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30 금호아트홀
베토벤 영웅 변주곡(Eroica Variation. op 35)의 힘찬 첫 타건이 긴 여운을 남기고 오래 지속되었다.
연주자는 한참을 기다려 그 여운이 작은 금호아트홀을 한 바퀴 돌아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피아노의 건반을 응시했다.
그런 마치 베토벤이 나폴레옹의 등장을 나타내는 듯한 표현이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베토벤의 등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곡을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을 해 놓았지만 나폴레옹이 황제로 취임하는 것을
보고 무척 실망하여 악보의 첫장을 찟어 버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수많은 병사들을 앞에 놓고 이미 드러낸 위용속에 조용히 굳은 의지를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의 연설은 때로는 휘몰아치는 표현으로 군중을 설득하고
때로는 작은 언어와 막힘없는 언어의 표현으로 병사들을 몰입하게 한다.
피아노의 선율은 그렇게 흘러갔다.
연주자는 그러한 베토벤의 생각을 나폴레옹처럼 연주했을 것이다.
연주자 박종해는 6세때부터 피아노의 신동으로 불리우며
금호 영재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지금까지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콩쿨,
더블린 콩쿨, 나고야 국제 음악 콩쿨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제 콩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제까지 많은 콩쿨에서 최연소 연주자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들과 경쟁하고 그 만의 카리스마있는 연주를
들려 주고 있다.
내 아내와 개인적인 친분관계로 어린 시절 연주자가 어떻게 피아노를
배웠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게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의 연주를 들으며
랑랑이나 마르타 아르헤리치같은 세계적인 피아노 연주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23분정도의 긴 연주가 끝나고 연주자는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검은 손수건으로
씻어내며 모든 에너지를 다 발산한 표정으로 인사를 드리고 퇴장했다.
두번째 곡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제 2번을 선택했다.
첫 곡의 정열적인 곡에 비해서 이번에는 조금 서정적인 곡을 선택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첫곡에서 다하지 못한 연주자의 정열을 그대로 쏟아 놓는다.
알레그로로 시작되는 단조의 멜로디를 들으며 문득 내 눈에
피아노의 건반뒤로 손이 반사되는 장면이 보여
마치 4개의 손이 연주하는 것같이 보일 정도였다.
중간 중간 힘차게 때리는 타건의 울림속에 이어지는 선율들.
때로는 안단테로 그리고 비바체로 마무리되는 약 20분 정도의 긴 연주를 들으며
국제 콩쿨에 출전해 연주하는 사람들의 실력은 저 정도구나 하는 것을 들으며
내심 감탄케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국제 콩쿨들은 연주자가 선정한 곡 하나만을 가지고 출전하지 않는다.
대개 많은 날들을 콩쿨이 열리는 지역에서 생활하며 각 단계마다 주어진
소나타 급이나 콘체르토 곡들을 암보하여 연주하기에 거의 신들린 경지의
연주자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는 레벨이다.
처음에 티켓예매할 때 레퍼터리에서 연주자의 요청으로 변경되었다며
나누어 준 용지에 익히 많이 듣는 곡이 있어 반가왔다.
무스르그스키의 '피아노를 위한 전람회의 그림'
전람회의 그림들을 보기 위해 천천히 산책하며 듣는 음악이라 해서
프로므나드라는 쟝르를 붙여 연주한다.
매 곡마다 전시회에서 다른 회랑으로 이동하며 그림을 보듯이
비슷한 선율이 간주곡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간주곡들도 전체적인 흐름만 같을 뿐 모두 형식으로 연주된다.
그림은 그림을 그린 화가의 느낌과 보는 사람의 느낌이 다르다.
밀레의 유명한 작품 '이삭줍는 여인들'도 목가적인 풍경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 그림은 추수 후 버린 이삭을 주어 먹고 사는
가난한 자들의 어려운 삶을 표현한것이라 한다.
연주자의 해석도 그럴 것이다. 작곡가와는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첫곡인 Gnomus 즉 난장이라는 뜻이다.
아마 이 단어를 알고 연주를 들었으면 난장이의 모습들을 연상했을 것이다.
난장이들의 짧은 다리로 뛰고 뒹구르는 모습들이 음악에 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연주자의 몫이다.
어떤 그림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어떤 그림에는 춤을 춘다.
무소르그스키도 그림을 보며 머리 속에 이미 악보를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트레킹을 좋아하며 길을 걷다 보면 가끔 어떤 곳에
한 편의 시들을 적어 놓은 것들을 보며
객기삼아 그 시를 한 번 훑어 보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멜로디로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 보기도 한다.
