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 끝난 뒤 (작사,곡, 노래 이수만)
하늘엔 한 점의 구름이 떠가고
철둑길 건너 하늘 넘는 들길엔
먼 기적 소리만 홀로 외로워도
나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모든 것 끝난 뒤
저 건너 산길에 바람이 불어와
마른가지위 떨어진 새 한 마리
흔들며 지나치는 밤이 외로워도
나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누구를 기다리나 무엇을 바라는가
모든 것 끝난 뒤
70년대 중반 데모와 계엄령과 휴교가 날마다 이어져
학교도 가지 못하고 거리를 나가고 싶어도
장발 단속하는 경찰들의 검문 때문에 불편해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내던 젊은 시절에
기타치며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이 노래를 녹음해서 들으면 내 목소리가
이수만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리는건 나 만의 생각인가?)
그만큼 나의 미래에 대해서 자신이 없던 시절.
교회의 아는 누님이 이 노래를 부르는 나를 보고
서울의 유명한 노래 하는 곳에 같이 가자고 권유해 찾아간 어느 곳.
지금은 이름이 가물가물하여 기억나지 않는 노래하는 음악카페였다.
그러나 당시는 카페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 같다.
아마 서소문 입구의 어느 커다란 지하홀인 것 같고
술을 파는 곳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명한 요들송 싱어인 김홍철씨가 앞에서 키보드로 다 같이 부르는 노래를 리드하고
손님 중에 원하는 사람 있으면 앞에 나와서 노래를 했다.
그 때 내가 앞에 나가 이 노래를 불렀더니 사회자가 내게
가슴이 탁 트이게 부른다고 멘트를 해 준 것 같다.
77년 김일성 생일날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는데
훈련받기 전에 신체검사 재검을 받는 자리에서
내 신체에 결격사유가 있어 군대생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무장교의 말에 나는 그냥 불편해도 군대생활 하겠다고 했다.
지금은 당시의 이 결정에 늘 자부심을 느낀다.
몸만 불편했지 마음은 편했던 군생활 후
여름에 전역하니 다음 해 3월 복학때까지 시간이 남아 뒹굴거리며 지내던 중
교회에서 여름에 남이섬에 수련회를 가는데
미리 누군가 가서 텐트칠 자리를 잡아 놓아야 한다기에
시간많은 내가 먼저 간다 했다.
가평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남이섬 강변에 자리를 잡고 우선
1인이 누울 수 있는 군용 A텐트로 하룻밤을 지냈다.
군대 생활의 습관이 남아 있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
텐트 앞에서 기타를 치며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옆에 산책하던 남녀 젊은이들 몇 명이 내 옆에 와
같이 노래할 수 있느냐며 바닥에 앉았다.
가지고 간 악보를 들쳐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이 젊은이들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몇 곡을 부르고 그 들은 가고 한 낮쯤 되어서
남이섬에 방송으로 알리는 소리가..
오후에 강변에서 하는 FM 공개방송에 노래경연이 있으니
혹시 남이섬에 온 대학생들 중에 방송에 참여할 사람있으면
미리 와서 심사를 받으란다.
간략하게 심사를 받고 오후에 지금의 남이섬 선착장 옆
강물 위에 만들어 놓은 가설 무대에서 하는 방송에 참여했는데
출연가수들 중에 가수 이용이 나와 부를 때
뒤에 백코러스를 하는 사람들을 보니 아침에 나와 같이
노래를 불렀던 젊은이들이었다. 어쩐지 잘하더라.
그 중 아침에 나와 같이 노래할 때 유독 노래를 잘했던
얼굴이 예뻣던 아가씨가 기억에 남는다.
그 때 내가 불렀던 노래, 이수만의 '모든 것 끝난 뒤'
10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노래를 불렀고
마지막 시상을 하는데 내가 제일 잘 한 것 같은데 이름은 빠져 있다.
알고 보니 나는 아직 복학하지 않았기에 대학생이 아니라
시상에는 제외시켰지만 제일 잘 했기에 상금은 제일 많이 준다며
다른 참가 학생들이 부러울 정도로 두둑한 봉투를 받았다.
방송 말미에 가수 이태원이 자신의 노래 '솔개'를
경연대회 참석자들과 다 같이 부르면서
내게는 화음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어렵지 않은 기본화음이기에 가수와 같이 노래하는
즐거운 일도 생겼다.
두둑한 상금을 그날 오후 늦게 도착한 교회 청년부에 비용으로
쓰라고 봉투 째 건네 주니 모두 얼굴이 환해졌다.
젊은 시절 직장 다니다가 어머니의 중풍으로 인해
정말 어릴 때 부터 내가 사용하던 동그란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집에서 나와
여기 저기 형님집이나 하숙집을 떠돌며 혼자 살다가
결혼때도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
내가 모은 자금 범위내에서 간소하게 결혼 한 후
이제는 그래도 남들 부럽지 않는 미디엄 레어 정도의 중산층에 속해 있으면서
어느 날 내 주위를 돌아 보니 가족과 참 많은 내 소유물이 생기고
그간의 사회생활로 만들어진 친구들, 사람과의 관계들이 풍성하고
남은 생을 충분히 감성적으로 지낼 만한 취미생활도 있어
이런 것들이 이젠 다시 이 노래를 부를 때 이외에는
'모든 것 끝난 뒤'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동호회 사람들과 강화 나들길을 걷다가
이 노래를 불렀더니 내가 열창을 하더란다.
그래..아직 내겐 열창할 수 있는 열정이 있다.
이제는 노래말 같은 그런 슬픔을 잊고 사는 50대 후반이다.
내겐 늘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껏 나이 드는 것을 걱정해 본 적도 없고
담담히 내 나이에 맞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 버킷 리스트의 바라던 일들을
하나 하나 이루어가고 싶다.
길을 걸으면 노래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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