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28) 모든 것 끝난 뒤

carmina 2014. 5. 24. 11:08

 

 

모든 것 끝난 뒤 (작사,곡, 노래 이수만)

 

하늘엔 한 점의 구름이 떠가고
철둑길 건너 하늘 넘는 들길엔
먼 기적 소리만 홀로 외로워도
나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모든 끝난

 

저 건너 산길에 바람이 불어와

마른가지위 떨어진 새 한 마리

흔들며 지나치는 밤이 외로워도

나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모든 끝난

 

70년대 중반 데모와 계엄령과 휴교가 날마다 이어져

학교도 가지 못하고 거리를 나가고 싶어도

장발 단속하는 경찰들의 검문 때문에 불편해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내던 젊은 시절에

기타치며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이 노래를 녹음해서 들으면 내 목소리가

이수만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건 나 만의 생각인가?)

 

그만큼 나의 미래에 대해서 자신이 없던 시절.

교회의 아는 누님이 이 노래를 부르는 나를 보고

서울의 유명한 노래 하는 곳에 같이 가자고 권유해 찾아간 어느 곳.

지금은 이름이 가물가물하여 기억나지 않는 노래하는 음악카페였다.

그러나 당시는 카페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서소문 입구의 어느 커다란 지하홀인 것 같고

술을 파는 곳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명한 요들송 싱어인 김홍철씨가 앞에서 키보드로 다 같이 부르는 노래를 리드하고

손님 중에 원하는 사람 있으면 앞에 나와서 노래를 했다.

그 때 내가 앞에 나가 이 노래를 불렀더니 사회자가 내게

가슴이 탁 트이게 부른다고 멘트를 해 준 것 같다. 

 

77년 김일성 생일날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는데

훈련받기 전에 신체검사 재검을 받는 자리에서

내 신체에 결격사유가 있어 군대생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무장교의 말에 나는 그냥 불편해도 군대생활 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당시의 이 결정에 늘 자부심을 느낀다.

 

몸만 불편했지 마음은 편했던 군생활 후

여름에 전역하니 다음 해 3월 복학때까지 시간이 남아 뒹굴거리며 지내던 중

교회에서 여름에 남이섬에 수련회를 가는데

미리 누군가 가서 텐트칠 자리를 잡아 놓아야 한다기에

시간많은 내가 먼저 간다 했다.

 

가평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남이섬 강변에 자리를 잡고 우선

1인이 누울 수 있는 군용 A텐트로 하룻밤을 지냈다.

군대 생활의 습관이 남아 있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

텐트 앞에서 기타를 치며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옆에 산책하던 남녀 젊은이들 몇 명이 내 옆에 와

같이 노래할 수 있느냐며 바닥에 앉았다.

 

가지고 간 악보를 들쳐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이 젊은이들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몇 곡을 부르고 그 들은 가고 한 낮쯤 되어서

남이섬에 방송으로 알리는 소리가..

 

오후에 강변에서 하는 FM 공개방송에 노래경연이 있으니

혹시 남이섬에 온 대학생들 중에 방송에 참여할 사람있으면

미리 와서 심사를 받으란다.

 

간략하게 심사를 받고 오후에 지금의 남이섬 선착장 옆

강물 위에 만들어 놓은 가설 무대에서 하는 방송에 참여했는데

출연가수들 중에 가수 이용이 나와 부를 때

뒤에 백코러스를 하는 사람들을 보니 아침에 나와 같이

노래를 불렀던 젊은이들이었다. 어쩐지 잘하더라.

그 중 아침에 나와 같이 노래할 때 유독 노래를 잘했던 

얼굴이 예뻣던 아가씨가 기억에 남는다.

 

그 때 내가 불렀던 노래, 이수만의 '모든 것 끝난 뒤'

10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노래를 불렀고

마지막 시상을 하는데 내가 제일 잘 한 것 같은데 이름은 빠져 있다.

알고 보니 나는 아직 복학하지 않았기에 대학생이 아니라

시상에는 제외시켰지만 제일 잘 했기에 상금은 제일 많이 준다며

다른 참가 학생들이 부러울 정도로 두둑한 봉투를 받았다.

 

방송 말미에 가수 이태원이 자신의 노래 '솔개'를

경연대회 참석자들과 다 같이 부르면서

내게는 화음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어렵지 않은 기본화음이기에 가수와 같이 노래하는

즐거운 일도 생겼다.

 

두둑한 상금을 그날 오후 늦게 도착한 교회 청년부에  비용으로

쓰라고 봉투 째 건네 주니 모두 얼굴이 환해졌다.

 

젊은 시절 직장 다니다가 어머니의 중풍으로 인해

정말 어릴 때 부터 내가 사용하던 동그란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집에서 나와

여기 저기 형님집이나 하숙집을 떠돌며 혼자 살다가

결혼때도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

내가 모은 자금 범위내에서 간소하게 결혼 한 후 

이제는 그래도 남들 부럽지 않는 미디엄 레어 정도의 중산층에 속해 있으면서

어느 날 내 주위를 돌아 보니 가족과 참 많은 내 소유물이 생기고

그간의 사회생활로 만들어진 친구들, 사람과의 관계들이 풍성하고

남은 생을 충분히 감성적으로 지낼 만한 취미생활도 있어

이런 것들이 이젠 다시 이 노래를 부를 때 이외에는

'모든 것 끝난 뒤'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동호회 사람들과 강화 나들길을 걷다가

이 노래를 불렀더니 내가 열창을 하더란다.

 

그래..아직 내겐 열창할 수 있는 열정이 있다.

 

이제는 노래말 같은 그런 슬픔을 잊고 사는 50대 후반이다.

내겐 늘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껏 나이 드는 것을 걱정해 본 적도 없고

담담히 내 나이에 맞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 버킷 리스트의 바라던 일들을

하나 하나 이루어가고 싶다.

 

길을 걸으면 노래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