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가을을 걷는다 - 강화도 나들길 5코스 고비고갯길

carmina 2011. 10. 1. 22:26

 

2011년 10월 1일

 

한 달만에 다시 찾은 강화도가 완전히 색깔이 바뀌어 있다.

온 천지가 코발트 물빛 하늘과 벌판의 황금색.

주윤발과 공리가 주연한 영화 '황후화'처럼

강화의 거대한 캔버스가 비록 영화처럼 노란 국화는 아니지만

국화보다 더 값지고 농부의 땀이 밴 가을 벼가 금방이라도 땅을 치며 일어설 정도로

진한 황금색들로 마구 아우성을 치고 있다.

 

비록 이미 3달 전 쯤에 걸어 본 나들길 5코스이지만

이렇게 벌판의 색이 완전히 변하니, 길은 눈에 익었어도

주위의 환경은 전혀 색다른 맛이다.

지난 번 산 딸기가 있던 곳 근처의 감나무에는 누런 감이 주렁 주렁 열려있고

밤나무의 밤송이들은 저절로 터져 떨어 질 정도로 토실 토실 여물었다.

 

늘 혼자만 다니던 길을 이번은 무려 35명정도의 인원이 함께 걷는다

몇 번 얼굴 본 사람도 있고, 거의 처음 보는 얼굴들.

아무렴 어떠랴. 모두 웃는 얼굴인 것을..

나는 여전히 길을 흥얼거리며 걸을 것이고,

여전히 숲 속의 거미들은 집을 짓고, 나비들은 나를 에워싸고 날라 다닐 것이다.

 

강화 풍물시장 공터에 모여 간단히 준비운동과 서로 소개를 하고 출발.

우리같은 일행들이 풍물시장 내에 자가용을 주차하는 것이 영업에 방해되었는지

오늘부터 장이 서는 날 이외에는 주차요금을 받는단다. 하루 종일 주차 5000원.

 

장터 옆에 고구마, 빨간 고추를 말려서 팔러 나온 할머니들이 우리들을 바라보는 눈이 빛난다.

 

조용한 주말의 주택가를 지나 국화 저수지로 향하는 길.

강화는 아직도 도심지 가까운 곳에서 시골냄새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엉성하게 써있는 간판이나 오래된 옛집의 대문들.

낮은 담으로 건너다 볼 수 있는 집들,

그렇지만 곳곳에 자금만 있으면 소유하고픈 집들이 가득하다.  

 

지난 번 길을 헤매었던 코스에 나들길 이정표를 하나 달면서

나도 이제는 숙련된 조교같이 길 안내에 일조를 해 본다.

 

좋은 집 앞의 귀하고 비싼 알라스카 사냥개인 허스키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국화저수지 뚝을 지나 왼편으로 걸었던 길을 이제는 저수지의 오른 쪽으로 걸어 본다.

 

저수지에 방갈로식으로 된 낚시터에서 강태공들이 휴일을 즐기고 있다.

보석처럼 생긴 꽃 고마리가 낚시터 주변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대지도 가을이 되니 무언가 화려한 것을 원하는 것인가?

 

저수지 끝 고구마 밭에서 할머니 한 분이 이제 막 고구마를 구울려는지 불을 피우고 있어

혹시 군고구마를 먹을 줄 알았지만 고구마가 익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이미 구워 놓은 고구마가 있으면 좋았을껄..

 

잠깐 돌의자에서 쉬는 사이 강화에 사는 이들이 밤을 잔뜩 가지고 와

길벗들에게 나누어 주는 인정이 보기 좋다. 이래서 여기가 좋은건가?

특히 여기 강화 나들길은 강화주민들이 길벗들에게 여러가지로 편의를 베푼다.

늘 맛있는 술빵을 해오는 분도 있고

길을 가며 열심히 이정표를 달아 주는 분도 있다.

강화군청에 있는 분들도 매번 정기도보에는 따라 나서며 불편한 것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여러 곳의 길을 걸어 보지만

지리산 나들길은 조금 힘 든 코스고

시흥의 늠내길은 밋밋하기도 하고 4코스의 경우는 공장지대를 오랜 시간 걷도록 해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 이기도 하다.

 

강화 나들길은 산과 바다를 적절히 조화롭게 디자인을 했기에

사람들은 산 바람과 강바람을 그리고 들바람을 모두 즐기도록 디자인했다.

