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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와 함께 한 남도순례 - 장수군

carmina 2017. 3. 22. 12:00

 

 

 

 

2017. 3. 8

 

 

전라남도 곡성에서 레일 바이크를 즐기고 구례 산수유마을에 들러 주마간산하며 섬진강 따라 매화꽃의 북상속도보다 더 빠르게 올라오다가 버스의 머리를 내륙지방인 전라북도 장수군으로 향했다.

 

장수군에서의 체류는 군청에서 숙박지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 숙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장수하면 한우와 사과가 유명한 곳이기에 우린 한우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장수군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보이는 커다란 한우판매 전문점에 도착해 가격을 보니 아무래도 우리같이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어 사과 한 상자을 사서 차에 싣고 군청직원에게 고기를 싸게 살 수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직원이 직접 나와 우리를 육류 도매점으로 안내해 주었다.

 

 

진열된 고기들의 가격을 보니 문득 집에 사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일행들도 같은 생각이지만 고기를 가지고 다닐 수 없어 우리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의 아침에 이 곳을 들러서 가기로 했다. 고기는 아무래도 한우가 인원이 많아 비용에 부담이 되어 저렴한 덩어리 보쌈고기를 사서 숙소에서 해 먹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숙소는 장수군 지지리의 지지계곡에 있는 지지펜션으로 겨울이라 손님이 없는지 조용했다. 남녀 인원이 많은 우리를 위해 특별히 화장실 하나를 더 사용해도록 배려해 주고, 여러명의 식사를 위해 이것 저것 주방도구들을 빌려 주신 주인이 고마왔고 우리를 반겨주는 개들과 고양이가 반가웠다.

저녁은 보쌈. 우리의 여행에 참 다양한 음식메뉴들이 준비되니 역시 여행은 여러명이 다니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늘 저렴한 비용으로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노력하는 일행들이 좋다. 보쌈과 함께 나온 봄동은 입맛을 돋게 하는 일품요리였다. 더우기 군청직원이 부부동반으로 맛있는 김치와 반찬을 들고와 음식은 더 풍성해 지고 밤 늦게 계속되는 즐거운 대화 속에 그래도 내가 나이가 많아서인지 밤 12시넘어까지 같이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다음 날의 일정을 위해 내 컨디션을 아껴 두어야 할 것 같아 슬그머니 이층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밤에 눈송이가 펄펄 날렸다. 마당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대장님은 혹시 눈이 많이 내리면 입구를 빠져 나가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다행하게 눈이 밤새 오지는 않은 듯 아침에는  장안산 고개길을 올라가는데 대부분 도로의 눈이 녹았지만 부분적으로 눈이 안 녹아  구불 구불한 길을 오르고 내려가느라 조심스럽게 운행해야만 했다.  ​

늘 그렇듯이 느지막히 일어나 어제 보쌈 끓인 국물을 이용하여 배추를 넣어 끓인 구수한 국과 함께  아침을 먹고 느지막하게 버스에 올라 우선 버스의 바퀴가 출발할 때부터 상태가 안좋아 바꾸기로 하고 타이어 판매소에 들러 교체하는 동안 우리는 주위의 커피샵에서 우아하게 모닝커피를 즐긴 후 장수의 유명한 논개사당을 찾았다. 논개는 이 곳 장수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왜군 장수와 함께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기생으로 미천한 몸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뜻있는 여성이었다.

논개가 태어난 마을은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다. 인터넷에 보면 논개의 출생에 대한 설은 여러가지 있지만 그래도 그 중 역사적으로 고찰해 증명된 것으로 일관되게 알리는 것 같다. 그러나 몇 년전 일본에서 논개와 떨어져 죽은 일본 장수와의 영혼결혼식을 시켜서 장군의 죽음을 마치 순애보로 만들어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더욱 가슴을 치며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논개를 충절을 우롱하는 일본행사에 한국관리들이 참석했다는 소식이었다. 겉으로는 일본과의 화친을 위해 참석했다고는 하지만 정말 배알도 없는 정치인들의 생각에 논개의 후손들이 치를 떨었다 한다.

이제는 시골마을이라도 내부는 거의 현대식으로 사는 듯 처음 본 집의 전면은 커다란 반사 유리창으로 가리워져 있다. 혹시라도 유리를 보고 날아들다가 부딪혀 충돌사하는 새들을 위해 앞 마당에 맹금류의 그림을 커다란 셀로판지로 걸어놓았다.

 

 

 

 

마을 건물들의 지붕이 모두 특이하게 너와로 만들었다. 일부는 참나무로 된 너와가 있지만 대부분 얇은 돌로 된 너와를 덮어 놓았다. 가운데 있는 가옥이 지붕공사를 하는지 너와를 뜯어내는데 우리 일행 중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강시인님이 직업상 호기심이 동한 듯 지붕위로 올라가 이것 저것 보고 있었다.

일행들이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을 때 혼자 천천히 동네를 산책했다. 마을은 산에 둘러 쌓여 포근해 보였고 마을 옆으로 작은 냇물이 흘렀다. 그 냇물로 물레방아를 둘렸는지 수로가 이어진 끝에 그다지 크지 않은 물레방아가 오늘은 쉬고 있다. 이 마을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곡식을 가공하는지 디딜방아도 있고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연자 맷돌도 보였다. 연자맷돌 상태로 볼 때 최근까지도 사용한 흔적이 있었다.

