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부천시립합창단 신년 음악회 - 동서양의 만남

carmina 2017. 1. 25. 08:19


2017. 1. 24


은퇴 후 집에 있을 시간이 많아지면서

햇살이 밝은 낮에 창문으로 환하게 비치는 날은

늘 주섬 주섬 내 음악실 씨디랙을 뒤져 찾는 음반이 있다.


이렇게 맑은 햇살에 어울리는 깨끗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여성사중창 '애너니머스4 (Anonymous4)'의 고음악들을 들으면

햇살에 눈이 녹듯 마음이 편해짐을 느낀다.


이 그룹은 주로 고음악만 연주하는데 조금 독특한 면이 있다.

1986년에 미국에서 결성된 이 여성4중창은 일부러 세상에 잘 안알려진

음악들을 대학 도서관이나 고서방같은 곳을 뒤져 악보를 찾아내어 연주하는

팀으로 유명하다. 그 목소리는 현존하는 어느 Vocal Group에서 찾을 수 없는

Unique 한 색깔이 있고 그 화음은 그야말로 10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오늘 부천시립합창단이 신년음악회로 연주하는 첫곡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18세기의 독일 작곡가인

요한 카스파르 아이브링거의 하프미사곡을 한국초연으로 연주했다.

쉽지 않은 지휘자의 결정이다.

부천시립합창단의 정기 연주회에 오면 무언가 늘 정중하게 초대받는 느낌이다.

평범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보다는 무언가 합창음악애호가들이

연주홀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독특한 음악들을 선곡하니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무척이나 기분좋다.

폴랜드 작곡가인 구레츠키가 그랬고

현대음악 작곡가인 에릭 휘태커 음악이 그랬고

살리에르의 음악이 그랬다.


오늘도 이름도 생소한 아이브링거의 합창음악은 여성합창으로

단지 첼로와 더블베이스, 포지티브올갠 그리고 하프만으로 반주한다.

가사는 여느 미사곡과 형식이 같다.

키리에 - 글로리아 - 크레도 - 상투스 - 베네딕투스 - 아뉴스 데이

역시 18세기의 당시의 연주를 그대로 무대에 올려 놓으려는 지휘자의

욕심이 비브라토 없는 깨끗한 화음에서 보인다.


큰 공연장이 없던 시절, 주로 성당에서 연주하는 음악이었기에

큰 소리로 노래하지 않고 반주도 대규모 편성이 없다.


첼로와 더블베이스도 저음을 연주하는데 포지티브 올갠의 소리는

이 두 현악기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지만 맑은 여성합창과 어울리는

소리는 하프의 영롱한 울림이다. 18세기 당시의 하프는 이렇지 않았으리라.

날개달린 천사들이 가지고 있는 하프였을 것이다.

여성합창이 하프라면 나머지 세 악기는 굵은 남성의 소리같이 들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합창은 성당의 좋은 울림을 의식한 듯

주로 협화음들이 하늘을 날랐다.

이미 1세기 전에 바흐나 헨델이 주로 사용하는 멜리시마도 없었고

담백한 음식같이 조용히 신에게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음악을 드린 것 같다.


그렇게 전반을 꿈같은 음악속에 빠져들고 인터미션후에는

멀리 독일에서 한국으로 음악이 넘어 왔다.


독특한 국악 합창음악을 작곡하는 허걸재씨의 곡 '신용비어천가'

대개 국악합창이라 하면 민요풍을 생각할텐데

허걸재씨의 국악 음악은 서양화된 국악음악인 것 같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정인지등 학자들에게 짓게 한 125편의

대 서사시이다. 가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도 변형된 한자만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우리의 한글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깨닫곤 한다.

누가 그러한 위대함을 알면서 한글을 쓰고 있을까?


허걸재씨는 그러한 위대함을 노래로 표현했다.

125편 중 5편을 뽑아 백성들을 위해 지은 용비어천가에 곡을 붙였다.

또한 반주는 피아노 외에 북과 박이 곁들였다.

박은 타악기로 막대기를 여러개 붙여

주로 처음이나 마지막에 곡을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 곡은 남성합창곡으로 작곡되었고 독특하게 정가를 하는 여성 솔리스트를 두었다.

정가는 일종의 국악 가곡이다.


서양음악 발성이 아니고 또한 국악 발성도 아닌 틈새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소리가 맑고 참 청아하지만 서양가곡처럼 피치가 높지 않고

시조를 읊듯이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것이 특색이다.

무심코 들으면 마치 플랫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런 음악을 어디서 들을 수 있으랴.

남성들의 우렁찬 울림속에서 가느다란 정가의 멜로디가 뚫고 나오고 있다.

흐느끼는 듯한 소리, 외치는 소리 그 속에 맑은 시어가 흐르고 있다.


남성들이 한복을 입고 연주했으면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시대의 보배 작곡가인 우효원씨의 '아! 대한민국' 합창

피아노 2대와 3대의 팀파니 그리고 3대의 북을 연주하는 고수가

무대를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여성단원들의 한복이 무척 고왔다.

남자들은 연미복을 입은 것은 동서양의 만남인가?


이 곡은 태극기의 4괘인 건곤감리를 형상화한 합창이다.

건은 하늘, 불 그리고 정의를

곤은 땅, 풍요, 민족의 숨결을

감은 달, 물, 생명력 - 역사의 맥박소리

리는 해, 불, 광명과 발전을 뜻한다.


북소리를 들으며 무대로 뛰어 올라가 춤을 추고 싶은 욕구가 생길 정도로

역동적인 곡이다. 지휘자도 열정적으로 지휘하다 보니

이 추운 겨울에 흐르는 땀을 씻느라 북과 팀파니가 연주할 때

손수건을 꺼내야만 했다.


객석에서 연주가 끝나니 탄성이 터진다.

팀파니는 그냥 연주로 들을 수 있지만

북은 사람들을 이렇게 흔들어 놓는다.

우리는 모두 천상 한국인이다.


앵콜곡으로 연주한 아리랑 변주곡을 들으며

역시 우리 것이 좋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연주 후 로비에 나오니 날씨가 춥고 명절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다.

문득 나는 오늘 아주 귀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올해도 어디에 있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