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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와 함께 한 제주 여행 (2)

carmina 2017. 3. 21. 22:50

 

 

 

 

2017. 3. 3

 

 

​오늘은 3월 3일 삼겹살데이라 해서 삼겹살파티를 하기로 하고 마침 카페의 뒷마당에 장작을 때워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커다란 무쇠솥두껑이 있어 우린 정원에 불을 밝혀 놓고 지글 지글 고기를 구웠다. 식기가 충분치 않아 컵에 밥을 담아 먹으면서도 즐거워했고 이런 경험은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라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날은 어린이 동화책 및 그림책 판매를 같이 하고 있는 카페에서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의 강연이 있었다. 내가 산티아고 까미노에 대해서 또 사진을 잘 찍은 청년 정현씨가 사진기 하나를 가지고 세계여행을 다니며 경험한 인생과 외국어를 거의 못하면서 터키에서 아프리카 모로코까지 5500km를 약 30kg의 배낭을 메고 도보로 여행한 의지의 사나이 헌준씨의 사진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기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 젊은이 이정현의 강의를 들으며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선의로 베푸는 호의는 감사함으로 받아라.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마음을 가지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행복할 것이다. 그런 호의는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 될 것인데 어떤 이들은 그 호의를 똑같은 수준으로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마 평생 빚을 지고 사는 마음일 것이다.  그는 말했다. 이 다음에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더라도 10분의 1은 나를 꼭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쓰겠다고... 여행 중 경비가 떨어져 통장이 0원이 될 정도로 암담했을 때 부딪혀 본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최소한의 비용을 제시하며 도움을 청했는데 요청한 비용보다 거의 10배나 많이 들어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 주었다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전율이 흘렀다. 정말 진정한 자유 여행자들의 모습이었다.  

다음 날 아침은 아메리칸 스타일의 메뉴를 준비했다. 샌드위치와 커피. 준수 청년이 준비한 아침은 깔끔했다. 나는 이런 아침 메뉴가 좋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느지막하게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서귀포를 지나가는데 문득 장터에 차들이 많이 밀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이 장날인것 같아 가보고 싶었지만 일정이 있어 적극적으로 건의는 하지 않았다.

일행의 페이스북친구가 감귤농장을 한다기에 찾아간 곳. 어느 곳에서 까만 차 한 대가 나타나 우리를 농장으로 안내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헐리우드 배우 로빈 윌리암스같이 환한 미소와 넉넉하게 품격을 가지신 분이 이미 이전에 몇 번 만난 듯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 준다.

보통 손님들 온다고 하면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외모도 신경쓰는 것이 보통인데 그 분은 그냥 일하시던 그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런 꾸밈없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친한 사이 아닐까? 나도 늘 이런 모습을 꿈꾸어 왔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음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결혼 후 우리 집은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 참 드물다.

 

우리에게 제일 먼저 건네주는 귤들이 무척 달다. 여기까지 왔으니 감귤농사를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다며 귤 나무들 사이로 데려가 여러분들을 위해 일거리를 하나 준비해 놓았으니 해 보라며 권하는데 그다지 크지 않은 귤나무을 옮겨 심는 작업이었다.  철봉으로 된 삼각대를 세우고 도르래로 쇠사슬을 이용해 나무를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들어 올렸다. 그렇게 뽑은 나무는 다시 양지 바른 곳으로 옮겨 심었다. 그리고는 기존 나무들의 가지치기 요령을 알려 주는데 나무에게도 참 심오한 인생의 진리와 적자생존이라는 가혹한 현실이 있음을 배웠다.

농부는 될법한 가지만 돌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매가 튼실하고 많이 열릴 가능성있는 가지들이 햇빛을 많이 받게 하기 위해 햇빛을 가로막는 잔가지들을 밑둥이까지 싹 잘라내야만 한다. 그렇게 잘라낸 곳이 빗물기가 들어가 썩으면 다른 가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니 특별히 코팅제를 발라 완전히 막아 놓아야 한다. 햇빛의 방향을 보아가며 가지를 잘라내고 보살피는 일이 손이 많이 갈 것 같다. 혹시 이런 곳에 와서 일손 바쁠 때 단기 아르바이트해도 되느냐고 물어보니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갑자기 구미가 당겼다. 대부분의 귤나무들이 모두 수확되어 남은 것이 없지만 우리를 위해 하나만 남겨 놓았다며 따서 주는데 귤을 콕 깨물어 보니 달콤한 즙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 분은 우리에게 고맙게도 인근 동화식당에서 맛있는 돼지고기 두루치기을 대접하고 여행경비도 보태주셨다. 이런 친절에 우린 몸둘바를 몰랐다. 선의로 베푸는 호의는 감사히 받자.

