갈림길에서 노란 화살표는 보였다.

며칠 전 아스토르가를 갈 때 생각해 보니 까미노는 어디에서든

길을 잘 못 들더라도 제 코스로 갈 수 있도록 표시를 해 놓거나 혹은

바이크 순례자들이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음을 알았다.


그 들은 거의 2시간 넘게 걸어도 쉬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고속도로 위의

다리를 넘어 한참을 가다가 앉을 자리가 있는 길가 마을 입구에서

조금 쉬겠다고 하고 그 들과 떨어졌다. 키가 큰 사람의 보폭을 따라 가느라

많이 힘들었기에 한참을 쉬고는 혼자 천천히 길을 걸었다.


내가 걷는 마을의 명칭을 보니 카레세도 델 모나스테리오라는

까미노 어플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이름의 마을이었다.


인적없는 길을 가는데 문득 개 한 마리가 길 가운데 딱 버티고 앉아 있다.

마치 자기 집 문 앞을 지키는 것처럼 개는 내가 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 옆에 집 앞에도 개가 마구 짖는데 그 개는 줄에 묶여 있었다.

아이고, 이제 큰일났네. 나도 멈추어 섰다.

계속 평지를 걸었기에 내 손에 스틱은 없었다.

내가 집 쪽으로 가지않고 오른편으로 가니 앉아 있던 개가 으르렁 거리며 일어섰다.

내 머리칼이 쭈뼛섰다. 손바닥을 앞으로 하고 너를 해칠 의사가 없다고

무언의 표시를 했다. 그제서야 개는 옆으로 슬금 슬금 비켜났다.

나도 천천히 오른쪽으로 걸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천천히 내 길을 갔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내 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것은 처음 당해 보는 일이다.

대개 스페인에서는 개를 줄에 묶어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도심에서도 그렇고 어느 곳이나 무척이나 고급스런 품종의 개는 늘 조용했었다.

오늘 나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자기 땅을 지키는 개를 만난 것 같았다.


낮은 언덕을 올라가 왼편의 포도밭 넘어 멀리 보니 카카벨로스가 틀림없는

마을의 집들이 보였다. 그리고 더욱 반가운 것은 1시 방향에 다른 순례자들이

줄을 이어 걷고 있었다. 이제야 제 코스로 가나보다.

도대체 몇 시간을 더 걸은 것인가. 어플 상으로 보니 캄포 나라야에서

카카벨로스까지 거리가 6.1km이다. 그렇다면 한시간 반 코스인데

나는 무려 3시간 걸려서 도착했으니 거의 12km를 걸은 셈이다.

다른 순례자를 본다는 것이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그렇게 반가운 마음에 로타리를 걸어가는데 대형차가 로타리를 급하게 돌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조심하라는 듯 소리를 쳤다.

나도 제 길을 찾았다는 반가움 때문에 차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카카벨로스 마을은 제법 도시다웠다.

호텔도 있고 길가에 레스토랑도 많았다.

강가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배낭을 내려 놓고 주문할려다가

햄버거가 없다는 말에 포기하고 나와 마을 중앙로를 걷다가 갑자기

눈에 확 뜨이는 간판을 하나 발견했다.

한글로 써 있는 '라면 있어요 김치도!'

무조건 들어갔다. 그 안에는 더 매혹적인 글이 있었다.

'라면+밥+김치 5.5유로'

그것도 컵라면이 아닌 끓여 주는 라면이니 망설일 것도 없다.

큰 유리 그릇에 삶은 계란을 얇게 썰어 넣고 뜨거운 라면의 김이

모락 모락 피어 오르고 옆에는 한국식 김치는 아닌 듯 야채 무침과

조그만 종재기 그릇에 밥이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멘'

맛을 보니 한국라면이 아닌 듯해서 물었더니 모르겠단다.

중국이나 브라질 같다고..

그러다보니 라면을 먹었다는 기쁨뿐이지 맛은 정말 달랐다.


