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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포구

carmina 2014. 5. 11. 16:17

소래포구

 

포구 라는 말이 무척이나 오래 되고 낯설은 단어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네 생활에서 포구 없이도 모든 해산물들을 구입할 있기 때문인가?  굳이 배가 닿는 시간을 택해서 바닷가로 나가지 않아도 언제든지 우리 주변에서 싱싱한 생선을 있고,   어시장이 있는 곳을 찾지 않아도 동네 구멍가게에서 하루 정도 지난 생선보다도 좋은 생선과 어물을 있는 곳이 어디든지 있으니, 구태여 (?)까지 가서 오고, 생선을 손질하고.. 그럴 필요까지 없겠지. 그럴 시간있으면 연속극 하나 보고, 거울 보면 이뻐 질텐데

코에 바람을 넣고 싶어 바다로 간다.  비린내. 내음. 이런 것들이 그리 좋은지..
아내랑 같이 가자고 권했으나, 성격을 많이 닮은 딸이 감기가 들었음에도 자기가 가겠다고 따라 나선다. 오랜만에 둘이 차를 타고 가면서 딸은 종알 종알.  아빠랑 같이 가는 것이 좋은지   안에서 홀짝 게임을 하자고 덤빈다. 그러면서 가던 길에 저곳이 보아오던 곳인지옛날에 여기는 어땠는데..’ 하면서 회상한다.   11 나이에도 옛날이란 것이 있구나. 속으로 혼자 대답한다.  ‘아빠도 옛날이 있단다.’

소래로 가는 길이 아빠 어렸을 적엔 이렇게 편하진 않았다. 부모님 고향을 가기 위해선 소래철교를 지나는 수인선을 타야 했다. 당초엔 하인천에서 출발하여 수원까지 가는 협궤열차 였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송도가 종착역이었다. 협궤열차는 과거 군자염전에 있는 소금을 실어 나르기 위한 폭이 좁은 열차 때문에 만들어졌다.

우리는 차를 동차라 불렀다. 보통 4개의 차량을 달고 다니는 동차는 지금의 전철처럼 서로가 마주보는 의자와 손잡이가 있었는데 차가 흔들릴 마다 손잡이가 흔들리면서 부딪힐 정도로 실내도 좁았다. 기차가 그렇게 좁다 보니 어느 건널목에서 버스에게 옆구리를 들이 받혀 기차가 옆으로 쓰러진 적도 있다.

명절 때는 제사를 위해 사촌형님이 계시는 군자를 가기 위해 어김없이 수인선 열차를 타야 했기에 피난열차같이 복잡한 수인선을 타야만 하는 고통도 있었다.   제대 복학하기 전까지 원곡역 지금의 반월에 있는 교회에 주말마다 내려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일날 성가대 지휘하느라 동안 주일 마다 다니기도 했다. 이제는 그나마 전철에 밀려 없어 지고 말았지만

평시에 수인선을 타면 기차 안에서 바탕  시장이 이루어졌다.  물건을 팔러 나왔던 사람들이 남은 물건들을 처분하느라 물물교환도 이루어 졌고, 소래다리를 사이에 두고 물건의 모습은 형식을 달리 했다. 소래역에서 사람들은 어부들이기에 생선을 팔았고, 군자역 혹은 원곡역에서 사람들은 농삿군이므로 곡식과 등의 가축을 팔았다.

모두의 보따리에 담겨있는 물건들은 들의 재산이었고, 시골인심들이었다.  기분파 아줌마들은 팔다 남은 물건을 검표하러 다니는 역무원에게 공짜로 인심쓰기도 했으며 동차운전사들은 때론 기차가 출발하다가도 머리에 물건을 가득 이고 있는 아줌마가 달려 오면 출발한 열차를 멈추어 늦게 손님을 태우는 믿기 어려운 일도 벌어지곤 하는 곳이 수인선열차의 인심이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을을 오가는 학생들이나 주민들에게 다리는 조금 위험한 도로에 불과했다. 자칫 발을 디디면 아래의 바다로 떨어지는 위험한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그렇게 기찻길의 침목만을 밟으며 편히 왔다 갔다 했고 그런 것은 당연스럽게 여겼다.

어느 해인가 음력 정월 초하룻날 시골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시 인천으로 오다가 소래다리 위를 지날 때쯤 정박해 있는 배들을 보니, 해의 풍어를 비는 어부들이 배에 온갖 깃발로 장식해 놓은 모습이 아름다워 소래다리를 지나자 마자 다음 역에 내려 다리까지 걸어가서 사진을 찍기도 기억이 있다.