제주도 올레길 3코스는 제주도만 평생 촬영한 김영갑사진작가의 두모악갤러리가 있어 이전에 가본적이 있다. 우리 일행들이 ​사진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있어 이 곳은 꼭 들러야했다.

김영갑작가의 작품들을 보면 사진 하나를 찍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한 곳에 머물렀는지 보이는 듯 하다. 셔터를 눌러야 할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는 마치 맹수의 기다림같이 바람 한 점의 흐름, 구름의 위치, 풀 한포기의 흔들림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무지개가 있는 사진을 보며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뛰는 작가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예술가는 죽어서 이름과 작품만을 남기듯이 그도 왕성하게 작품에 몰두해 있을 때는 비참한 생활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폐교를 개조해 만든 두모악 갤러리 안에 마치 배의 돛대나 선체 일부인듯 아니면 폐가의 기둥이나 서까래에서 뽑아 온 듯한 나무들이 많이 세워져 있어 무엇인지 궁금하여 안내원에게 물어 보니 작가가 직접 만든 것이라 하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린 여행 내내 늘 웃음과 아재개그를 하며 다녔는데 이 곳 갤러리에서는 가장 숙연한 시간을 가진 듯 했다. 예술을 위해 온 몸을 희생한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랄까.

 

문득 갤러리 안에 걸린 액자에 작가를 위한 노래를 만든 악보가 있어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러보다 여기 가사를 옮겨본다.

 

제목이 '김영갑씨', 양인자 작시, 김희갑 작곡, 김진권 노래

이것 저것 하려 갈팡질팡 하다 Um

​인생이 그냥 저냥 흘러갑니다.

인생사 아뿔싸 알기야 알죠만 Um

​안다고 당신처럼 살아집니까

​삽시간에 사라질 황홀을 찾아

비에 젖으며 칼바람 맞으며 신명대로 산 당신​

오늘은 바람되어 ​내 등짝을 번쩍 Um

죽비처럼 후려치고 가는군요

사람들 틈속에서 튕겨져 나와

달빛과 놀며 꽃바느질하며​

재미나게 산 당신

당신 정말 하고싶은것만 하시네​요

매일 계속되는 여행에 피곤한지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뒤에 누군가 누워 자고 있다. 오전에 버스가 서귀포를 지나며 외돌개이정표가 보이기에 문득 내 이전 직장상관이 외돌개에서 펜션과 카페를 하는데 가 보자고 했더니 모두 좋다고 하며 펜션 '외돌개나라' (064-732-1183)를 방문했다.

대학졸업 후 내 첫 직장의 상관이자 다음 직장의 상관이었던 그는 클래식음악 매니아였다. 그래서 나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 이전에 그 분이 살던 서울 압구정동집에도 방문하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CD와 LP들 그리고 그의 거의 전문가 수준의 클래식 음악 상식에 놀랐었다. 은퇴 후 그는 제주도로 내려와 건물을 하나 구입해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하면서 여느 사람과 다르게 주요 재료를 모두 이태리에서 수입하여 건물을 독특하게 꾸몄으며 또한 입구에 저명한 예술가에게 의뢰해 많은 돈을 들여 외돌개를 상징하는 커다란 탑을 세웠다. 그는 '사람들이 게스트하우스는 기억을 하지 못해도 이 작품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한다. 제주에 와서 그는 늦은 나이에 제주 관광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제주의 여러 음악인들과 어울리며 틈만 나면 여행을 다니셨다. 이전에 아들이 게스트하우스 옆에서 카페를 했는데 카페가 잘 되어 커피공장을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1억을 투자하여 커피 볶는 기계를 들여와 업종을 변경했다. 그 분은 한 때 가을이면 마당에 열린 감귤을 내게 한 상자씩 보내 주시곤 했다.  

내가 매번 제주도 올 때 이 분에게 연락을 드리고 때론 아내와 친구들과 같이 와서 묵고 가곤 했다. 이번에도 제주에 오자마자 전화를 드렸더니 지난 해 ​자전거로 유럽일주를 하였다 하시기에 연세도 많으신데 참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다.