물론 그런 멜로디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면 그냥 잊어버리지만
때로는 내가 노래하고서도 그걸 녹음해 둘껄 하는 후회를 하기도 한다.
교회에서 찬양을 지휘하면서 늘 나는 대원들에게
가사의 내용을 실제 장면으로 연상하며 그 느낌을 노래하라고 가르친다.
노래를 그림으로 그리듯이
그림도 노래로 표현하면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처럼 나올 것이고
그 음악은 또 연주자의 표현으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3번째 곡은 첫번째와 두번째 곡에 비해서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곡이라 듣기 편한 음악이었다.
문제는 인터미션 후 어느 연주자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즉흥곡
재즈 공연에서는 즉흥곡이 자주 연주되곤 한다.
합주 혹은 각 악기마다 독주로 이어지는 연주는 가끔 들어 본 바 있다.
그런데 이런 클래식공연장에서 즉흥연주라 함은
자기 스스로를 음악과 연주라는 도마위에 올려 놓은 셈이다.
인터미션에 홀에 나가니 안보이던 방송국 카메리가 오늘의 즉흥곡 연주에 대한
매스콤의 관심을 표현하듯 두명의 해설가가 동시에 나와 긴장된 액센트로
오늘의 연주를 설명했다.
가끔 연주자들이 어떤 곡을 바흐풍이나 베토벤풍 혹은 밝은 모짜르트 풍으로
연주하는 것은 들었어도 방청객이 요구하는 곡을 즉석에서 연주한다.
그것도 어떤 실체가 있는 곡이거나 기존에 있던 곡이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 연주한다.
자못 긴장되었다.
어떻게 멜로디를 이어갈 것인지
어떻게 그 화음들을 구성할 것인지.
일반 노래들은 조금 전에 내가 길에서 노래한 것같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88개의 건반을 이용하여 머리 속에 있는 샘솟듯 솟는 연상들을
피아노의 선율로 옮기는 것이 가능할까?
연주자가 마이크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처음에는 관객들의 요청없이
무소르그스키의 작품 하나를 본인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연주해 본다.
이 곡은 미리 연습해 볼 수 도 있다.
그래서 연주에 확실한 기승전결이 있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그는 관객에게 요청하길 자신에게 음 4개를 불러 주면
그 음으로 모티브로 연주해 보겠다고 수줍게 이야기했다.
누군가 레#을 누군가 G#을 그리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어떤 남자가 Bb을 말하니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나를 더 불러달라고 요청하니 한참뒤에 큰 목소리로
'A natural' 하고 외치니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도무지 화음이 될 것 같지 않은
음의 구성이니 모두 어이없는 요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주자도 어이가 없는 듯 4개의 음을 한번씩 만져 보더니 한참을 생각하고
조금씩 조금씩 음을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그 손길들이 바빠지고
음은 점점 화려하게 펼쳐졌다.
연주는 거의 소나타 악장 하나 정도의 긴 연주로 이어지고
지속적으로 관객이 선택한 4개의 음들이 불협이 되어 들렸다.
연주 후 모두 탄성을 지르니 연주자는 이번에는 다른 주문을 요청했다.
어떤 상황을 알려 주면 그에 맞는 곡을 즉흥적으로 연주하겠다고..
앞에 앉아 있는 이가 조그만 목소리로 봄철이니 벚꽃에 대한 상황을
얘기해 주었다. 그것도 단조로 해달라고...
역시 연주자는 조금 난감해 하는 표정 후
그 장면을 연상하듯 머리를 묻고 조금 생각하더니
봄철 하얀 벚꽃이 온 거리를 하얗게 만들어 놓듯 건반을 모두
흰 꽃잎으로 쓸어 버렸다.
이어지는 관객이 즉흥적으로 요구하는 테마에 곡을 연상한
두 곡의 즉흥곡 연주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참으로 대단하고 기록될만한 연주였다.
아마 음악계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킬 수 있고
어쩌면 비평가들의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들을 수 도 있다.
그렇게 박종해라는 피아니스트는 숙련되고 단련되어
세계적으로 우뚝 선 그리고 영원히 후대에 남을 연주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크게 부라보를 외치고 연주장을 나와 자정 무렵에 집에 도착하여
잠을 자는데 쉽게 잠이 안 올 정도로 오늘의 연주가 설레는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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