곳에 우리 형제들과 같이 때는 하는 이야기가 있다. 6.25 전쟁시절 인천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피난을 가는데 당시 6살이던 우리 형님이 어른들이 배에서 뭍으로 뛰어 내리는 모습을 보고 형님도 당연히 그렇게 뛰어내리려 하다가 그만 바닷물 속에 퐁당 빠져버려 그걸 건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사촌형님이 말씀하시곤 한다.

지금도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면 모임이 있기 사나흘 전에 곳에서 싱싱한 게를 사다가 간장 게장을 담가 놓으면 형제들의 식사 시에 최고의 반찬이 된다. 우리 형제들은 양념간장한 게를 거의 먹지 않는다. 오로지 게는 간장게장으로 먹어야 맛이 난다고

요즘은 소래포구로 가는 길이 크게 가지 방법이 있다. 우선 종래의 방법인 간석동을 거쳐 오는 방법인데 길은 길도 좁고 주말에 워낙 차가 많아 교통이 불편하다. 그러나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긴 뒤로 소래다리 편으로 돌아 오는 방법이 생겼다.   길은 길도 넓고 주차장도 넓은 뿐만 아니라 곳으로 오는 사람들은 비록 이제는 철교 밑을 가로 막고 옆에 안전대를 만들어 놓아 침목을 밟고 건너는 아슬아슬함은 없지만 다리 위를 걸어 오는 낭만을 가질 있다.

딸아이는 소래포구에 민물고기인 붕어빵(?) 먹으러 간다. 지난 갔을 소래포구 입구에서 파는 붕어빵이 맛있었나 보다.  나는 짠물고기를 먹으러 간다. 보통 시중의 집에서 사먹을 있는 광어, 도다리나 혹은 숭어같은 것들이 아닌 아주 싸디 생선들을 먹으러 간다. 밴뎅이, 전어, 병어, 꼴뚜기 등등.. 이런 것들이 오히려 바다냄새가 나고 억지로 양식장에서 기를 없는 것들이기에..

조금 이른 시간인지 바로 다리 앞에 주차 공간이 하나 있다. 차에서 내리니 갯벌 냄새 그리고 멀리 끼룩거리는 갈매기들이 한참 합창을 하고 있다. 비록 멀리 볼품 없는 아파트가 보이긴 하지만 아직도 곳은 옛날 그대로이다. 바닷가의 갯벌에  갈매기들이 없이 많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모두 하늘로 날아 오르며 커다란 장관을 이룬다.

다리가 끝나는 입구에서부터 각종 계층의 손님들을 유혹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어린이를 위한 뻥튀기, 호빵, 호떡, 가래떡 구이, 붕어빵, 고동, 번데기, 노인들을 위한 막걸리, 옥수수빵, 조개구이, 새우튀김, 등등.  막걸리는 사발씩 팔기도 하고 안주는 공짜란다. 안주는 대개 돼지껍데기 구이를 내어 놓는다. 길을 가다가 사발 먹고 입을 닦으며 시장을 구경하는 맛이 우리네 어른들의 맛일 것이다.

철길 옆으로 허름한 집들의 지붕 위에 생선이 질서 정연하게 정렬해 일광욕을 하고 있다.  어릴 동네에서 저렇게 일광욕을 위해 내어 놓은 아이들과 생선을 훔쳐 연탄 불에 구워 먹던 기억이 아스라이 멀어진다.

음식점 앞에 놓여 있는 해물들이 펄펄 살아 있다. 개불, 석화, 피조개, 해삼, 멍게, 낙지, 문어 건드려 보고 싶은 것들이 손님들을 유혹한다. 노릿하게 구워지는 생선에 침이 꼴깍 삼켜지고 무더기로 쌓여 있는 마른 생선들의 가격을 물어 보고 싶어준다. 물론 생선 무더기를 사게 되면 줌을 더해서 주는 인심도 있다.

개불을 보며 사진을 찍었더니 딸이 엄마의 탯줄 같다고 한다. 맞다. 그렇구나. 저런 것들이 곱창으로 보였고, 남자의 생식기로 보였을까?  

장터에 유명한 것은 역시 손님들에게 음악을 들려 주는 장애인들이다. 모두가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바닥을 생선처럼 헤엄치며 손님들에게 음악을 들려 주며 자비를 구한다.