우리가 방문하니 사모님이 막 구워 낸 고구마를 가지고 와 우리는 출출한 배를 달랬고 오손 도손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즐겼다. ​

이젠 여행이 조금 피곤해진 것일까? 그 날은 저녁에 특별한 일 없이 숙소와 같이 있는 카페올림에서 담소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계란을 삶아 챙기고 우리에게 멋진 카페 공간을 이용하게 해 준 목회자 겸 카페 주인 커플을 위해 내가 찬송가를 하나 불러드리고 떠나왔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가방을 놓고 와 주인이 가져다 주는 해프닝이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고 우리는 어디로 갈까 의논하다가 모슬포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어디든 가도 좋다. 이 버스와 함께라면...

아직 사람이 뜸한 모슬포항. 작은 배들이 출항하고 있다. 바닷가에 버스를 세우니 사람들이 지나가며 신기해 한다. 여행하는 내내 그랬다. 차창가에 앉아 밖을 보면 늘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버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마 방송에서 본 버스가 지나가는구나 하는 반가움이었으리라.

모슬포항에는 빨간 등대가 있고 건너편 방조제엔 하얀 등대가 있어 멋진 대비를 이루었다. 우린 빨간 등대에 나란히 서서 또 한 장의 기념될만한 화보를 촬영했다. 그 이후 우리에게 공통된 의견이 '이 사진들을 모아 화보를 만들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모두 다 사진앞에서 자연스러웠고 또 작가가 상황에 맞은 어울리는 장면을 연출하여 우린 마치 모델들처럼 여러가지 포즈들을 취했다.


바닷가에는 동남아에서 온 어부일꾼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제는 생산공장은 물론 농사일도 어촌일도 ​이런 동남아와 서남아사람들이 무척 많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들 중 이슬람국가들이 많아 그들이 한국여자와 결혼시 부인은 당연이 무슬림이 되어야 하고 그 자녀들까지 같은 종교를 가져야 하는 무슬림 율법에 따라 정착하기 힘들었던 이슬람종교 신자가 한국에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평생 직장 생활동안 많은 무슬림 국가를 다녔고 그들의 종교에 따른 행동을 잘 알기에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찌 변할지 기독교인이로서 기도제목이기도 하다.

 

 

 

바닷가 식당의 수족관에는 내 팔뚝만큼이나 큰 농어들이 좁은 공간에서 유연하게 돌고 있었고 어느 곳에서는 고등어들이 떼를 지어 스피드 스케이팅 경주하듯이 링크를 달리고 있었다. 길가에 말리기위해 널어 놓은 ​생선들을 보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바다가 가까운 우리 동네는 시골에서 참외나 수박서리 하듯 애들은 생선서리를 했다. 건조시키기 위해 집앞마당이나 지붕에 널어 놓은 생선 특히 당시는 조기가 흔했기에 살이 두툼한 조기 몇 마리를 훔치고는 판에 있는 생선들 간격을 다시 잘 조절하여 없어진 것이 모르도록 만들고 놓고 어느 집 연탄 불에 구워 먹는 생선은 정말 꿀맛이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찾아 간 바닷가 식당에서 적당히 간단하게 먹을려던 계획이 주인의 권유로 가격을 절충하여 농어회를 곁들인 아침상이 나왔다. 농어회에 지리탕까지 챙겨주니 아침으로 적당했다.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커플이 우리에게 영어로 우리가 먹는 메뉴가 무엇인지 묻는다. 우리 사진 작가가 영어와 중국어를 잘 알아 답변을 해 주니 무척 고마와 하며 그들도 생선지리탕을 시켰다. 옷을 콤비로 맞추어 입은 홍콩에서 왔다는 그 커플들의 식사비까지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계산해 주니 너무 고마와 하며 밖에 나와 마을 버스 앞에서 사진촬영도 했다. 긴 여행을 다니며 늘 낯선 이들에게 호의를 받은 사람들은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데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누군가 식당 문을 열고 자기가 임택씨가 페이스북 친구인데 마을버스가 앞에 있어 반갑다고 하니 대장님이 즉시 뛰어 나가 그 분과 마을 버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침을 먹고 어디로 갈까 의논하다가 바다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송악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는 길에 넓은 벌판에 이른 시간부터 나와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버스가 늘 이런 길을 택해서 가니 이런 농부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 좋다. 결혼할 때 돈이 없어 당시 보편적으로 가던 제주도 신혼여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 후 10년도 더 지나 제주도를 아이들과 함께 방문했을 때 아이들을 위해 주로 찾아갔던 테디박물관, 영화박물관 등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곳만 방문하고 나서는 앞으로 제주에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올레길이 생긴 후 한 번 걸어보고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어 자주 내려오게 되었다. 제주도를 제대로 알려면 자연과 제주도민들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올레길을 걸어야 한다고 늘 주장하는 나이기에 이렇게 마을 길로 들어서면 기분이 좋다.