 

디딜방아가 있는 곳에 나이드신 아저씨가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앞에 염소가 누워서 있길래 자고 있나 하고 가까이 가보니 죽은 상태였기에 물어보니 조금이따 가져다 버릴거라 하더니 우리가 전망대로 올라갈 때 죽은 염소를 지게에 지고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가끔 오는 관광객을 위해 차를 마실 수 있는 흙과 나무로만 만든 창이 넓은 주택도 있어 여름에 넝쿨이 자라면 손님들이 좋아할만한  운치있는 카페가 될 것 같다. 그런 오래된 집 뒷편에 새로 지은 듯한 단독주택들이 옆의 주택들과 어울리고 예쁘게 자리잡고 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에 밭에 덮어 두었던 검은 비닐이 찢어져 바람에 날려 나무에 걸려 보기 흉했다. 바람이 하는 일을 어쩔 수 없지만 조용한 마을 이미지가 그 지저분한 비닐에 크게 손상을 입었다. 누군가 장대로 떼어내면 좋으련만...

늘 외국을 다니며 부러운 것이 외국은 농사일을 하는 마을도 집이나 마을 주변이 무척 깨끗하다. 농기구를 들여 놓는 창고가 따로 있어 외부에서 보면 잔디가 잘 다듬어진 곳에 깨끗한 집들만 보이니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의 농촌은 논일 밭일 하고 돌아오는 농기구 바퀴에서 떨어진 흙이 마을 입구 도로에 너저분하고 비료를 아무 곳이나 쌓아 두기도 하고 돌담이나 나무 담에는 잡풀이 가득하고 흙도 털어내지 않은 작은 농기구들이 그대로 집 옆에 방치되어 있어 그런 모습을 볼 때 참 안타깝다.

전망대에 오르니 마을 전경이 한 눈에 보였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은 아름다운데 조금 벗어난 곳에 서 있는 먼지때가 가득한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이 주위 풍경과 너무 안 어울려 왜 저런 건물을 허가내 주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기도 했다.

 

그 곳에서 논개 박물관으로 가는 길로 이어졌다. 단아정이라는 정자와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박물관, 논개 동상 그리고 논개가 살았다는 집을 1986년 전두환 대통령시절에 재현해 놓았다. 부모들이 아이들과 같이 오거나 혹은 아이들이 단체로 견학을 왔을 때 심심하지 않도록 도깨비집을 만들어 놓은 것이 신경을 많이 쓴 명소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관리사무소의 직원이 논개박물관에 우리 일행과 같이 들어가 전시된 것들에게 대해 세세하게 설명해 주느라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런 설명도 재미있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장님이 오늘은 이 곳에서 제일 맛있는 다슬기 칼국수를 소개하겠다며 찾아간 시내의 영광식당 (063-352-4690, 010-6424-3901). 겉보기에도 그다지 크지 않고 실내도 크지 않은데 맛집이면 이렇게 작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선입견이 초록색 국물을 한 숟가락 먹어보고 그만 우리 모두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아들인 듯 주방에서 일어나는 선한 모습의 아저씨가 국물을 더 가져다 주며 인심을 썼다.

 

 

 

 

아내가 칼국수를 좋아해서 여기 저기 많이 다니는 편인데 이제껏 먹은 칼국수 중에 으뜸으로 칠만 하다. 다만 면이 조금 가늘어 굵은 면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쉽긴 하지만 다슬기 수제비를 먹으면 그런 아쉬움을 없을 것 같다. 맛은 있는데 손님이 많이 오면 장소가 좁을 것 같다 하니 주방 반대편에 다른 장소가 있다한다.  메뉴는 오로지 다슬기 칼국수와 다슬기 수제비뿐이었다. 저녁에는 고기를 파는 모양인데 낮에는 오로지 이 두가지만 판다.  그만큼 이 것만 해도 충분히 손님이 많다는 얘기다.

우리 버스와 같이 사진찍으면 손님이 많아질 것이라고 고운 얼굴의 나이드신 주인에게 권해도 사진 안찍겠다고 극구 사양하시기에 우리가 강권해서 모시고 나와 사진을 같이 찍었다. 그런 모습이 좋았다.

칼국수와 수제비로 포식하고 입이 컬컬했는지 버스를 달려 찾아 간 장수군 천천면 천향로에 있는 술아지트. ​머리를 모두 밀어 버린 주인이 웃는 얼굴로 먼저 달려 나와 우리 일행을 맞는다.

