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원부춘 - 가탄)

carmina 2013. 10. 15. 10:21

 

지리산 둘레길 (원부춘 - 가탄), 2013. 10. 12

 

원부춘에서 가탄 12.6 Km.

지난 8월 송정에서 출발하여 역방향으로 가탄까지 갈려다가

폭염때문에 너무 힘들고, 이틀 동안 험한 코스를 걸어 지치고 또한  

급히 회사에 일이 생겨서 귀성해야 할 것 같아 기촌마을에서 중도 포기했었다.

그리고 10월 황금 연휴에 남은 길을 갈려고 여기 저기 전화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보니

기촌마을에서 가탄으로 넘어 가는 것보다

원부춘에서 가탄을 간 후 기촌마을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는 추천이 많기에

일부러 순방향코스를 택했다. 

 

원부춘에서 가탄 가는 길은 걷기 불편한 세멘트 길, 그래도 가야 한다.

내가 걷기로 작정한 길이기에, 세멘트포장, 아스팔트포장, 계단길, 흙길을 가릴 수 없다.

원부춘에서부터 시작된 아스팔트 길

햇빛을 피할 길이 없어 가끔 나무로 생기는 그림자가 있는 곳을 찾아 걷는다.

점심을 먹었으니 조금 쉬고 싶었지만 쉴 곳도 없고

주위 풍경은 내려갈 수도 없는 저 밑에 큰 소리를 내며 흐르는 지통골로 불리는 계곡물 밖에 볼 것이 없다.

이정표에 활공장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형제봉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즐길 수 있나 보다.

길이 아스팔트이다 보니 오가는 일반 차가 많아 조심스럽게 걷는다.

 

그렇게 걷던 길이 배나무골에서부터 세멘트 길로 만든 임도로 바뀌었다.

활공장으로 가는 길이니 오가는 차량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선가 대형 공사를 하는지 계속 레미콘트럭이 조심스럽게 가파른 길을

내려 오는데 혹시라도 미끄러져 나를 덥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길은 겨우 트럭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은 길이라 차를 피할 때도 조심해야 한다.

이 트럭이 혹시 산 넘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넘어가는 길도 이런 길이 아닐까?

 

가끔 올라온 길이 궁금해 뒤를 돌아보면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몇 점 떠가고

첩첩산중 뒤에 멀리 아득하게 백양산이 희미하게 보여 기분이 좋다.

맑게 흐르는 계곡물과, 고갯길을 올라가면 부는 산골 바람

새소리가 들리고, 자연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좋다. 

 

언덕길을 올라가다 쉴려고 길가에 앉아도 레미콘트럭때문에 조금 걱정되었다.

한참 올라가고 난 뒤 형제봉으로 가는 길과 둘레길이 갈라지고 그 곳에서 레미콘 트럭이

땅에 콘크리트를 붓고 있었다. 무엇을 만드는 것일까?

 

그 때부터 둘레길은 다행히도 흙길로 바뀌었다.

이제야 시야가 트이고 저 아래 산들이 보인다.

대략 추측해 보건대 이 곳의 고도가 약 800미터 정도 되는 것 같다.

서울의 북한산 정도 높이정도일까?

오늘 오전에 원부춘으로 오기 위해서도 힘든 산행을 했는데

오후에도 비록 거친 산은 아니지만 임도를 따라 그만큼 올라온 셈이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퇴직 후 산티아고 길을 가게 되면 이런 길들을 수없이 걸을테니 숙달되어야 한다고..

 

임도를 따라 능선길을 한참 걸어가니 길이 막혀있고 이정표는 산 아래로 내려 가라 한다.

그래도 사람들이 이정표를 놓칠까봐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친절하게도

'지리산둘레길 아님'이라고 팻말을 세워 놓았다.

 

길이 밋밋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이제 중촌마을로 내려 간다.

중촌마을에 민박을 예약해 놓긴 했지만

빨리 내려가면 오늘 가탄마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지나 칠 수도 있다.