 


송악산 입구에 벌판에 한가롭게 풀을 뜯는 말들이 일행을 유혹했는지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말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 우리 몇 명은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멀리 추자도와 마라도가 보이고 눈이 좋고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도 보일 정도로 시야가 뻗어 있었다.

많은 여행객들이 송악산을 향해 올라가고 내려오고 있다. ​송악산에는 일제시대에 일본군들이 만들어 놓은 동굴진지들이 몇 개 보였는데 제주도는 섬 주위로 해안가에는 이런 곳들이 자주 보였다. 멀리 산방산이 모자처럼 우뚝 서 있어 사진찍기 좋은 포인트들이 많아 사람들은 걷기보다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올레길은 송악산을 길게 돌아 내려 오게 되어 있다.

송악산을 오르다가 일행중 한 명이 파노라마 사진 한장에 같은 인물을 여러번 넣어 찍는 방법을 알려 주어 사진 하나 제대로 찍기 위해 열심히 뛰어 다녀야 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여자 두 분이 송악산 위에서 말을 탔다. 이런 곳 아니면 어디서 말을 타 볼 기회가 있을까?  

서부 영화에서나 보던 우아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이젠 어디가서 '나 말 타봤어' 라고 말할 수 있겠지.

모두 다 송악산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는데 늦게 올라온 준수가 기타를 가지고 왔기에 즉흥적으로 버스킹을 연출했다. 내가 기타를 들고 우선 기타케이스에 만원짜리 한장을 넣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데 아저씨 단체 관광객이 올라오더니 케이스에 1000원짜리 한 장을 집어 넣기에 기분이 좋아 신나는 노래를 불렀더니 모두 흔들어 댔다. 남들 보기에 풍기문란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다지 오래 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충분히 신이 났다. 차라리 둘러 서서 노래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했다. 흥이 시작되면 멈추지 못하는 우리들. 그게 문제다.

나 혼자 천천히 내려 오는데 오전에 식당에서 같이 식사했던 홍콩인 커플이 올라오기에 아는 척을 했더니 몰라 보다가 내가 오늘 당신이랑 아침에 같이 식사한 사람이라 했더니 알아듣고 반가와 했다. 마침 따라 내려오는 일행들이 이 커플을 보고 한참 즐거워하고 다시 한 번 단체 사진을 찍었다. 외국의 유명도시를 다닐 때도 낯선 사람일지라도 한 관광지에서 본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거의 다시 보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다.

 

일행 중에 사진작가인 정현씨가 페이스북을 보다가 문득 이 근처에 자기 친구가 놀러 와 있다고 유채꽃밭으로 가자고 제안하여 모두 그곳을 찾아가 친구 커플을 만난 후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샛노란 유채꽃밭안에 들어가 우리 모두 사진 모델이 되어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었다. 나 또한 제주도에 많이 와 보았지만 이렇게 유채꽃밭에 들어가 보긴 처음이다. 유채꽃은 산티아고 까미노를 걸을 때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제주도에서 이 정도 크기의 유채꽃 밭은 산티아고에서는 거의 꽃밭이라고 인정도 못 받는다. 그 곳은 얼마나 넓은 유채꽃밭이 있는지 상상보다 더 크게 생각하면 된다.

또 한 번 의견을 모았다. 용머리 해안을 가느냐 마느냐. 가자는 의견으로 쉽게 결론이 났다. 유채꽃밭에서 바로 옆에 있는 곳이니 버스로 이동을 할 필요도 없었을 정도였다.

용머리 해안 입구에 이곳에 네델란드의 하멜이 도착한 곳이라며 당시의 배를 그대로 건조하고 내부 시설까지 그대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했다. 물론 그 안에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적어 놓았고 선원들의 모습도 만들어 놓았다. 강진에서 이미 설명을 들었고 역사를 알기에 천천히 둘러 보고 매표소를 통해 용머리 해안으로  들어갔다. 용머리 해안 매표소 입구도 올레길 코스지만 표를 사가지고 들어오기는 처음이다.   