그리 높지도 않고 또한 그리 낮지도 않은 적당한 길.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갯벌내음을 여기서는 맘껏 즐길 수 있다.

 

지난 번에 이 곳을 걸었을 때는 구제역의 폭풍이 사라진 후 얼마 되지 않아

외양간의 소도 그리 크지 않았는데 이젠 그 녀석들도 많이 커 버렸다.

제발 올 겨울엔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산길로 접어드니 무성하던 잡초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올 여름 그토록 엄청나게 쏟아져

전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던 폭우로 골골이 패였던 길들도 서서히 아물어 가고 있다.

 

산 속에 자리 잡은 국화리 학생야영장은 오늘도 인적이 없고 낯선 이들만 가득 모여

간식을 즐긴다. 그래도 곳 곳에 화장실이 있어 길을 걷는 것도 여유가 있다.

 

한 두명씩 걸어가면 곳곳에서 인사를 하던 새들도 무리가 걸어가니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가능한 걷기는 소수인원으로 걷는 것을 권장한다.

 

지리산 둘레길에 모 방송국의 연예프로그램이 한 번 방영된 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곳만을 찾는 바람에 마을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 저만 아니고

제발 무리지어 오지 말라고 사정할 정도였다.

 

오늘 걷기에도 많은 이들이 길에 떨어진 밤들을 줍고 영지버섯을 캘려고 해

마을 주민들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정말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산 속의 영지버섯을 비롯한 수확물은 모두 농민의 소득으로 두어야 하고

길 벗들은 그냥 발자국만 남기고 추억만 가지고 가면 된다.

 

펫트병으로 만든 바람개비는 지난 번보다 더 많은 숫자가 돌아가고 있고

멀리 고려산은 정상은 구름하나 없는 맑은 하늘아래 산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 많던 산딸기들과 오디들은 누가 다 먹었을까?

 

지난 번 사람들과 차로 가득차 있던 성광수도원도 오늘은 적막하기만 하다.

 

같이 길을 걷는 어느 나이든 한 분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특히 동요들과 내가 주로 부르는 노래 수십곡을 

4~5페이지 정도의 분량의 용지의 양면에 

모두 펜으로 빼곡하게 적은 복사본을 내가 노래를 좋아한다 하니 한 부를 전해 준다. 

 

사람이 많다 보니 걷는 무리도 여럿이다.

고인돌 근처에서 점심을 하는데 여러 무리로 나누어 먹는다.

나는 늘 하는대로 컵라면 하나와 떡을 준비해 갔는데

강화주민으로 온 이들이 여러 명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밥을 준비해와

푸짐하게 먹는 즐거움도 이런 단체 여행만이 가능하다.

주먹밥을 맛있게 만들어와 나에게 한 개를 전해 주는 이도 고맙기만 하고..

강화의 순무로 만들었다는 김치가 얼마나 맛있던지..

 

점심 후 다시 출발.

다시 숲길로 이어지는 길.

아침에 갑자기 쌀쌀해 진 날씨에 재킷을 입었던 사람들이 서서히 편한 옷차림으로 바뀐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 앞서간 사람이 떨어 뜨린 물병 하나.

내가 지리산 둘레길에 처음 갔을 때 그 물병을 잃어 버려 고생한 생각을 하니 그냥 버려 둘 수가 없었다.

주워 보니 금방 어느 가방에서 떨어졌을 것 온기가 있어 나중에 찾아 주니 무척 고마와했다.

 

길가에 작은 소원들이 빌며 쌓아 놓은 돌탑들 사이에 부처인형들이 누워 방긋이 웃고 있다.

유난히 많은 교회들과, 성당, 절 그리고 굿당들.

오늘의 종착지 근처에 있는 굿당도 나라무당인 김금화씨의 소유란다.

 

하긴 강화는 매년 전국체육대회때 쓰일 성화를 채화하는 마니산이 있고

채화행사때는 선녀복을 입은 여고생들이 특별한 행사를 갖는다.

기독교 감리교가 강화를 통해 들어왔기에 역사 깊은 교회들도 모두 이 곳에 있고

성공회 선교사가 이 곳을 통해 처음 들어왔다.

5코스 중간에도 으시시해 보이는 서낭당과 민가같은 절들이 많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숲들이 그제 내린 비로 먼지가 씻긴 듯

유난히 선명하게 보인다.

