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대축 - 원부춘)

carmina 2013. 10. 15. 08:45

 

지리산 둘레길 (대축 - 원부춘), 2013. 10. 11

 

간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비가 참 많이 내렸다.

방음이 별로 안되는 한옥이라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문 밖에서 고양이 두마리는 계속 울어댔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밤비 내리는 날,

자연의 몸으로 나가서 비를 맞고 싶은 상상을 늘 했지만

피곤했었는지 그 좋은 기회를 그냥 잊고 말았다.

 

이렇게 많이 오면 오늘 걷기는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나들길같은 평지를 걸으면 비와도 걸을 수 있지만 

지리산은 산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거의 대부분이라

계곡물이 불어 오도가도 못할 상황이 생길 수가 있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세찬 빗줄기에 잠을 설치다가

새벽녘에 빗줄기가 잦아드는 듯 하고 창문이 훤해지는 느낌이 들어

비몽 사몽 일어나 문을 여니 다행히 비가 그쳤다.

 

그제 아침에 처가의 가족들과 새벽에 군산을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서 라면을 먹고, 어제 아침에도 서당마을 마을회관에서 라면을 먹고

오늘도 아침은 라면으로 때운다.

이렇게 3일간 내리 라면을 먹은 적도 처음이네.

어제 저녁은 결혼식장에서 받은 떡으로 해결하였으니 혼자 걸으면

이렇게 먹는 것이 부실하다.

그렇다고 주위에 밤에 문여는 식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자고 몰래 빠져 나오는 노숙자처럼 작은 문을 열고

집마다 담위에 감나무가 주렁 주렁 열린 마을골목을 빠져 나오니

간밤에 내린 비로 코로 시원한 습기가 가득 들어 온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마을 길을 서성거리는 할머니에게 인사드린다.

 

오늘 할 수 만 있다면 2개의 코스를 계획하고 있다.

대축에서 원부춘까지 8.7 Km를 오전에 가고

오후에는 원부춘에서 가탄까지 12.6 Km인데 가는데까지 가보자.

 

두코스 모두 난이도 '상'으로 분류되고

오후에 걷는 코스는 길이에 비해 추정 소요시간이 7시간 반정도로 길어

조금 험난할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빨리 가면 가능할 것도 같다.

보통 아스팔트 평지에서는 한 시간에 4~5 Km를 가고

숲길에서는 약 3 Km 정도, 그리고 언덕이 많은 길에서는 약 2.5 Km를 간다. 

그런데 12.6 Km 에 7시간 반이면 한시간에 1.7 Km 정도밖에 걷지 못하는

험난한 길이 수치로 나온다.

 

보문사를 향해 올라가는 길의 조용한 대촌마을길을 따라 걷는데

한쪽 눈이 불편한 할머니 옆에서 같이 놀던 덩치 큰 하얀 개가

나를 보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따라 오기 시작한다.

 

마을 옆을 흐르는 계곡물에 물에 떠내려온 호박들이 물 속 바위 위에 걸쳐 있다.

도시 사람들이 보면 무척 아쉬워 할 것 같다.

 

짖지고 않고 조용히 따라 오기에 그냥 언덕을 같이 걸으며

내 뒤로 펼쳐지는 풍경을 즐기고 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쓰인다.

아까 할머니가 개를 부르던 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고

개에게 내려가라고 종용해 보지만 말을 듣는 척 하다가 또 따라 온다.

그렇게 한 동안 같이 올라가다가 길가 어느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더니

흰 개가 발길을 멈추고 더 따라 오지 않는다. 역시 개는 개끼리 어울려야 한다.

 

그다지 경사가 높지 않던 임도 길이 점점 가파르기 시작한다.

작은 저수지를 지나 듬직한 소나무들을 보기도하며

가끔 뒤를 돌아 보니 평사리 벌판이 작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내가 꽤 높이 올라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높은 곳에 그림같은 집들이 숲속에 숨어 있다.

임도가 있으니 차가 올라 오기에도 불편함이 없어 별장용으로 쓰기에는 제격일 것 같다.

 

임도의 세멘트포장 길이 끝나는 고갯마루에 화장실이 있는 쉼터가 있어

아침 용변을 해결하고, 어제 마을에서 받은 배를 깍아 먹으며 잠시 쉬고 있는데

트럭 한 대가 그 곳까지 올라 와 주차를 하고 부부가 등산복 차림으로 내려 산을 올라간다.

그런데 모습이 길을 걷는 사람들 같지는 않다.

쉼터의 벤치밑에 누군가 흘리고 간 등산모자 하나가 떨어져 있다.

잃어버린 이가 나중에 얼마나 아쉬워 했을까?

 

산을 다니면 이런 분실물에 조심해야 한다.

특히 잃어버리기 쉬운 스틱, 카메라, 모자, 장갑, 스마트폰 등을

쉴 때는 꼭 배낭위에 걸쳐 두거나 주머니에 넣어 두어야 한다.

배낭을 잊고 가지는 않을테니까..

 

이제부터 더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산길마다 누렇게 갈색으로 변한 밤송이껍질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지만

간혹 밤송이의 내부가 하얗게 되어 있는 것은 밤을 채취한지 얼마 안되고

그런 곳의 그냥 주을 수 있는 밤톨은 하나같이 알이 잘거나

혹은 알이 굵어 집어 보면 벌레가 먹은 밤이라 그냥 버려야만 했다.

 

숲 속에서 문득 빨간 색이 보여 뭘까 했는데 아까 쉼터에서 차를 세우고 올라간 부부가

무언가를 채취하고 있다.

