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25일차 (라 라구나 - 트리아카스텔라)

carmina 2016. 6. 14. 15:48



2016. 5. 13


어제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아침의 몸 상태는 가뿐했다.

완전히 25일째 몸은 걷는 기계가 되어 버렸다.

잠은 배터리를 충전하는 시간이고, 아침만 되면 항상 완충되었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은 온갖 기쁨이 넘치고 넘쳤다.

이 힘든 일을 육체가 견뎌내고 있다는 자부심과

모두가 고통속에서도 참으며 걷고 있는 숭고함을 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즐거움과

하나님이 만드신 경이로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찬양했고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이 힘든 길을 걸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기에 지금의 유럽이 기독교국이 되었고

순례자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걸었던 길에서 그 들의 삶을 체험하며

나 자신 또한 경건해 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스스로 이 곳 까미노가

낙원, 곧 파라다이스이라고 남들에게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어 좋았다.   


남들처럼 힘들다거나 볼 것이 많아서 혹은 카톨릭교인들은

미사가 좋아서 다음 날 하루나 이틀을 걷지 않고 쉬는 순례자들이 많은데

나는 지난 24일동안 걷기를 시작한 이래 하루도 쉬지 않고 이제껏 걸어왔다.


어제 저녁에 방에 히터가 들어오기에 빨래가 다 마를 줄 알았는데

저녁에만 잠깐 틀어 주고 밤에는 안 틀었는지 빨래가 거의 젖어 있어

비닐 봉지에 모두 넣어 배낭에 넣었다.


오늘도 비가 온다.

길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나 혼자 지척도 안 보이는 안개길을 올라갔다.

지도에 의하면 아직도 고도 150m 높이를 더 올라가야 한다.

안개 속에 희미하게 성당이 보이고 길 옆에 돌십자가가 보일 뿐이다.

그 2.5km의 짧은 거리도 걷다가 멈추고 하기를 몇 번했다.


어둠속에서 차량 소리가 들려 옆으로 비켜서 보니 택시 2대가 지나간다.

아마 더 이상 못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산 아래로 넘어가는 것이거나

혹은 오 세브레이로에 사람들을 태우러 가는 것 같다.


오 세브레이로에 도착했지만 마을은 안개 속에 파묻혀 어디가 어디인지

종잡을수가 없다. 어디엔가 있을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순례자 한 명도 나 처럼 어디로 가야하는지 헤매다가

이제 막 도착한 내게 묻지만 나도 모른다 했다.

알베르게에서 막 나온 듯한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알겠지 하고

길을 따라 갔지만 그도 역시 헤매고 있다.

결국 혼자 큰 거리로 나와 이제까지 진행하던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안개가 짙어 앞 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GPS를 켜보니 이 방향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다가 문득 도로 이정표를 보니 오늘 내가 가야 할 트리아스텔라는

반대 방향이라 급히 왔던 길로 되돌아가 걸었다. 알고보니 GPS를

크게 확대하지 않아 내 위치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두운 길을 내려가니 사람들 행렬이 보여 무조건 뒤따라 갔다.

까미노 이정표는 없으나 도로 이정표에 산티아고로 되어 있으니 맞을 것이다.

아마 까미노가 이렇게 위험한 차도를 따라 가지는 않을텐데 사람들이 모두

편의상 이 길을 가는 것 같다.


처음 만나는 리냐레스에서 식사를 하고자 했으나 안개로 마취된 사람들이

사는 마을같이 조용했다. 그 곳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례자의 동상이 있었다.

오늘의 내 모습 같았다. 길을 따라 내려 오면서 조금씩 시야가 밝아졌다.

옆의 초원이 보이고 도로가 길게 뻗어 있고, 아직 산 중에 남아 있는

구름들이 하늘로 사라지기 위해 남은 조각들을 하놀로 뿜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리냐레스에서 멀리 않은 곳인 오피탈에 도착하니 우리를 뛰쳐 나온

닭 한마리가 이제 막 순례를 시작했는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카페에 사람들이 가득한데 종업원이 여자 한 명뿐이다. 그러니 바쁠 수 밖에 없는데

종업원의 친구인 듯한 여자가 스툴에 앉아 끝없이 종업원에게 말을 시키고

종업원도 바쁘게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대답을 꼬박 꼬박 하고 있다.