바닷가에 자리잡은 장터. 입구에서부터 각종 천연자원, 각종 조개를 가득 놓고 파는 장삿군들의 외침이 가득하다.  동죽, 바지락, 피조개, 홍합, , 삐쭉 수없이 많은 조개들의 이름을 어떻게 열거하랴.

길은 갈래, 마른 생선을 파는 곳과 싱싱한 횟감을 파는 . 곳을 돌아 다녀야 직성이 풀린다.  잡아 끌지는 않아도 싸게 준다고 가지고 가라는 아줌마들의 말이 정겹기만 하다. 널어 놓은 생선의 종류는 거의 같지만 그날 매상은 아마 생선의 맛이나 가치보다 중요한 상인의 친절에 좌우하리라.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상인들 얼굴은 찍으면 된다 한다.  모두가 우리 어머니 같은 분들의 모습이 옆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신다.  생선을 정리하고 있다가 손님이 지나가면 조금 테니 사가지고 가라는 유혹에 넘어가고 싶다. 바다에서 나오신 듯한 할머니가 시커먼 굴을 앞에 놓고 쇠스랑으로 하나 하나 굴을 까고 계신다. 껍데기를 살짝 들치니 아래 맑은 하나, 쇠스랑 뒤에 있는 꼬챙이로 찍어 사발 안에 넣는다. 사발을 가득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손짓을 거쳐야 하는가?  

시장통 끝에 쯤엔 젖갈류를 파는 가게들이 있다. 금방 잡은 듯한 새우들이 깨끗하게 산을 이루고 있고, 빨갛게 유혹하는 오징어, 창란, 명란, 아가미, 밴뎅이 각종 젖갈들을  얼른 손으로 집어 먹고 싶을 정도로 군침이 돈다. ! 김이 무럭 무럭 나는 그릇만 있었으면

횟감을 파는 곳에는 좌우로 열을 지어 늘어 앉은 아줌마들이 열심히 횟감을 자르느라 바쁘다. 보통 시중에서 만원 하는 생선들이 곳에서는 거의 만원 짝에 있다. 회를 이곳에서 사고 바로 뒤에 회를 먹을 있는 곳이 따로 준비되어 있어 얼마든지 푸짐한 회에 소주 걸치고 있는 곳이다.  

그다지 크지 않은 살아있는 가오리를 파는 가게에 쪼그리고 앉아서 하얀 밑바닥에 가오리 눈과 입을 보니 얼마나 이쁜지, 입에 빨간 루즈를 발라 주고 싶었다. 가지고 있는 종이로 입을 건드리니 다물고는 정조를 지키려 한다. 가오리 회를 먹고 가란다. 가오리 회라.. 이거 흔하지 않은 것인데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조금 참기로 했다.

시장 끝에 배가 닿으면 무더기로 쏟아지는 펄펄 뛰는 게와 새우를 살려고 사람들이 아우성인데 오늘은 이미 배가 들어 왔다 나갔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각종 서민들이 즐겨 먹는 횟감을 무더기에 오천원. 전어, 병어, 밴뎅이, 아나고, , 꼴뚜기, 멍게를 모두 조금씩 담아 달라 했더니 아주 익숙한 솜씨로 생선들을 잘라 접시에 초고추장 하나와 함께 준다. 딸과 함께 따로 먹는 장소로 가지 않고 일부러 바닷가로 나왔다. 둑에 걸터 앉아 배들을 바라 보며, 무리 지어 날아 오르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혼자 맛있게 먹고 있으니 딸이 아빠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자기가 젓가락으로 집어 주겠다며 고추장을 살짝 찍어 아빠 입에 넣어준다.  너도 다음에 크면 아빠처럼 회를 좋아하리라..

무더기의 회를 순식간에 먹고 있으니 딸이 놀란다. “우와 우리 아빠 먹는다…”
, 이제부터 생선을 사러 가자. 다시 장터로 들어가 생선을 흥정한다. 딸이 좋아하는 갈치, 아들이 좋아하는 참조기, 내가 좋아하는 꽁치, 고등어, 아내가 좋아하는 동죽 등을 무더기씩 때마다 덤으로 마리 달라 하여 들고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세다.

손에 생선 봉투를 가득히 들고 소래다리를 넘어 오는데 바람이 세어 쓰고 있는 납작모자가 날라 같아 손으로 쥐고 달려간다. 곳이 좋아.   곳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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