 

 

 

 

 

 

 

용머리 해안의 용암괴석및 퇴적층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컸다. 화산층이 쌓이고 쌓여 들쑥 날쑥 삐져 나온 기암괴석이 보는 이들오 하여금 탄성을 지르게 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면 이렇게 될까?  얼마나 많은 세월을 바다의 파도와 부딪히면 이렇게 될까?  곳곳에 커다란 웅덩이가 보인다.

바닷가에 낚싯군들이 몇 명 서 있어 무얼 잡았나 보니 자리돔이라 한다. 그런데 자리돔은 작은 고기를 잡으며 안되는 걸로 아는데 그 들이 잡은 자리돔은 모두 크기가 새끼 수준이었다. 또한 여기 저기 전복과 소라 등 해산물을 놓고 판매하는 아주머니들도 있어 사람들이 소주와 함께 즐기지만 선진국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위생적으로도 그렇고 관광지를 더럽히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음식문화는 참 독특하다. 어디서든 관광지에서는 먹을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바뀔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까?

한참을 걸어가다 작은 다리가 있는 곳의 다리 아래 바닷물을 보니 그야말로 바닥의 있는 바위에 새겨진 물결이 다 보일 정도로 맑았다. 이런 깨끗한 바다를 그대로 간직해야 하는데 돌아 나오며 보니 장사를 하던 사람들, 낚시를 하던 사람들이 있던 자리가 지저분했다. 그런 것들이 모두 바다로 쓸려 내려갔을 것이니 안타깝다. 

 

반대편 매표소로 들어온 우리 일행을 만나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그길을 다시 걷는 것도 좋았다. 일행들은 기암괴석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앞서 가던 나는 무척이나 오래 기다려야 했다. 나이가 들어 그런가? 내 모습을 사진 찍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여행을 다녀도 거의 풍경이나 유적지 혹은 특이한 물건을 사진에 담아 오는 편이다.

오늘 저녁은 조금 특이한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산방산 근처에 있는 탄산온천 게스트하우스. 이곳은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에게 온천을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준다. 여행에 피곤한 사람들은 저렴한 비용에 숙박도 하고 온천도 즐길 수 있다.  짐을 풀고 우선 저녁은 온천탕 앞에 있는 치킨집에서 다같이 통닭과 맥주를 즐겼다. 온천은 실내는 밤 12시까지 가능하고 노천탕은 11시까지 이용가능하다. 또한 찜질방 이용도 가능하며 입장권은 다음 날 아침에 또 이용할 수 있으니 여행객은 아침에 이 곳에서 씻고 나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 놓았다. 탄산온천 탕에는 탄산수가 나오는 원천욕조가 따로 있어 조금 미지근한 물이지만 탄산기포가 몸에 붙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탄산이 많이 나온다.

 

밤 늦은 시간에 서울에서 내려 온 일행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여행을 다니고파 사표를 낸 뒤 몇 년 여행을 하고 돌아와 다시 임용고시를 합격한 당찬 아가씨다. 밤 9시에 시외버스 운행이 종료된다 하니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이 곳까지 타고 온 정성이 ​이쁘기만 하다.

다음 날 아침 11시 체크아웃 시간에 맞추어 모두 그 곳을 떠나왔다. 이번 여행에는 남들과 함께 맘껏 게을러 보기로 했다. 늘 일찍 일어나 일찍 여행을 시작하던 내 모습을 잊기로 했다.

오늘은 한라산의 영실까지 가는 날이다. 영실 매표소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니 고지대라 그런지 더 춥고 어제보다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옷을 더 챙겨 입었다. 이렇게 추울 줄 알았다면 내륙에서 입었던 겨울 등산화를 입고 장갑을 끼고 올껄 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영실까지 올라가 보기로 하고 다같이 길을 걸었다. 바람이 몹시 차다. 내가 입은 옷을 보니 웃도리가 무려 6겹이라 윗몸은 괜찮은데 봄에 입는 등산복 바지가 얇아 황소바람이 가랭이 사이로 지나가는 것 같다.