내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얘기를 나누었다.


비교적 평평한 길을 걷다가 눈 앞에 보이는 마을이 이번에 어제 온 비로

피해를 입었는지 축대가 무너져 돌이 길가에 흩어져 있었다. 이 정도

비가 간밤에 많이 왔나?

  

언덕은 이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숲속 길로 걷는데 잠시 후

급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걸었다. 아침에 오 세브레이로까지 올라 온 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또 오르막길이 지속되니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가야 할 길인데..


알토 데 뽀요의 정상에 도착해 가뿐 숨을 몰아 쉬고 있으니 뒤이어 여자 두 명이 역시

힘들게 올라와 힘들다며 주저 앉아 버렸다.


그 곳부터 서서히 하행길이다. 이젠 안개가 조금 걷히니 차도를 걷지 않고

차도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까미노 길을 걸었다. 걷히고 있던 안개가

다시 짙어졌다. 안개가 저 앞에서 몰려 오는 것이 보일 정도다. 금새

우리 앞길이 10m 앞도 안 보일 정도로 희미해 졌다. 다행히 까미노길이

도로와 조금 떨어져 있어 안전했다.

그 안개는 한 시간 거리의 폰프리아 마을까지 지속되었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세퍼드 한 마리가 길 가운데 딱 앉아서

마치 조각처럼 꼼짝도 않고 있다.

내가 길을 가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옆으로 지나가니 잠시 움직였어도

지나간 후 다시 보니 또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다. 뒤이어 따라 오는

여자 순례자에게 개 무서워 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오면 된다 했다.


이상한 이정표가 보였다. 만들어 놓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가리비도 선명했고

그 밑에 노란 화살표의 페인트도 전혀 흠이 없는데 그 밑에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와 갈리시아주의 특별한 필기체가 표시되었다.

Km 147,708 

혹시 스페인어권 계통의 나라에서 숫자표기를 다른 나라와 다르게 쓰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해가 안될 것이다.

스페인어권 나라에서는 숫자를 표기할 때

, (콤마)가 . (점) 이고 점이 콤마다.

그러니까 이 숫자는 147,708 km가 아니고 147km 708m 인 것이다.

중동 지역에서도 이렇게 쓰는 나라들이 있다. 


숲은 안개에 쌓여 있고 그 한참을 걸어간 끝에 보이는 비두에도 마을도

역시 안개에 쌓여 있다. 만약 안개가 없었다면 아마 피레네 산맥올라 갈 때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며 걸었을 것이다.


말이 없는 일본인 아가씨를 만났다. 얼굴을 보니 감기가 들어서

코 주위가 발갛기에 일본 말로 감기약 필요하면 주겠다 했더니

처음엔 내가 일본말 하는 것이 이상했던지 곧 알아 듣고 약 먹었다며 말을 한다.

이름이 유키라 했다. 영어를 못할 줄 알았는데 제법 영어를 했다.

그러나 그 뿐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앞서 가던 3명의 남자가 길에 멈추어 서서 한 명의 남자 뒷꿈치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아무리봐도 큰 상처같이 급히 내 배낭속의

거즈를 꺼내며 이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건넸더니 일행 중 한 명이

의사라며 거즈보다 좋은 넓은 치료용 밴드를 붙여 주었다.

시카고가 고향인 그는 사촌이 한국의 해군과 같이 근무했다며 고마움과

친밀감을 표현했다.


길을 가다가 이상한 구조물을 보았다. 집 앞에 약 1m 높이의 돌기둥 4개위에

작은 오두막을 만들어 놓고 짚으로 지붕을 만들고 외관은 널판지로 가로막았다.

이게 뭘까? 가족묘는 아닌 것 같고 저장창고일 것 같았다.        

이후 이런 오두막은 거의 모든 집들이 하나씩 보유하고 있었다.

