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내 자녀들에게 음악들 선물했다

carmina 2014. 8. 25. 21:16

 

 

지난 날을 생각해 보니...

 

 

 

 

음악이 좋아 음악을 전공하는 배우자를 만났다.

나는 비록 음악애호가지만 전문적인 음악을 지향하고

음악만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청년시절부터 알았기에..

 

직장 상관의 부인으로부터 약식 찬송가 오디션을 받고 동생을 소개받았다.

소개 받은 뒤 첫번 데이트를 당시 인기있던 대우합창단 공연을 보았다.

그 뒤로도 데이트 코스는 주로 음악적인 것이 많았다.

 

혼수감으로 장롱은 안 사와도 좋으니 좋은 오디오는 하나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결혼하고 불과 3달도 안되어 해외현장으로 나왔으니

첫 아이의 태교음악은 해외현장에서 편지를 써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이가 자랄 때 늘 집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피아노 학원을 경영하는 아내는 때론 아이들을 업고 가르치고

아이들의 놀이터는 피아노 소리가 난무하는 학원이 되기도 했다.

 

딸이 태어나고 아장 아장 걸을 때 부터

장인어른이 목회하시는 작은 교회에서

나는 찬양대를 지휘하고 아내는 피아노 반주를 했다.

교회에 있는 시간은 아이들에겐 싫던 좋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찬양대의 하루 연습이 끝나면 아이들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집에 오는 차 안의 뒷좌석에서 그 날 내가 가르친 곡들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결혼한지 2년후부터 부부들이 하는 합창단에 들어가

또래의 부부들과 같이 다니기를 30년,
엄마 아빠들이 열심히 노래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그때 따라 다닌 자녀들이 거의 모두 음악에 관심을 갖고

어떤 아이는 전공을 하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음악을 좋아한다.

 

업무로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다.

다녀 올 때마다 늘 현지에서 소리나는 작은 토속 악기나

혹은 소리나는 장난감을 주로 사왔다.

일부러라도 각종 소리를 들려 주었다.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었으나

중이 제 머리 못깍듯이

내 자녀를 본인이 경영하는 학원에서 직접 가르치는 것은 정말 힘들어

아내는 자녀들에게 피아노 가르치는 것을 포기했다.

 

작은 아이가 처형네 딸아이가 발레하는 것이 부러웠던지

초등학교때부터 발레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빠인 나는 언제나 딸이 음악가가 되기를 꿈꿨다.

딸은 학교에서 중창대회를 나가기도 하니 성악을 시키고 싶었다.

 

그러다가 딸아이는 그만 작은 교통사고로 발가락을 다쳐 발레리나의 꿈을 접으니

아내는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결혼 후 아내는 자기 전공인 피아노 외에 바이올린을 배우러 다녔다.

그래서 바이올린의 매력을 느끼고 딸 아이에게 작은 바이올린을 쥐어 주었다.

그 때부터 아이는 죽으나 사나 바이올린을 끼고 사는 인생이 되어 버렸다.

 

나는 아이들에게 음악에 대한 감성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

일부러 둘만이 자연으로 몇 번 데리고 나가 보았지만 아빠가 원하는 감성은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바이올린 때문에 수없이 다투는 엄마와 딸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열정이 없어 한 때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지만 자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은

웬만한 노력과 금전적인 투자가 없으면 되지 않았다.

 

딸아이에게 많은 투자가 발생했다.

우리 집이 있는 도시의 예고에 합격했으니

들어가는 돈은 나날이 더 들었다.

아내의 욕심에 돈을 투자해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시켰다.

 

그 모습을 본 아들.

부모가 동생으로 인해 정말 많은 노력과 재정이 드는 것을 보며

동생의 장래를 양보하는 것일까? 학교 공부를 등한시 하기 시작했다.

한 때 작은 목사님으로 불릴만큼 교회생활을 좋아하던 아이가

교회도 등한시하고 부모와 다른 작은 교회 다니면서 교회 친구들

몇 명과 어울리는 것 외에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아들이 고3이 되어 대학진학을 위해 담임선생님의 학부모 호출로

아내가 학교를 찾아 갔는데 아들이 대학을 포기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 때부터 아이의 진로를 위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서울대를 다니는 대학생을 가정교사로 택해 입시공부를 시켰지만 흥미가 없었다. 

이모네 아들이 지방대학가서 중국유학간 케이스가 있어 아들에게

중국어 학원을 다니게 하며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그 역시 흥미가 없었다.

 

아내가 친구에게서 들었는지 수능과 관련이 없는 작곡을 시켜 보겠다고 해서

아들의 손을 잡고 신촌의 어느 작곡전문입시공부를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데리고 갔다.

대입이 11월인데 3월 말부터 새로운 음악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

 

선생님은 아이에게 다짜고짜 테스트시켜 보았다.