아지트(AGIT)라는 말을 한자어로 㿿祉摅 (아지터)라고 써 있길래 물어 보니 술잔으로 복을 받는 곳이라 한다. 이렇게 한자를 읽어서 나오는 말로 뜻을 만드는 것을 무슨 표현이 있던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곳은 전통주를 만드는 곳이다. 실내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문 바로 옆에 피아노가 보이고 그 위에 쌓아 놓은 클래식 가곡 악보들과 포크송 악보들이 있다. 클래식 기타가 있어 얼른 소리통 안을 보니 수제 기타였고 홋수를 보니 그다지 비싼 기타는 아니었다. 줄없는 바이올린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혹시 음악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술만드는 체험을 위해 준비했다며 커다란 스텐대야 위에 막대기 두개를 올려 놓고 그 위에 올린 체반안에서 준비된 보자기에 있는 찹쌀과 섞인 누룩을 힘껏 짜내면 술이 흘러 나와 밑으로 빠졌다. 그 술을 그대로 마셔도 된다며 우리에게 먹어 보라고 전해 주었다. 어떠한 감미료도 안 섞인 술이기에 달콤한 맛은 없었지만 덕분에 깔끔한 맛은 입안에 가득했다.

 

 

 

 

 

이 곳에서 만든 이달의 술이라며 와인병에 담겨 있는 술을 석탄향이라 하기에 설명을 보니 아낄 惜, 삼킬 呑, 향기 香으로 써서 아껴서 마시는 향이 좋은 술이란 것을 알았다. 표현으로는 와인이라 하는데 한 잔 마셔보니 전혀 향을 느끼지 못했고 단지 깔끔한 맛만 가득했다. 그는 말했다. 이 술은 앉은뱅이 술이라고.. 즉 많이 마시면 일어서지 못한다는 말이다. 술이 담겨있는 와인병을 슬며시 돌려 보니 '味술관'이란 단어가 나를 웃음 짓게 하고 "술은 금방 그리움이 되네 그대가 보고 싶소" 라는 글귀가 어쩌면 그리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써 놓았는지 또 한 번 웃었다.  또한 와인잔이 거꾸로 걸려 있는 주방 선반에 내가 좋아하는 라틴어 CARPE DIEM (까르페 디엠)이 나무로 조각되어 있었다. 술이 술술 넘어가는 곳이다.​

가곡집을 펼쳐들고 주인에게 피아노를 치며 노래부르겠다 하니 이 분은 음악을 상당히 많이 연주했는지 악보를 보지 않고 코드진행으로 내가 부르는 김연준의 '청산에 살리라' 노래를 반주해 주었다. 술집에 왔다 가는 손님에게 싸 줄 것은 술 밖에 없는지 우리가 직접 짜서 만든 술을 커다란 통에 가득 담아 주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커다란 물레방아가 있다는 방아실 체험마을을 들렀지만 물레방아는 돌지 않았다. 그 마을에 공부를 끝내고 들어가는 학생들이 버스를 보고 신기한 듯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정이 거의 끝났다는 즐거움인지 아니면 더 놀고 싶은 발악인지 버스안에서 신나는 댄스음악이 나오니 몇 몇 흥에 겨운 일행들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두 분위기에 휩쓸려 앉은 채로 손을 높이 올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운전하던 대장님이 길 옆의 공간에 차를 세우고 일어나 버스 가운데로 와서는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기에 혹시 뭐가 잘못되었나 하고 모두 의아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우린 모두 떼거지로 좁은 버스 안에서 열광했다.   

그날 저녁은 모두 내일이면 떠난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으로 어제 군청 직원이 가져다 준 돼지껍데기 볶음과 함께 늦게까지 담소하고, 캠핑을 꿈꾸던 헌준씨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결국 버스 옆 마당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지냈다.  

이제 내일 올라가는 여정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우리에게 지난 보름간의 여행은 그야말로 평생 잊지못할 추억꺼리일 것이라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 2050 소통을 주제로 떠난 여행은 그야말로 여행을 통한다면 세대간의 차이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완벽한 소통을 이루었다. 20대는 20대대로 자신의 맡은 바 일에 충실했고 50대는 50대대로 나이를 느끼지 않고 어울렸다. 늘 모든 일에 쉽게 화합했고 무슨 일이든지 서로 솔선수범했다.

우리는 첫눈에 모두 한 가족이 되었고 여행 내내 가족처럼 형제처럼 서로룰 돌보았으며 서로가 싫어할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의 즐거움에 그럴만한 부정적인 것들은 껴 들어올 여유도 없었다. 때로는 잠자리가 불편해도 모두가 불편한 내색조차 하지 않았고 긴 버스 여행의 시간들을 즐거운 대화와 노래로 아재개그로 지루함은 늘 버스 밖에서 뛰어 오게 만들었다.

 

여행은 인생의 커다란 청량제다. 그러나 그런 좋은 여행에 많은 것을 기대했다가 실망하여 돌아 오는 경우가 거의 태반이다. 그건 여행에서 무엇을 많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가 산티아고 까미노 순례길을 걸으면서 느낀 것이 '순례자는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감사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가 걸었던 고통의 길과 매일 매일의 고난은 천국이었다. 남들이 모두 힘들다할 때 난 노래했고 감사했다.

여행은 감사의 조건이어야 한다. 내게 일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느끼는 행복, 그리고 자연속에 있는 나 자신만 생각해도 충분히 감사할 조건이 넘친다.

우리의 여행을 통해서 수익금이 생긴다면 불우 청소년이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후원하기로 했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