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19) 눈 오는 저녁

carmina 2013. 12. 10. 09:31

 

눈 오는 저녁

(김소월 시, 작곡 백순진)

 

바람 자는 이 저녁
흰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今年)은……

꿈이라도 꾸면은!
잠들면 만날런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눈 타고 오시네.
저녁때. 흰눈은 퍼부어라.

눈이 온다.

눈이 펄펄 내린다.

조산평 넓은 들에, 선원사 가는 숲길에..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어 버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 오는 숲길을 젊은 시절에는 즐길 여유가 없었나보다.

아니 그럴만한 감성이 아직 자라지 않았었나 보다.

젊은 시절에는 눈이 오면 바닷가로 나가고 싶었다.

바다 앞에 서면 쏟아지는 눈이 수면에 닿을 때 마치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바닷물이 눈을 삼켜 버려 수면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 모습이 신기해 폭설오는 날이면 바다로 나가고 싶었다.

 

당시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매년 직접 그려서 보냈는데

그림의 배경은 눈이 지붕에 쌓인 시골집에 작은 불빛하나 새어 나오고

그 앞으로 걸어가는 두 연인의 뒷모습 그림을 그렸었다.

그 시절이 그립다.

 

1974년 겨울, 당시 대학 1학년 겨울

전화번호 앞자리의 국이 한 자리수인 우리 집의 다이얼을 돌리는 검은 전화에 벨이 울렸다.

어린 시절 나의 영혼을 구해 준 이웃집 형님이 신학교를 나와 전도사님이 된 후

전도사 시절에 의무적으로 시무해야 하는 강화의 시골 교회에 와서

나보고 중등부 애들에게 저녁에 노래 좀 가르쳐 주라고

기타들고 오라고 전화하셨다.

 

오후에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한 밤중에 불음면에 내렸다.

그 해 여름에 그 교회에 가서 여름성경학교 봉사를 하였기에 가는 길은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벌판에 나를 내려 주고 버스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교회까지 약 30분을 대충 방향만 잡고 혼자 걸어가야 했다.

 

눈 덮힌 숲 속을 지나는데 숲 사이 몇 십미터 앞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갑자기 머리끝이 쭈뼛하고 서고 나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귀신이 아닐까?

아니면 산 속에서 맹수보다 사람만나는 것이 더 무섭다는데..

가만히 보니 그 사람도 나처럼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내가 조금 걸어 가니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도 걸어오는 듯 보였다.

등에 식은 땀이 솟는다.

그렇다고 왔던 길로 도망가봐야 여긴 내가 전혀 모르는 동네라 길도 모른다.

에라 모르겠다. 모르는 척 해야겠다.

기타를 어깨에 매고 일부러 들으라고 찬송가를 힘차게 부르며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가니...

그건 소나무였다.

 

그 때부터 등이 더 오싹하고 멀리 교회의 불빛이 보이기에

눈에 발이 빠지는 것도 잊고 냅다 뛰어 도망갔다.

 

그 날 저녁 눈이 펑펑 내렸다.

한 밤중에 작은 교회에 랜턴을 들고 온 까까머리 중학교 애들이

난로가 훈훈한 교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는 초등학교 애들을 가르쳤기에

이 애들은 모르는 애들이다.

 

당시 복음송가나 CCM 음악이 없던 시기이기에

그 애 들에게 포크송들을 가르쳤다.

마침 그날 밤에 눈이 와서 내가 애들에게 가르쳐 준 노래가 바로 이 '눈오는 저녁'이다.

도시에서 온 나를 조금 경계하는 듯 하다가

그래도 떠듬 떠듬 따라하며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한 시절이 있었다.

 

그 애들은 지금 50대 초반 정도 될 것 같다.

혹시 강화에 살고 있다면 나를 기억이나 할까?

그 곳에 몇 번 가지 않았기에 그 애들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다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노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겨울에 나들길을 걸으면 늘 이 노래를 부른다.

언젠가 15코스를 걸을 때 남장대에서 내게 노래를 시키기에

그날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에

사연을 설명하고 이 노래를 불렀다.

 

눈오는 저녁 풍경은 누가 봐도 좋을 것 같다.

첫사랑이 생각나고, 고향이 생각나고

어머니가 생각나고, 친구들이 생각날 것 같다.

잊었던 그 사람을 생각하는 고요한 눈 오는 저녁

눈은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올해도 눈을 맞으며 나들길을 걷고 싶다.

눈이 펑펑 오는 날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보이는 장면이 질퍽한 도심의 아스팔트가 아닌

흰 눈 덮힌 들판을 보고 싶다.

올해도 눈 오는 날 나들길벗의 어느 집 사랑방에서 하루를 묵고 싶다.

 

길을 걸으면 노래가 흐른다.

 

6코스 숲속길 

 

눈 덮힌 1코스 (2013.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