이정표에는 중촌마을까지 40분이 걸린다 한다.

시간상으로 중촌마을에서 가탄까지 가는 길이 험하지만 않다면

가탄에서 하루 묵고 내일 화개장터를 보고 기촌으로 넘어가야지.

그러나 나의 이런 가벼운 생각은 큰 오산을 불렀다.

 

내려가자 마자 가파른 언덕길이다.

그냥 언덕이 아니고 가파른 언덕.

바위 하나 나무 계단 하나도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리가 힘들어서인지 엉덩방아를 찧는다.

다행히 내려가는 길은 좁아 양 옆의 나무들을 잡고 내려 갈 수 있지만

몸무게 때문에 자꾸 몸이 아래로 쏠려 힘들고

수없이 많은 나무 계단을 발로 밟는데 이젠 발바닥까지 통증이 온다.

그 먼 길을 내려 가면서 수없이 많이 한 생각이...

정말 역방향으로 오지 않길 잘했다 하는 안도감.

만약 이 곳을 올라왔으면 중도에 포기했을 것 같은 강한 불안감이 든다.

그러나 산은 내려가는 것보다 올라가는 것이 쉽다고 하니 부딪혀 봐야 한다.

 

사람들은 지리산둘레길 공식홈페이지에 그런 불평을 털어 놓는다.

이건 둘레길이 아니고 산행이라고..

너무 길이 힘들고, 너무 세멘트 길이 많고, 너무 편의 시설이 없다고..

그러나..그게 지리산 둘레길이라고 생각해 버리자.

아무나 올 수 없는 도도함과 올 수 있는 자만 오라는 자신감.

왜 지리산이겠느냐, 이러니까 지리산이지.

 

내려가는 동안 올라오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을 정도였는데

마침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정도 내려가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제 끝날 때도 되었을 것 같은데 아직도 양 옆은 나무만 무성하고 길은 멀다.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이정표도 없다.

하긴 내려 가는 길은 하나 밖에 없으니 이정표 세울 일도 없고

이런 가파른 언덕길엔 멧돼지도 없을 것 같다.

 

통나무를 가로 질러 만든 나무 계단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나무마다 버섯이 피었다가 말라 비틀어져 있다.

아마 비 오는 날 혹은 눈 오는 날 이 곳을 내려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내려 가면서 다리에 힘이 없어서인지 조그만 돌에도 발이 미끄러진다.

산길을 올라갈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걷는다.

 

형제봉의 활공장도 이런 식으로 가파른 언덕이 있겠지?

그러나 그 언덕 위에서는 시야가 확 트인 벌판일 것 같다.

그래야 패러글라이딩이 가능할테니...

 

40분걸린다는 길이 족히 한 시간은 더 걸린 것 같다.

한 참을 내려가다 개인 사유지를 표시한 녹색의 철조망이 어찌나 반가운지..

그리고도 한 참을 내려가니 좁은 숲길을 막 나서는데 갑자기 선한 얼굴의 남자분이 나를 반긴다.

오느라고 수고많았다며...아저씨를 보니 안도감이 생기고

아무래도 너무 힘들어 오늘은 여기서 길을 접어야겠다고 여장을 풀었다.

평일이다 보니 다른 손님도 없었다. 하늘호수 찻집. 민박집을 겸하고 있다.

 

전망이 좋은 곳에 나무로 얼기 설기 만든 의자에 앉아

준비해 준 족욕통에 시원한 물을 담아 주며 발을 담그라 한다.

안주는 신김치밖에 없는 막걸리가 이처럼 달고 시원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 산골에 어찌 민박집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바로 이 민박집 앞에

임도가 나 있어 차가 올 수 있다.

나무와 흙으로 얼기설기 직접 주인이 만든 집 

 

마을에 어스름 땅거미가 산을 천천히 덮어가고 있고 마을엔 작은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다. 오늘 밤엔 어제 못 본  별이나 실컷 보고 자야겠다.