오늘도 제발 멧돼지를 만나는 불상사가 없길... 

 

형제봉으로 향하는 산길은 그야말로 지그재그로 가파른 산행이 이어진다.

깊은 산중이라 큰 나무들마다 밑둥에 이끼가 가득 끼어 있고

숲이 울창해 이젠 산 아래 마을도 보이지 않는다.

산을 올라가다 하늘이 보여 혹시 저 곳까지만 되면 내리막길이 아닐까 하고

그곳에 도착해 보면 길은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다시 이어진다.

가다 쉬고 가다 쉬고...

 

간 밤에 비가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숲속 오솔길은 저절로 떨어진 갈색 낙엽보다

바람에 떨어진 푸른 색의 낙엽이 더 많다. 그래서 길이 더 운치 있다.

지난 밤 비바람이 내가 가는 길에 푸른 카펫을 깔아 놓았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도토리들이 밤송이 만큼이나 많이 떨어져 있다.

머리를 상고머리로 깍은 아이를 보고 도토리같이 깍았다고 하는데

아마 이 도토리를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작은 도토리가 얼마나 귀여운지 카메라를 자꾸 들이댄다.

산 속에 빨간 열매가 오미자같이 열려 있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무슨 열매인지 모르겠다.

이 열매는 마을을 지나갈 때도 자주 보였다.

 

가끔 이정표로도 표시 되지 않는 애매한 길에서는

등산객들이 나무에 매달고 간 무수한 이정표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까? 무아지경으로 올라간다.

 

어느 정도 올랐을까?

정상표시는 안되어 있지만 더 이상 올라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전방에 보이는 산도 높은 산은 없다.

이제 마음 편하게 걸어 보자.

형제봉 능선을 따라 걸으며 바위틈에서 흐르는 물에

머리에 질끈 동여 맸던 땀에 흥건하게 젖은 손수건을 빨아 다시 매고

여유있게 걸으며 이정표에 기록되어 있는 남아 있는 거리표시를 보며

시간을 계산해 보니 원부춘까지 12시 전에 도착될 것 같다.

 

이곳 지리산은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 오니 나무의 꼭대기부터 단풍이 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보름 정도만 있으면 이 곳도 완전히 산 전체가 발갛게 물들어 버릴 것이다.

 

한참 산을 내려가다 보니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비닐 파이프가

산아래로 이어진다.

이게 뭘까? 혹시 고로쇠 수액을 아래까지 보내기 위한 것일까?

가끔 커다란 통이 있고 어느 샘물가에서는 주전자도 하나 엎어져 있다.

 

산 속에 그다지 굵지 않은 나무로만 얼기설기 만든 집이 보인다.

무슨 용도일까? 나무들 사이가 촘촘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아닌 것 같고 저장창고용으로 쓰이는 것 같다.

 

산꼭대기에서부터 조금씩 모여진 물들이 점점 소리가 날 정도로 모여지더니

어느 곳에서부터는 큰 계곡을 이루어 흘러 내려가고 있다.

이 곳 산위에는 논이 없으므로 아마 그냥 식수로도 가능할 것 같다.

그냥 내려가다가 아무래도 이 맑은 물을 즐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등산화를 벗고 발을 물 속에 담그니 얼음처럼 차다.

물 속에서 5분을 못 견딜 정도로 차가와 꺼낸 뒤 발을 보니 발갛게 달아 올라

발이 아플 정도이다.

 

바위들은 건너 뛰며 내려오다가 가는 대나무인 시누내 밭이 터널을 이루었다.

시누대가 있으면 마을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표시라 하기에 이제 원부춘에 거의 다왔음을 감지한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가니  벽에 예쁘게 부처님을 그려 색칠한 작은 암자인 조은사가 있다.

이 높은 곳까지 차가 올라와 있다.

 

이제부터 세멘트 임도로 다시 이어진다.

세멘트 길을 내려갈 때는 발이 등산화의 앞 부분에 쏠려 남들보다 큰 엄지 발가락이 아프다.

조심조심 걸으며 임도를 벗어나니 큰 길이 나왔다.

여기가 원부춘 마을이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이 근처 식당을 하동안내센타에 물어볼려 전화하니

자동안내로 점심시간이라 1시 반까지 통화가 안된다 한다.

부재시 사무실 전화를 핸폰으로 연결해 놓으면 좋으련만...

인적이 없는 큰 길가 펜션에 들어가 문을 열어 소리쳐

사람을 불러 보았지만 답은 없고 큰 개만 멀뚱거리며 나를 바라보더니 따라 나온다.

혹시나 자기 집에 들어왔다고 으르렁 거릴 줄 알았는데

개는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와 언덕길로 가는 나를 따라오고 있다.

 

아스팔트 도로가 가파르게 이어진다.

산속을 걸을 때 가끔 나무들사이로 비치던 햇빛이 이젠 하늘에 구름한 점 없고

달구어진 아스팔트와 함께 열을 발산하고 있다.

도로변 주택 앞마당에는 뜨거운 햇빛에 많은 밤을 널어 말리고 있다.  

 

어쩌다 보이는 길가의 펜션에도 인적이 없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만 상당히 크게 울린다.

아스팔트 도로에 사마귀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다가 내 인기척에 놀랐는지

얼른 배를 하늘로 향하고 누워 버린다. 살기 위해 죽은 체를 하는 것이리라.

그 모습이 우스워 사진 하나 찍었다.

사마귀 왈 '너는 재미있겠지만 내게는 생존본능이다'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길가의 펜션 보이는 곳마다 전화를 걸어 수소문한 끝에 한 곳에서 점심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