오선지를 주고 네가 생각해서 짧은 곡하나만 써 보라고..

그런데...아들이 곡을 썼다.

엄마도 놀랐다. 생전 그런 모습 없었는데..

선생님은 가르쳐 보기로 했다.

 

아들은 동네 친구들과 같이 다니며, 평소 음악을 듣고 자란 덕에

친구들과의 놀이로 가끔 음악을 택했다 한다.

친구들에게 화음을 가르쳐 주고 노래해 보고...

아들은 뭐든지 부는 것을 좋아했다, 피리 플륫 등등..

 

당초 음대를 위해 공부하던 아이가 아니라

학교에서는 그 때부터  야자만 빼주기로 하고 정규수업 마치자 마자 신촌으로 달렸다.

작곡과를 시험보기 위해서는 피아노 한 곡과 작곡공부를 해야 한다.

베토벤의 발트슈타인 한곡을 연습해 놓고 그 곡을 시험보는 대학을 미리 찾아야 한다.

어릴 때 손을 놓은 피아노 연습을 위해 피아노 공부도 별도 선생을 붙였다.

 

아들은 그 때부터 작곡공부에 빠져 버렸다.

평소 수학을 좋아해서 수학을 기본으로 하는 작곡이 편했다 한다.

밤을 새워 공부하는 날이 부지기수.

새벽까지 늘 아들 방에는 불이 켜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걱정한 것은 오히려 부모였다.

저러다 쓰러지지나 않을까?

 

많은 돈을 들여 가르치는 딸에게는 수없이 공부하라고 소리를 높여야만 하는 반면

아들은 작곡을 시작한 이래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한 번도 공부하라는 얘기를 해 보지 않았다.

피아노도  오로지 한 곡만을 연주하기 위해 수없이 연습을 해야만 했다.

 

엄마는 밤이면 근처 유명설렁탕집으로 가서 곰탕을 사다 끓여 주었고

나는 틈만 나면 저녁에 족발을 주문해 아들의 영양을 보충시켜 주었다.

 

그렇게 벼락치기 공부한 8달.

서울에서 누구나 알아 주는 좋은 대학은 꿈도 못꾸었지만

그래도 누구나 아는 음대에 단번에 합격했다.

가르쳤던 레슨 선생님이 놀랄 정도였다. 

 

피아노 시험을 보는데 다른 수험생들은 보편적으로 시험 중에 심사관이

중간에 그만 치라고 지시를 하니까 요령을 피워 전곡을 다 연습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수험생이 다 연습하지 않았는데 심사관이 가만 있으면

치다가 말아야 하는 바람에 수험생들은 낭패를 보아야 했다.

아들은 그런 요령을 알았는데도 전곡을 다 연습했다.

 

아들은 길을 걸어도 횡단보도가 아니면 건너지 않으며 멀리 돌아가도 반드시

교통 신호를 지키는 삶의 원칙주의자다.

 

합격했다는 발표를 확인하고 아들은 그만 코에서 피가 갑자기 터졌다.

소식을 일터에서 들은 내 눈에선 눈물이 펑펑 흘렀다.

얼마나 긴장했었을까?

 

남들보다 짧은 세월을 공부하고 들어간 대학생활

1학년때는 다른 아이들보다 뒤졌지만 2학년 때 부터는 내리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딸은 비록 지방 예고를 나왔지만 열심히 한 덕분에 서울의 그럴 듯한 음대에 합격해

나름대로 대학생활을 즐기며 학교에서도 상위 성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부모된 마음으로 아이들이 유학가기를 바랬다.

특히 공부에 전념하는 아들을 먼저 유학보내고자 했으나 본인이 사양했다.

 

딸이 중학생되던 때 예고를 한국에서 보내지 않고

외국에서 공부시킬려고 딸이 연주하는 곡을 테이프로 담아

미국 일리노이주 대학에 있는 교수님께 보냈더니 딸을 보내보라 했다.

마침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위해 유학하고 있는

처남에게 부탁해서 만약 딸이 미국가면 그 집에서 지내기로 했었다.

 

이 때 부터 갑자기 나는 딸 얼굴만 보면 눈물이 나왔다.

이제 유학 보내면 인생살면서 거의 보기 힘들 것 같아서...

 

그런데 그 이 후 딸과 엄마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더 열심히 하길 요구하는 엄마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딸.

매일 매일 다투었다. 그 다툼은 때로는 나까지 합세해 더 커졌다.

 

그러다 결국, 딸은 혼자 나가서는 음악 공부를 알아서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 예고로 방향을 바꾸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주위의 사람들이 고음악 전공을 권하기에

3학년 초에 휴학을 하고 벨기에에서 고음악을 배웠다.

나 또한 고음악을 좋아하기에 딸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형편이 안 맞아 고음악을 포기하고  한 학기를 그냥 보내야만 했다.