벌거숭이 산들이 이렇게 빽빽한 숲들로 변한 것이

몇 년간 나라에서 끊임없이 이어온 조림정책과 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시골에도

전기와 가스를 신속하게 공급해 삼림의 손실을 막아 놓은 정책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곳도 사람이 많이 찾아들다 보니

여기 저기 문명의 쓰레기들이 많다.

은근 슬쩍 버린 캔들, 과자 봉지들과 구석에 쑤셔 넣은 검은 비닐 봉지들..

깨끗한 환경을 지키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만

어차피 자연도 하나님이 다스리라고 만든 것이기에

잘 다스리는 방법을 연구하면 될 것 같다.

그게 방법으로 안된다면 사람들의 사고 관념들을 바꿀 필요가 있다.

 

내가저수지 근처에는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무리지어 점심을 즐기고 있다.

무언가 요리해 먹는 것 같은데 먹고 남은 것은 어디에 버릴까?

사람들이 전자제품은 매뉴얼대로 잘 사용하는데

왜 자연을 이용하는 매뉴얼은 당연히 알고 있는데 지키지 않는걸까?

 

저수지를 돌아 갈 때는 뚝위로 걸었다. 무성한 풀을 밟은 촉감이 좋다.

지난 번에 이렇게 걷지 못해 투덜거렸었는데..

 

작은 농가 마당에 수수와 들깨, 고추들이 가을 햇살에 숙성되고 있고

태양의 맛을 받아들이고 있다. 평화가 보이고 느껴진다.

 

지난 여름의 폭우도 농부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하늘도 올해는 조금 미안했을까?

매년 추수 때 쯤이면 밀려오던 태풍도 올해는 잠잠하다.

이대로 안전하게 수확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조용한 마을길. 고풍스러운 집 한 채의 소유주가 이 곳의 땅부자란다.

선견지명이 있어 땅을 사놓았던 주민들은 후손 대대로 부를 이어간다.

 

덕산삼림욕장에서 잠깐의 휴식 중에 주위의 권유로 내가 노래를 했고

아까 동요를 좋아했던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린 분이 시를 읊었다.

노천명의 들국화라는 긴 시를 암송했다. 아름다운 분.

그래서 여기 시를 옮겨본다.

 

들국화 - 노천명 
 
들녘 경사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 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 틈에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친 들녘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 아름 고이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 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그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거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 잎 두 잎 병들어 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도
들녘에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치른 들녘 정든 흙 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은
이제 시들고 마른 너를 다시 안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 주러 나왔다
들국화야 저기 네 푸른 천장이 있다
여기 네 포근한 갈꽃 방석이 있다

 

 

삼림욕장을 지나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

이 길은 이 곳 5코스 중 백미이다.

일부러 나들길을 걷는 이들을 위해 숲길을 다듬어 놓았다.

쭉 쭉 뻗은 낙엽송이 보는 순간마다 기분이 좋다.

촉촉한 숲 기운들. 좁은 숲길.

 

그런 길에서 좋은 이야기들만 하고 싶다.

거친 소리로 남을 비방하거나, 돈 버는 얘기들을 주제로 삼아 걷느니 차라리 침묵을 권하고 싶다.

 

여러명이 길을 가다 보면 앞 사람 뒷꿈치만 보고 가기가 일쑤여서, 멀리 볼 수가 없어

이 좋은 길을 걸을 때는 아무래도 앞장서는 것이 좋을 것아 조금 빨리 걸어 맨 앞에 서서 걸으니

혼자 걷는 기분이다. 이 기분이 좋다.

 

그렇게 숲길을 지나 굿당에 도착. 길을 마무리한다.

 

참으로 기분이 날아갈 것 만 같다.

이대로 저 아래 외포리를 향해 양팔을 벌리면 갈매기처럼 아니

지금 TV에서 보고 있는 아바타 처럼 날아 갈 수 있을까?

 

요즘 새우축제라 하기에 일부러 작은 어촌장터로 가 보았다.

그러나 축제라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적다.

나도 인천의 속칭 새우젓 거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새우젓은 진하고 역한 냄새가 나야 제맛이다.

 

이제 오늘 종일 길을 걸을 때 보았던 소담스런 배추들이 수확되고

찬 바람이 불면 새우들과 배추들의 조화로 만들어진 김장김치가 

우리 입맛을 겨우내 즐겁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