거의 2.5 km의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 올라갔다. 며칠 전에 보던 한라산의 눈은 어제 따뜻한 기온으로 대부분 녹은 것 같다. 물론 정상 부분에는 눈이 쌓여 있을 것이다. ​해발 1100m 를 지나니 바람이 더 차가왔다. 혹시라도 위로 올라가는 차량들에 동승하기 위해 앞서 걷던 이가 손을 들어 보았지만 모두 그냥 지나가 버렸다. 이 곳은 택시와 승용차는 올라가도 버스는 올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 도착한 영실 휴게소. 더 올라가 보겠다는 4명은 앞서 나갔고 나머지는 휴게소에 들어가 잠시 쉴려 했지만 그 곳은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생각되어 슬며시 나오는데 캐나다에서 온 은주씨가 초코파이를 한 아름 사서 나누어 주며 이 곳에 있으라 했다. 그리고는 훌쩍 산 위로 올라갔다. 아주 간단한 일인데 여러 명이 같이 다니면 이런 작은 불편함도 생기곤 한다.

그 곳에서 한참을 기다리며 산으로 올라간 일행을 기다리다가 너무 늦는 것 같아 찬 바람을 맞으며 내려 오는데 앞서 가던 젊은이들이 군가를 부르며 힘차게 뛰어 내려간다. 우린 잠시 동심이 아닌 군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군가를 부르며 발을 맞추어 뛰어 내려갔다.  이래 저래 우리의 여행은 재미있다. 시시 때때로 터지는 아재개그도 우리에겐 즐거움 중의 하나고 머리를 길러 뒤를 묶은 산사나이 헌준씨를 여자의 대열에 놓고 놀리는 일도 늘 웃음이 터진다.

영실매표소로 시내버스가 올라오는데 배차 간격이 길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추울까봐 관리소의 대기실에 히터를 틀고 있어 잠시 쉬다가 일행들이 모두 내려온 후 버스로 한라산을 내려 오는데 고도가 있어서인지 귀가 멍하다. 한참 구불 구불한 도로를 내려와 주유소에서 버스이 연료를 채우며 물로 바퀴에 부으니 얼마나 열이 많이 났던지 찬물과 만나 하얀 김이 소리를 내며 솟아 올랐다.

오늘 숙소는 일행 중 시인의 군대친구가 있는 애월읍의 별장이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산해진미를 차려 놓으셨다. 큰 방어를 잡아 굵은 회를 준비했고 아주 큰 광어는 탕수육으로 만들어 준비했다. 또한 식사를 위해 깔끔한 지리탕도 준비해 주셨다. 모두 그 정성에 감탄했다.

 

 

 

 

그 분은 일행의 논산훈련소 동기라 해서 더 깜짝 놀랐다. 나보다 군번이 조금 늦지만 당시 그 연대가 모두 전투경찰로 복무를 했기에 아직도 그 깃수가 부부동반으로 약 200명 정도 만난다는 얘기에 모두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거의 훈련이 끝날 때 쯤 거의 모두 같은 날 제대하니 전역한 그 주 토요일에 종로 보신각앞에서 12시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곤 한다. 그래서 이전에 종로 2가에 있는 직장에 10년 정도 근무할 때 보신각 앞에서 서성이는 군인들을 많이 보았다. 

나도 그런 약속을 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군시절 같이 군종생활을 했던 친구를 찾기 위해 애를 썼고 많은 노력끝에 90년대 중반 하이텔 전국 전화번호 안내 시스템으로 대구출신 친구를 찾고 다시 20년 뒤 페이스북을 통해서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던 친구를 찾아 지금도 늘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친구분은 우리에게 지극히 정성스럽게 대해줬고 우리도 그날 저녁 먹고 마시는 일로 마냥 행복했고 신이 났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저녁에 제주에서 트럭커피로 유명한 이담씨가 우리를 위해 최고급 커피를 직접 그라인딩하고 내릴 수 있는 도구들을 모두 들고 숙소까지 찾아와 맛있는 커피를 제공했다. 저녁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자지 못하는 나도 그 날은 정말 그 정성이 너무 고마와 커피를 맛있게 마셨다.

시인은 그날 글쓰기 창작법에 대한 강연을 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글을 쓰지만 체계적으로 배운 경험은 없다. 그래서 늘 부족함을 느낀다. 무언가 더 많이 써야 할 것 같고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하는 것이 내 의무인양 글을 쓰지만 실제 진정한 글쟁이들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 여백의 미랄까. 독자가 생각할 공간을 남겨 두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함이 나는 아직도 초보 글쟁이에 불과한 편이다.

