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제주도올레길

제주도올레길 12코스

carmina 2013. 3. 12. 01:23

 

2013. 2. 28


올레길 12코스

 

원래 예정과는 다르게 올레길 12코스를 걸은 후

다시 친구의 숙소로 돌아와 식사 후에

우린 공항 근처에 미리 예약해 놓은 게스트하우스로 갈 예정이었으나

아무래도 걸은 후 다시 중문으로 왔다가 제주로 올라가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12코스를 걸은 후 우리는 바로 제주로 가기로 했다.

 

마침 짐은 올레길에서 전문적으로 짐만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른 게스트하우스로 옮겨주는 택배서비스가 있어 우리 짐은

걱정 안해도 되었다.

 

아침에 친구와 작별인사 하고, 길을 나서니 비는 오지 않지만

바람이 심하게 분다.

 

어제 마쳤던 11코스의 종착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2번타고

모슬포항으로 가고 그 곳에선 택시로 무릉리 생태학교로 이동했다.

 

택시에서 내리는데 그만 모자가 바람에 날려 학교의 운동장으로 휙 도망가 버린다.

아내와 길을 걷다가 이상한 올레길 이정표를 발견했다. 청색으로 된 화살표를

따라가야 하는데 갈림길에서 화살표의 방향표시부분이 동강나 있어 어디로

가야할지 갈팡 질팡 하다가 문득 이 곳은 12코스의 출발점이기도 하고

14-1 코스의 출발점인 것을 깨달아 길을 멈추고 올레길 안내센터에 전화하는데

마주 오는 다른 올레꾼에게 길을 확인하고 12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끝없이 넓은 밭 사이의 길을 간다. 다른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고

우리는 워낙 바람이 강하게 불어 아무 얘기 없이 걷기만 한다.

 

어제 종일 걸으며 본 풍경들이 이어진다. 양배추밭과 마늘 밭과, 빈 벌판들.

바람을 가로 막을 담이나 숲도 없다.

그냥 온전히 내 몸 하나 만이 바람막이가 될 뿐이다.

길을 한참 가다가 겨우 바람막을 건물 하나가 멀리 보인다.

평지교회. 그야말로 평지에 세워진 교회다.

차라리 광야교회로 불리우는 것이 다 낫겠다.

만약에 이 곳에 밭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광야로 칭할 만 하다.

 

밭에서 일하는 인적도 없고 교회건물 틈 사이에서 바람을 막으며 잠시 쉬는데도

적막하기만 하다.

 

차라리 힘들어도 언덕을 걷는 것이 낫겠다.

이 평야에서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

그냥 무아지경으로 길을 걸을 뿐이다.

지도상으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올레길 코스를 출력해 간 안내서에는 평지교회 다음에는

신도연못이 있다고 했는데 연못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멀리 정자만 보일 뿐이다.

 

끝이 없는 벌판. 때론 아스팔트길도 가야 하고..

아스팔트 길이라도 시골길을 다니는 차가 없으니 벌판과 같다

어디를 봐도 카메라 앵글을 맞출 곳이 없다.

애꿎은 밭사이에 있는 묘지만 맞추어 볼 뿐..

 

멀리 녹남봉의 낮은 봉우리가 보이지만 아직 한참 걸어가야 한다.

저 산 속으로 들어가면 바람을 피할 수 있을려나.

그곳으로 가다 보니 한적한 곳에 정자하나 보인다.

정자 옆에 작은 물 웅덩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신도연못이다.

여름철이면 연못주위에 제법 볼거리가 많았을텐데 지금 계절엔

초라하고 누렇게 변한 잡풀들만 우거져 있다.

 

그래도 연못 옆에는 올레꾼들을 위한 화장실이 있어서

먼길 걸어가다 정자에서 잠시 쉬며 일도 볼 수 있다.

 

아내는 나보고 걸을 때 속도가 빠르다고 투덜댔지만

오늘은 몸무게가 가벼워서 바람의 힘으로 가는지 나보다 한참 앞서간다.

나는 사진도 찍고 여기 저기 보고 다니느라고 아내랑 한참 뒤쳐져 있다.

 

녹남봉 숲길 앞에 와서야 참으로 지겨운 바람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그리 낮지 않은 녹남봉. 언덕 위에 마을 사람들을 위한 운동기구가 있고

내려 가는 길도 잘 정비해 놓았다.

 

그 곳에 올라서 아주 멀리 보이는 산방산을 보니 우리가 참 오랫동안

걸어 온 것이 대단하기만 하다.

봉우리에서 내려오다 보니 작은 대나무 숲이 있는데

세찬 바람이 대나무 숲이 커다란 노래하듯이 소리가 난다.

마을을 지나니 커다란 초등학교.

담장도 없고 운동장도 없고 학생들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 앞 마당에는 흙으로 만든 조각물들을 몇 군데 만들어 놓았다.

 

학교 앞 큰 도로로 나왔는데 이정표가 없다

분명히 앞으로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이정표는 오히려 반대편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 길이 맞는건가?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어쨌든 이정표를 따라가자.