비록 한 학기 휴학했지만 딸에게 외국에서의 경험은 놀랄만한 변화를 주었다.

인생의 어떤 목적이 생겼는지 복학한 뒤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때론 장학금도 받을 정도로 우등생의 반열에도 올랐다.

 

거의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아들과는 달리

딸은 아빠의 객기를 닮아서인지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혼자 유럽으로 배낭여행도 다니고 친구도 많아 여기 저기 다니기를 좋아했다.

 

대학 다닐 때 콩쿨 한 번 입상하지 못한 딸의 졸업 후 진로를 물어 보니

별다른 계획이 없다가 대학을 졸업하니 느닷없이 유학을 가기 원했다.

대학 졸업때 까지는 다행히 직장에서 학비 전액이 지급되었기에

자녀 둘이 동시에 대학에 다녔어도 금전적으로 문제는 없었으나

당시 얼마 안있으면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는 처지였다.

 

국내 굴지 기업에서 정년을 지나서도 계약직으로 몇 년 더 근무했지만

2013년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의 큰 손실로 나같이 덤으로 직장다니는 사람은 

계약을 연장시켜주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로 유학을 보내면 그다지 비용이 많이 들어갈 것 같지 않기에

딸이 만들어 온 유학계획서를 승인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나는 직장을 그만 두고 불과 한달 만에 다른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럭 저럭 대학을 졸업하였으나 유학을 포기한 아들은

음악교사가 되겠다고 임용고시를 위해 교육대학원에 입학했다.

2년 반 동안 정말 열심히 노력했지만 임용고시는 합격하지 못했다.

대개 첫 해 합격하는 예가 드물다 하니 위로를 삼았다.

그래서 여기 저기 사립고등학교에 원서를 넣었으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들은 원서 넣은 고등학교 한 군데서 연락이 왔다.

주제를 먼저 주고 그 주제로 학생들과 교사 앞에서 강의를 해야 하는 시험이다.

마침 영화음악에 대한 주제가 주어졌기에

이전에 내가 클래식 음악친구들에게 프레젠테이션한 영화속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자료를 참조하라고 주었다.

열심히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정말 알차게 준비를 했다.

 

그 덕분인지 1차에 합격하고,

2차 면접시험에 자기보다 훨씬 경력이 많은 현직 교사들이 시험보러 왔다며 걱정한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 학교의 특수성이 아들이 잘하는 컴퓨터와 잘 맞아 떨어져서

면접은 잘 본 것 같았다.

면접관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학교가 당신을 뽑으면 학교는 큰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학교는 큰 모험을 했다.

 

아들 학교 다닌지 이제 한 학기를 끝냈다.

가끔 학교에서 아이들과 음악으로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해 주는데

정말 열심히 하는 것이 보인다.

아들은 주말마다 집에 와서 밤을 새며 아이들을 가르칠 교재를 준비한다.

특수학교라 음악과목은 등한시 하는데 아들 때문에 아이들이 음악에 재미를 붙였단다.

생전 처음 1학기를 마치며 교내 합창대회를 열어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기도 했다.

 

홀홀 단신으로 독일로 떠난 딸.

현지에서 입시를 보기 위해서 레슨받을 교사를 찾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

마침 내가 잘 아는 독일유학파인 유명 성악가가 몇 다리를 건너 교사를 구해 주었다.

딸은 어학도 공부해야 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시즌에 한국경기가 있던 어느 날 새벽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울면서...드디어 유명 국립대학에 합격했노라고..

 

아들은 지금도 늘 이야기한다.

만약 작곡을 전공안했더라면 자기 인생에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아빠가 젊은 시절부터 바라던 교사의 직업을 아들이 가진 것도 내겐 큰 기쁨이다.

딸은 유학 후 전문 음악인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때론 아들이 작곡한 성가곡을 교회에서 부르기도 하고

음악으로 재능봉사를 다니기도 했다.

우리를 아는 모든 이들은 우리보고 음악가족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린 온 가족이 차를 같이 타고 멀리 가면 종일 온갖 음악얘기 뿐이다.

내가 젊을 때 부터 모아 놓은 많은 클래식 음반과 음악관련 서적들을

아이들이 대물림 받을 수 있어 좋다.

여행관련 서적은 아무래도 딸이 받을 것 같다.

 

물론 음악에의 길은 무척이나 험하다.

우리네 삶에서 음악을 아주 잘하지 않는 한, 때론 밥 벌어먹기도 힘든 직업이다.

그러나 직업을 떠나서 자녀들의 삶이 음악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한다.

자녀들에게 음악이라는 무형의 큰 선물을 주었다는 뿌듯함이 늘 나를 기쁘게 한다.

 

인생의 음악 악장이 2악장이 거의 끝나고 3악장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내게 음악을 주신 분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