 

저녁 식사후 담소를 하다가 어제 밤 합류한 세계여행가 영선씨가 자기 소개를 하던 중 뮤지컬을 했다는 말에 즉시 그 중 한 대목을 들려달라고 요구하니 제목을 모르지만 닥터에 관한 노래를 부르고 나니 누군가의 제안에 즉흥적으로 연극의 대사들이 오고갔다. 일행 중 막내 준수는 이 대목에서 정말 순간적으로 몰입해 즉흥 대사를 하며 좌중을 휘어 잡아 우리를 모두 놀라게 했다.  그런 것을 보면서 홀로 떠나는 세계여행을 할 정도의 수준이 되면 인생 살면서 그 어떤 일을 시켜도 다 가능할 것 같았다.  

 

따뜻한 방에서 자고 아침에도 주인은 우리에게 콩나물국을 끓여 주셨다.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군대친구의 우정이 한없이 부러웠다. 가장 힘들 때 같이 고생한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 하듯이 그 들은 20대 젊은 시절의 우정을 40년 동안 변치 않고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참 보석같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묵고 있는 별장은 한때 공중에서 본 제주의 10경에 하나에 뽑혔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한다. 기르는 개 몇 마리가 모두 온순해 일행들이 좋아했다.

내일 귀대를 해야 하는 준수를 위해 버스가 제주공항으로 가는데 빗방울이 떨어졌다. 씩씩하게 돌아가는 준수를 보며 우린 다시 별장 근처로 와 친구의 홍해삼양식장을 보기 위해 해변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또 한 번 우리를 즐겁게 한 것은 그 곳에 이담씨가 커피트럭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뜨겁고 진한 모닝 커피를 끓여 주는 그 정성이 고마와 그분에게 케냐산 커피 원두를 한 봉지 사서 가방에 챙겨 넣었다. 

 

 

 

 

 

홍해삼 치어양식은 원래 중국만이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술 이전이 안되어 중국업체와 합작회사를 세워 기술을 들여왔다. 홍해삼 알에서 1그램까지 키우는데 보통 소나무의 송충이 크기만 하다. 그 안에서 치어를 약 70만 마리를 키우고 전량 국가에서 매입해 제주 앞바다에 풀어 놓으면 나중에 해녀들이 다자란 홍해삼을 잡아 판매한다. 홍해삼은 독성이 있어 물고기들은 먹지 않으며 사람이 먹으면 괜찮다 한다.

그는 국내의 여러 곳에 치어 양식장이 있고 제주 애월읍에 있는 양식장은 부근에 LNG 기지가 들어설 계획이 있어 모두 정부에서 보상을 받고 이제 이 곳은 더 이상 양식장으로 쓰지 않는다.

지난 이틀동안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제일 많이 배운 것이 우정과 친절과 배려와 사업에 대한 의지였다.

이곳 양식장을 끝으로 일행 중 청년인 헌민이가 올레길을 걷고 싶다고 배낭을 메고 홀로 무쏘의 뿔처럼 커다란 배낭을 메고 훌쩍 떠났다. 아까 공항에서 준수에게도 그랬지만  대장이 슬쩍 용돈을 챙겨주는 마음씀씀이가 역시 대장다웠다.   

그 곳을 나와 제주항에 도착해 완도로 떠날 준비를 했다. 바람은 많이 불지만 배은 이상없이 운행한다했다. 점심을 먹을 곳이 없어 터미널내 분식집에서 끼니를 때울려 하니 김밥이나 라면이 무척 비쌌다. 왜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옆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대신할까 했는데 그곳은 일반 편의점과 다르게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제공하지 않는단다.  서로 공생공존하는 것 같다.

페리에 올라 이번에는 3등석 객실 선점을 위해 뛰었다. 4시간 반의 긴 항해를 위해 며칠 전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미드 몇 편을 킬링타임용으로 챙겨 두고 혼자 구석에 앉아 즐겼다. 배는 파도에 출렁거렸지만 그래도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갑판에 올라서면 도무지 바람이 강해서 있을 수가 없었다. 멀리 완도의 전망대가 보인다.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이제껏 많은 제주도 여행 중 가장 즐겁게 보낸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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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 

(내용 중 일부는 일행이 찍은 사진들을 인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