마을 길에 도랑에 썩은 귤들이 어제처럼 버려져 있고

파를 수확할 때 쓰는 듯한 농기계가 넓은 파 밭에 쉬고 있다.

 

지도상에 도원횟집이라는 곳이 있어 그 곳에서 점심을 먹을까 해서

기대를 가지고 걷고 있는데 횟집이라면 멀리 보이는 상가촌에 있어야 할 것같은데

이상하게 길은 상가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한참 가다보니 멀리 집 한 채가 보인다.\

간판은 없지만 저 곳이 도원횟집이구나. 벌써 침이 넘어간다.

도원횟집의 뒷마당으로 접근하다 보니 횟집에서 쓰는 수족관이 버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횟집이 되나?

도원횟집의 앞으로 오니이런횟집이 아니고 무인카페라 써있네.

안에 주인 같은 남자둘이 장작때는 난로 앞에 앉아 있다가 우릴 맞기에

여기 점심 안되느냐고 물었더니 횟집이 안되어 무인카페로 전환했단다.

 

그러면서 점심대용으로 토스트를 알아서 구워 먹을 수 있고

커피와 음료도 있으니 셀프로 알아서 먹으란다.

안에는 아무도 없지만 주방이 있고 나무식탁과 의자들..

여러가지 드립 커피들 .. 냉장고에 음료들, 약간의 스낵..

에라..핑계김에 쉬어가자.

 

커피를 따라 오고 토스트를 굽고..

아내와 나는 편하게 바닥에 기대어 바람에 녹초가 된 몸을 쉰다.

카레 벽에는 수없이 많은 낙서들이 적혀 있다.

나도 매직펜을 찾아 구석에 내 책 소개를 하나 적어 놓았다.

 

우리를 놓아두고 나간 주인은 여기서 12코스 바닷길로 가는

노을이 아름답다며 오후 4시경 걸어가란다.

지금 시간이 1시 반인데 4시까지 있다가 가라고?

그럼 도착점까지 가면 너무 늦을텐데..

그 곳에서 한참을 쉬다가 머니 박스에 대금 지불하고 나왔다.

 

바닷가 길을 따라 걸어 가는데, 어느 곳에서 길의 선택이 나온다.

만조가 될 때는 도로로 가고, 간조일 때는 아래로 걸으라고

간조는 아니어도 바람이 너무 불어 내려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신도포구로 가는 도로를 걷다 보니 계속 바닷가 길을 갈 줄 알았는데 오른편 마을길로

가야 했다. 꺽어지는 곳에 해루라는 이름의 식당 하나.

이 곳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데 아직 홍보가 안 되었나 보다.

아쉽지만 이미 토스트로 요기는 했기에 그냥 지나쳤다.

 

길을 걷다 보니 수확한 무밭에 거두어가지 않은 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다.

아마 수확하다가 조금씩 손상되어 상품가치가 없는 것 같아 그냥 버린 것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 이렇게 버려진 무와 감자가 참 많이 보였다.

 

마을 끝에 현대적인 쌍둥이 주택이 눈 길을 끈다.

넓은 유리창으로 인상적인 이 주택은 병원장을 하는 지인이 남양주에

특별히 지은 집과 참 유사했다. 누우면 별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된 그 집.

언제나 그런 집을 가질 수 있을려나..

 

기상대가 있는 산으로 올라가는 한적한 길에 커다란 무우들이

마치 두더지 같이 땅을 박차고 나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 오를 기세다.

 

언덕을 오르다가 길 오른편에 비스듬하게 경사진 넓은 벌판이 있어

둘이 멈추어 서서 보다가 아내가 문득 하는 말.

우리 굴러 볼까?

나도 그 생각했었는데하고 둘이 배낭 내려 놓고

주머니에서 빠지는 것 없도록 하고 누워서 신나게 아래로 굴렀다.

 

어릴 적 교과서에 있던 글 중에

어느 언덕에서 넘어지면 3년 만에 못산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넘어진 사람이 이제 금방 죽을거라고 고민하는 것을 보고

삼천갑자 동방삭이는 그 곳에서 천 번을 넘어져 3천년을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우린 천 번은 아니지만 적어도 20바퀴는 굴렀으니 아마 앞으로도 몇 십년은

더 살 것 같다.

 

서로 깔깔 웃고 길을 올라가다 보니 그토록 멀리 보이던 고산기상대가 눈 앞에 있다.

기상대 부근에 승용차로 놀러 온 사람들이 보이고..

주차장에 있는 매점에서 오뎅을 팔기에 들어가 뜨끈한 오뎅을 즐겼다.

김포에서 떠나올 때 공항에 있는 식당에서 먹은 비싸고 맛없는 우동보다

꼬치 하나에 500원 하는 오뎅국물이 훨씬 맛있다.

왜 그리 공항음식은 맛이 없는지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서비스다.

 

작은 매점에 사람들이 몰려 온다. 슬며시 일어나

사람들이 몰려있는 정자에 올라가 그만 탄성을 질렀다.

언덕 아래로 파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멀리 풍력 발전용 바람개비가 돌고

발길 밑에는 차귀도가 크게 시야에 들어 온다.

그 곳에서 서 있으니 바람이 너무 세어 날려 갈 것 만 같았다.