카카벨로스 마을은 깨끗한 도시이고 마을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한담을 나누고 오후 햇볕의 따스함을 즐기고 있었다.

마을에 아주 커다란 돛대 같은 것을 전시해 놓았다.

겉모습으로만 볼 때도 커다란 역사가 있는 나무 같았다.

마을을 가로지는 커다란 강의 다리를 지나는데 얼마 전

일본인 아가씨가 지나가기에 다시 인사했더니 이번에는 인사를 받기는 하나

겨우 미소만 지을 뿐 대화를 하지 않는다. 영어를 못하는 것인가?

간단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어도 별로 웃는 기색이 없다.

또한 머리칼이 긴 일본 사람을 자주 보았는데 그 사람과도 대화가 없는 듯 했다.


그 이후 피에로스까지는 거의 세멘트 도로였다.

그러나 그 곳으로 가는 길은 환상이었다.

길을 걷다가 사방을 둘러 보아도 눈이 닿는 곳은 모두 포도밭이라

만약 가을에 왔다면 기분이 무척 좋을 것 같았다.

문득 배낭에 젖은 빨래가 있어 이 따스한 햇볕과 살살 부는 봄바람에

말리고파 배낭에 옷핀으로 고정해 널었다.

며칠간 비가 계속되니 빨래가 눅눅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다시 빨아야 할까 보다.

그러다가 빨래가 마른 것 같아서 다른 빨래를 또 배낭에 걸었다.

내가 그렇게 앉아서 잠시 쉬는 동안 뒤를 따라온  

안면있는 외국인들이 나보고 천천히 걸으라며 웃는다.


피에로스에 있는 마을들은 초반에는 새집들이 많았는데

다리를 건너니 거의 폐허 수준인 것으로 보아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이

새집을 지어 다리 건너로 이사한 것 같았다.

버려진 집들에는 저절로 자란 풀들이 가득했고, 문은 건드리면

부서질 듯이 낡았다. 그 마을을 지나 가는 길도 역시 포도밭이 이어졌다.

비야프랑카까지 가기 전의 시골길은 너무 좋았다.


오후 2시경 마을 입구에 전망이 좋은 공립알베르게에 여장을 풀었다.

이 마을은 관광도시인지 멀리 보이는 커다란 건물에 카지노라는 단어가 보였다.

그리고 마을에 여기 저기 커다란 크레인을 동원해 새로 짓는 건물이 보였다.  

빨래를 해서 널고 알베르게 앞 마당에 앉아 너도 나도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데

그 사이를 작은 도마뱀들이 꼬리를 치며 지나가고 벽을 타고 있다.

이 알베르게는 한국 순례자를 배려한 듯 각 편의 시설마다 한국말을 같이 적어 놓았다.

욕실, 라운지, 식당 등등


저녁거리를 사기 위해 시내를 나가, 무좀약을 하나 사고

예쁘게 가꾸어 놓은 마을 정원을 산책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마을에 커다란 성당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알베르게를 하는 듯

순례자 한 명이 그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길가에 식당은 물론이고 선물가게 이발소 미장원 약국 등이 눈에 보였다.

선물가게에 사우디 근무시 자주 보던 아랍사람들이 좋아하는 물담배가 신기했다.

한국에서 사업이 안되어 철수한 프랑스 대형마트인 카르푸는

스페인 대도시나 큰 마을에서 늘 볼 수 있었다.    

마트에서 전자레인지에 대워먹는 매콤한 파스타를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왔는데 한국인 부부와 딸이 인사를 건넨다.

아빠는 카톨릭 신자고 엄마와 딸은 무교라 한다.

아빠가 참 인자하게 생겼고, 딸은 애교가 있었다.

덕분에 그 들이 만들어 준 샐러드를 같이 먹었다.

그 가족은 산티아고까지 같이 걷고 렌터카로 스페인 여기 저기를

여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오후 늦게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는지 복도에 있는 이층 침대까지도

청년들로 가득찼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