이 곳 갈리시아 지방의 독특한 음식물 재료 저장창고인 것 같다.


급한 경사는 아니지만 끝없은 하산길이다. 길도 조금 불편하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비가 왔기에 자갈길이 오히려 걷기 편한데 좁은 산길에 큰 트랙터 하나가

올라오면서 땅을 뒤엎어 버리니 다시 거친 흙길이 되어 버렸다.


아직은 한참 더 내려가아 햐는 듯 산 아래 마을은 보이지 않고 건너편 산에

구름이 걸려 있는 것만 더 선명하게 보인다.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하는가.

다행히 걷는 길이 편한 숲길이라 비에 젖은 숲냄새가 참 좋았다.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편해졌다. 가끔 가랑비는 오지만 비는 서서히 그치고

날은 훤해졌다. 마을마다 아름드리 괴목들이 이끼에 가득 덮여 흉칙해 보였다.


파산테스 마을을 지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달랑 달랑 하는 소방울 소리가 들렸다.

맞은 편 골목에서 소떼들이 오고 있다. 날카롭고 커다란 뿔을 가진 누런 황소들이

내가 있는 길로 우르르 밀려 오는데 옆에 집들 때문에 어디로 피할 틈도 없다.

그 뒤에 농부 한 명이 긴 막대기를 들고 소들을 한 방향으로 가게하고 소 사이를

개 한 마리가 다니며 역시 소들이 앞으로 가도록 짖어 댄다.


마을 길 가운데 횡으로 가로지는 작은 수로를 덮어 놓은 철 덮개를 소 한마리가

발을 올려놓았다가 살짝 미끄러지니 그 다음 소들이 그 철덮개를 누구도 밟지 않고

어떤 소는 옆으로 우회해서 걸었다. 어찌 이렇게 사람과 같을까?

사람들도 앞의 사람이 발을 헛딛는 곳은 밟지 않는 법인데 소도 그렇게 하고 있다.

누가 동물을 우둔하다고 할까. 소도 인간과 같은 그런 지능과 본능이 있다.


오늘의 목적지인 트리아카스텔라에 도착했다. 비교적 조용한 알베르게를 찾기 위해

몇 군데 기웃거리다가 옆 길에 있는 곳을 택해 여장을 풀고 점심을 인근

레스토랑에 가서 하며 와인을 주문했더니 레스토랑 이름과 같은 이름의 와인을

한 병 가져다 주며 자신들이 만든 와인이라며 맛있게 먹으라 권한다.


와인 반병을 마시고 남은 와인을 싸가지고 숙소로 돌아 왔다.

빨래를 해서 라디에이터에 널었더니 그 곳에 널리 말라 하기에 몰래 몰래 말렸다.

저녁 먹거리를 위해 인근 마트에 나갔다가 팔레리아 일행을 만났는데

갑자기 마트에서 팔레리아의 큰 소리가 났다. 어떤 처음 보는 키가 큰 남자에게

마구 따지며 혼내고 있었다. 나중에 이유를 물으니 지난 번 라구나에 갈 때

팔레리아 일행이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했다 하니 같이 길을 걷던 그 사람이

자신의 것도 예약해 달라기에 그렇게 했는데 그날 그 사람은 오지 않고 다른 곳에

가서 묵어 곤란을 겪었다며 그 남자에게 욕을 해 댔다. 그럴 만도 하네.


마트에서 돼지 목살과 베이컨 마늘 그리고 양상추 한 덩어리를 샀다.

저녁에 해 먹을려고 마늘을 잘라 놓고 양상추를 깨끗한 것만 골라

내 침대 옆에 두었는데 내 침대 옆에 여장을 풀었던 여자가 조금 후

다른 방으로 옮겼다. 그 순간 내가 아차! 했다. 저 여자분이 마늘 냄새

때문에 그랬구나 하고.. 서둘러 마늘을 비닐로 싸서 보관했다.


그날 저녁은 마지막 대한항공 기내 고추장과 함께 최고의 만찬을 즐겼다.


숙소는 짐작대로 조용했고 비는 여전히 오고 있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