 

간밤에 바람이 몹시 불었다.

창문에 비치는 담쟁이 그림자가 이리 저리 휘날려

마치 괴기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날 정도로..

워낙 피곤하니 식사하자 마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가다가 먹으라며 싸주는 찐 밤을 배낭에 넣고 상큼하게 출발.

 

중촌마을 길 가에 석류와 모과가 익고 늙은 오이가 달랑 달랑 걸렸다.

계곡 건너편에 다랭이 논같은 차밭이 있다.

길 가에는 빈집도 있는 것 같아 이런 곳에 별장 하나 얻어

가끔 쉬다 가면 좋겠다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콘도를 사는 것보다 조금 편하지 않을까?

차밭이 앞에 펼쳐져 있고 멀리 화개장터가 보이는 클라우스펜션은

가족들이 오면 모두 감탄할 정도로 깨끗하게 잘 지어 놓았다.

 

어제 급한 경사길을 내려왔는데 이 곳부터는 다시 임도 세멘트 길이다.

간 밤에 바람이 많이 불어 옷을 따뜻하게 입고 나왔기에

조금 가다 보니 따스한 아침 햇살에 벌써 땀이 흐른다.

 

산 기슭에 조금 평평한 곳이 있으면 여지없이 차밭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찻잎을 따는 계절이 아닌 듯 어디에도 보성차밭에서 보던

일렬로 늘어서서 차를 따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깨끗하게 다듬어 놓은 차밭만큼이나 보기 좋은 장면이 구석 구석 숨어 있는 예쁜 집들.

주로 별장으로 쓰이는 듯, 유럽풍으로 잘 지어진 집들이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어느 집은 경상남도에서 아름다운 건축물에 주는 상을 받을 정도로 멋진 디자인의 집도 있고..

 

중촌 마을에서 걷다 보면 멀리 큰 다리가 있는 화개 장터가 보인다.

오래 전 이 곳에 왔을 때는 양 쪽 강둑을 잇는 밧줄을 잡고

배가 천천히 넘어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몇 년 전 다리를 놓았다 한다.

이전에는 5일장이었기에 내가 찾아 갔던 날은 장이 없어 썰렁했는데

이젠 매일 장이 선단다.

그리고 구례에서 하동가는 시외버스가 잠시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화개장터가 유명해 진 것은 아마 가수 조용남씨의 노래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탄마을에 도착하면 화개장터를 볼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있다.

 

중촌마을을 지나는 길에 차밭의 행렬들이 지속적으로 보여 기분좋게 걸을 수 있다.

도심마을로 가는 좋은 길이 있건만 둘레길은 나그네를 숲길로 가라 한다.

수없이 많은 밤송이들이 숲길에 떨어져 있다.

햇빛이 별로 안 비치는 곳인지 숲의 나무와 바위마다 이끼가 가득하고

떨어진 밤송이도 모두 젖어 있는 듯 하다.

길 옆 숲속에서는 밤을 따는 부부가 내 인사를 대충 받으며 밤 줍기에 열중하고 있다.

 

숲속길을 걷다 보니 다시 아스팔트길이 나왔다.

그런데 보통 생각으로는 이 곳에서 우회전을 하여 화개장터로 가야 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길은 왼편 언덕의 대비암 가는 길로 올라가라 한다.

그래..이 것도 좋다. 무엇인가 뜻이 있는 길이겠지.

 

길을 올라가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누런 개와 같이 걷기에 인사했더니 시원하게 받아 주신다.

그리고는 손에 있던 포장끈으로 개줄을 만들고 천천히 걸어가시기에

나는 평소 걸음으로 올라가다 보니 내가 그 분보다 조금 앞서 갔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께서 사람과 걸을 때 그렇게 빨리 걸어가면 어떡하느냐며

자기가 진짜 빠르게 걷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걸어가시는데 힘차게 언덕길로 올라가신다.

올해 춘추가 어떻게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더니 76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얼굴도 비록 면도를 안해서 그렇지만 혈색이 좋고 건강하신 편이다.