 

기상대 언덕에서 내려와 길을 가는데 한적한 곳에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이 곳에 왜 차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이정표가 보이는 곳으로 길이 꺽어 지니 눈 앞에 다른 비경이 펼쳐진다.

 

기상대가 있는 언덕 밑에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층으로 이루어진 지층대가

수 억년 전의 기기 묘묘한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이 곳을 수월봉이라 부른다.

 

절벽아래로 만들어 놓은 오붓한 산책로에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도 있다.

절벽아래 바위 층의 사이에서 떨어지는 물들이 바다로 흘러간다.

절벽 아래 여기 저기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진지가 자주 보인다.

수월봉의 화산암층에서 떨어지는 물은

어머니의 병환 치료를 위해 오갈피 나무를 찾아 절벽에 오르다 숨진

수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누이를 목놓아 부르는 동생의 눈물이라는

전설이라며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그 전설을 보며 내 어릴 적이 생각난다.

오랫동안 서서 일해야 하는 직장생활에 관절이 안 좋으셨던 아버님을 위해

시골에 계시는 사촌형님이 늘 한약재로 쓰이는 준비해 둔 야생나무를 가지러

시골에 자주 갔는데 그 중 하나가 오갈피 나무였었다.

 

바닷가 화산암 돌 들 사이에 커다란 동물 뼈다귀 같은 것이 자세히 보니

바다에 떨어진 커다란 나무가 수없이 파도에 부딪혀 나무의 표피가 마치

부드러운 털같이 변해 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걸어간 절벽 아래 산책로 끝에는 차귀도 선착장이 있다.

선착장을 걸어가다 문득 이 곳이 낯이 익다는 것을 알았다.

제주도에 와서 렌터카해서 다닐 때 이 곳을 들렀던 기억이 있다.

아내도 낯이 익다며 맞장구친다.

 

선착장에는 할머니들이 오징어와 한치를 구워 파는 작은 포장마차들이 있지만

이번에는 그냥 지나친다.

 

차귀도 선착장을 지나 널판지 조각으로 커다란 고기를 만들어 놓은 횟집과

마당에 한치를 널어 말리는 집들을 보며

도로길을 따라 가면서 이렇게 12코스가 끝나는가 했는데

이정표가 펜션이 있는 산으로 가라 한다.

나무 계단으로 만들어진 높은 언덕.

아이고우리를 그냥 편하게 가게 하지 왜 산으로 올라가라는 거야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힘든 다리를 눌러가며 언덕에 올랐다가 우린 또 한 번

탄성을 질렀다.

 

정말 당산봉이라는 언덕에서 내려다 본 제주도의 앞 바다는 그야말로

제주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걷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광경들.

차귀도가 바로 앞에 있고 멀리 활처럼 휘어진 화산 해변들.

저물어가는 해가 구름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빛에 바다가 은빛으로 물들고

파도가 부딪혀 포말로 가득한 바닷가.

 

오늘 그토록 긴 시간을 밋밋하게 걸어와 아쉬웠던 올레길 12코스가

여기 당산봉의 비경 하나로 말끔히 해결되었다.

당산봉 정상에서 용수포구로 완만하고 길게 이어지는 숲길을 내려가다

어느 올레꾼이 귀에 이어폰을 끼고 거의 무아지경으로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며 얼굴이 보니 올레길을 오래 걸었는지

검게 그을리고 입술도 부르텄다.

 

이 곳은 생이기정 바당길이라 부른다.

생이는 제주도방언으로 날라가는 새이고

기정은 절벽을 뜻하는데 새가 날라가는 절벽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행복한 길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다.

멀리 보이는 용수포구까지 파도가 검은 화산암에 흰 포말로 부서지는

바다를 끼고 걷는 내내 얼마나 길이 편하고

행복했던지 힘든 것도 다 잊어 버렸다.              

오전 내내 벌판을 걸으며 카메라 앵글을 맞출 곳이 없었는데

이 곳에서는 어디나 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을 정도로 비경이다.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용수성지에 십자가 만큼이나 높은

야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용수포구. 이제 12코스가 끝나고 이번 여정이 끝났다.

12코스 완주 스탬프를 꽝 찍고 올레길 여권을 보니 내 여권에는

몇 년에 산 것이라 12코스가 마지막으로 되어 있다.

이제 다음에는 13코스에서 다시 시작이다.

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다시 오마.. 기다려라..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는데 서일주버스를 탈려면

도로까지 15분 정도 더 걸어가야 한단다.

도로를 따라 가는 15분이 오늘 종일 걸었던 17키로보다 더 긴 것 같았다.

 

행복하다.

길을 걸을 수 있음에..

내게 주어진 감성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느리게 걸으며 얻어지는 이 기쁨이 부디 오래 오래 지속될 바란다.

내 인생의 여정도 느리게 걷는 길처럼 느리게 가고 싶다.

 

이제 올레길을 3분의 1정도 걸었으니 앞으로 제주도에 몇 번이나

더 와야 할 지 모르지만 그런 남아 있는 코스들을 설레며 기다리자.

 

사랑한다. 올레길아..

사랑한다. 나의 인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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