어제 밤 친구들과 약주를 과하게 먹어 오늘 조금 힘들다 하시면서도

그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것은 거침이 없다.

 

대비 노인정으로 향하는 길가에 석류나무의 석류가 막 터져 빨간 씨방이 밖으로 쏟아질 것 만 같다.

화장실을 가야 할 것 같아 길가에 차를 만드는 곳을 기웃거렸으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열지 않았고 노인정도 문을 닫았다. 참을 수 밖에..

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흙집 뒤에 파라볼라 위성안테나가 설치해 있는 모습이

참 아이러니 했다.

 

오늘 처음 녹차 꽃을 보았다.

마치 메추리알같이 작은 크기의 흰 꽃잎에 노른자같이 작은 꽃 수술..

보성차밭을 몇 번 갔어도 차꽃은 보지 못했는데 이 곳은 워낙 야생 차밭이 많이

이렇게 그냥 두기도 하나 보다.

 

길을 가다가 또 한 명의 남자가 낫을 들고 동행한다.

아침 일찍 산에 올라 산초열매를 따고 내려왔다 하는 할아버지 말이

이 사람이 이 산의 주인이라 한다. 도시에서도 제법 잘 버는데 이 곳에서도

부지런하게 일하며 산을 관리한다고 대견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할아버지에게 화개장터에서 점심을 맛있게 하는 집을 물으니

요즘은 화개장 식당들도 거의 모두 수입재료로 음식을 만들기에 추천할 곳이 없지만

그래도 먹고 싶다면 그 곳에 잘하는 보신탕집이 있으니 찾아 가라 한다.

그것도 중국수입개 아니냐고 물어보니 그나마 나은 집이란다.

 

가파른 언덕 끝에 작은 절인 대비암도 아직 잠들어 있고

숲 속 언덕길로 올라가시는 할아버지와 이별하고 나는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능선길로 걷는다.

이 숲길은 사람들이 별로 안다니는지 길에 발길의 흔적이 별로 없지만

밤송이들은 이제 막 털고 지나간 듯 무수히 많이 떨어져 있다.

 

숲길을 내려 오는데 아침에 가탄에서 출발한 듯한 둘레꾼들이 마주 오고 있다.

길이 어떻느냐고 묻기에 중촌에서 올라가는데 언덕이 너무 가파라서 힘이 좀 들거라고 겁 좀 주었다.

숲길 지나 마을을 지나면서 정자가 있으면 시간이 충분할 것 같아 잠시 쉬며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으나 정자가 있어도 지저분해서 그냥 지나쳤으나

어느 곳은 정자의 둘레에 창문이 달려 있어  비교적 깨끗하기에

간밤에 열어놓은 문 하나로 바람결에 들어온 낙엽만 대충 쓸고는 자리에 누웠더니

아침 잠이 솔솔 밀려 온다. 이대로 잠들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백혜마을길에는 잘 지어진 집과 오래된 집이 공존한다.

국산 소형차와 고급 수입차가 공존한다. 

이제 또 새로 집을 지으려는 듯 비탈의 흙을 깍고 나무를 뿌리째 뽑고 있는

불도저가 크게 소리를 내며 작업을 하고 있다.

 

가파른 언덕을 굽을 허리에 지팡이를 짚어가며 올라가시는 할머니에게 인사드리고

길에 떨어진 대봉감을 주워 먹어도 되느냐며 허락받고는 땅에 떨어져 조금 터진

감을 껍질을 대충 벗겨 입안에 넣으니 참 달콤하다.

 

길을 걸으면서 보지못했던 각종 야생 열매를 보았다.

꽈리, 꾸지뽕, 대추, 산에서 보았던 오미자같은 것 등등

 

이제 가탄마을에 도착했다. 가탄 마을에는 민박집이 여러 곳이 보인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화개장터로 가고 싶었는데

나의 오늘 목적지인 기촌마을로 가기위해서는 화개장터를 포기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