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기/중동방문기

사우디에서의 추억 (결혼반지)

carmina 2015. 6. 3. 11:42

 

 

 

사우디에서의 추억 2 (결혼 반지)

 

현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거의 중요한 기계들은 외국에서 수입을 해 오기 때문에 기계가 설치가 끝날 무렵에는 제조회사의 사람이 와서 기계의 운전을 해주고 트레이닝을 시켜 주는게 보통이다.

 

그날도 어느 기계의 운전을 위하여 미국에서 한 사람이 낡은 가방하나를 들고 입국해 우리가 제공한 숙소에서 묵으면서 한 달간 일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30분 일하고 20분 쉬는게 보통인데 이 사람은 거의 쉬지 않고 작업복에 기름을 잔뜩 묻어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일을 하였다. 가끔 너무 더우면 사무실로 와서 정제로 된 소금과 뜨거운 커피한 잔으로 피로를 풀고 현장에 나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우리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느 덧 그 미국인의 역할도 끝나고 돌아가는 날이 되어 내가 차를 몰고 그 사람을 공항에 데려다 주는데 내 옆자리에 앉아 부시럭거리면서 가지고 왔던 낡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니 결혼 반지를 찾는단다. 일 하다가 잃어 버릴까 보아 빼두었는데 하면서 가방 밑 바닥을 손으로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무척 기대를 했다. 저들의 결혼 반지는 어떻게 생겼을가? 우리 한국젊은이들이 보통 결혼반지를 다이아몬드 한 개 혹은 두개를 박은 비싼 금반지를 서로 주고 받는데 우리보다 몇 배나 더 부자인 미국인의 결혼 반지는 어느 정도인지 자못 기대를 하고 가방에서 꺼내는 반지를 보는 순간 난 그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건 아무 장식도 없는 그냥 동그란 18K금반지에 불과했다. 아주 볼품없이 생긴 그 반지가 결혼반지라니...

 

그 반지를 꺼내들고 아주 행복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손가락에 소중히 끼면서 하는 말이 아내의 부모님이 결혼하는 딸의 신랑인 자기에게 자신들의 결혼 반지를 물려 준것이라 한다. 나는 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우리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기에..

 

당시 결혼 전인 나는 그때부터 다짐을 했다. 나도 저렇게 소박하게 결혼하리라...

 

한국에서 전철 출근시 흔들리는 전철에 몸을 지탱하기 위해 붙잡는 손잡이의 손을 보면여지없이 천편일률적인 다이야몬드 반지들. 그것도 결혼 2 - 3년까지 끼고 다니다가 대개 잃어 버리거나 혹은 너무 신혼티를 내는 것같아 쑥스러워서 그냥 빼놓고 다니는 중년 초보들. 그러다 더욱 나이가 들면 손가락에는 아무 흔적도 없다.

그뒤 사우디 근무를 끝내고 한국에 들어와 결혼을 하면서 나도 그 때의 다짐을 실행에 옮겼다. 남들의 이목을 위해서 겉치레가 번드르르한 모든 것은 생략해 버렸다. 결혼 반지도 두 사람의 영문 첫자를 새긴 금반지 하나씩 나누어 가졌고 결혼 패물도 거의 생략해 버렸거나 혹은 가지고 있던 쓸만한 것으로 대체했다. 지난 몇년간 조금씩 저축한 돈과 사우디에서 번돈만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이 일에는 처가쪽의 이해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검소한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내 곁을 잠시 스쳐간 이름모를 한 외국인의 작은 행동에서 검약 검소한 정신을 배웠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살아가리라 다짐도 하고...

 

현장에는 또 미국회사인 감독관 사무실에서 사무보조를 하는 한국인 한명이 있었다. 나이도 많고 외모에서 고생을 해보지 않았음직한 그 분을 우리는 조선생님이라 불렀다.

 

조선생님은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셨는지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미국인 감독관들고 아주 잘 어울렸다. 가끔 나에게 자식들에게 온 편지를 보여 주는데 거기에는

‘아버님 그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들어와서 같이 사세요’ 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선생님은 나이들어 집에서 애들에게 얹혀 사느니 차라리 가지고 있는 영어 실력으로 외국에서 일하다 오겠다고 무작정 나왔다 한다. 그 분은 저녁시간에도 잠시도 쉬는 일없이 테니스를 즐기셨고 영어 소설들을 무척 많이 읽으셨다. 내게도 영어소설을 많이 주고는 저 감독관들 읽지 않으니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십여권씩 집어 주기도 했다. 젊은 감독관들과 우리 회사의 나이 어린 과장 차장 부장들에게 굽신거리면서도 전혀 얼굴에 싫은 기색이 없었고 늘 웃는 모습을 하고 다니는 그 분은 마치 나에게는 아버지같은 존재이었다. 같이 테니스를 치러 다니고 여기저기 먹거리를 찾아 다니기도 하고 나랑 대화하기를 무척 즐겨하시는 그 분은 소장과의 의견 충돌이 생겨 도중에 귀국해 버리셨다. 나중에 한국에서 그 분을 찾으니 미국에 있는 아들집에 가셨다고 해서 미국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통화도 못하고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루는 현장에 투입된 기능공중에 키가 작지만 몸집이 다부지고 운동을 많이 한 것같은 사무보조가 투입되었다. 이 사람은 현장에서 제일 까다로운 일중의 하나인 현장 출입증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이력서의 학력은 고졸이 전부였고 이전에 사우디의 다른 한국건설현장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다. 이 사람은 조선생님이 적극 추천해서 데리고 왔는데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어려운 아랍어를 대학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혼자 해외 현장에서 독학하여 말하고 쓰기를 아주 능란하게 하였다. 지렁이 기어 가는 듯한 아랍어는 웬만한 노력아니면 보기에도 귀찮을 정도로 까다롭다. 그 어려운 말은 사우디 생활을 십년씩 한 베테랑도 숫자 이외에는 한자도 못읽는게 대부분이다.

 

이 사람이 현장에서 절대 필요한 이유는 모든 출입증이 아랍말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이 출입증을 신청하는 서류의 작성을 위해서 비싼 임금을 주고 현지인을 필수적으로 고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 부분의 현지인들이 그렇지만 하루에 근무하는 시간은 불과 서너시간에 불과하다. 오전에 잠시 일하다 기도하러 가고 오후에 낮잠을 즐기고 와서 잠시 일하다가 또 기도하러 간다며 그냥 퇴근해 버린다. 그러니 밖에서는 현장에 기능공들을 들여보내지 못해 속타는 직원들이 있는데 현지인의 게으름으로 출입증 발급이 늦어지고 아울러 공사가 지연되는데 이는 모두 공사원가 상승요인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맡은 일에 아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 밤늦게까지라도 자기가 맡은 일을 기어코 제시간에 해 놓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자꾸 봉급을 올려 달라고 하는 바람에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문에서 출입증을 감시하는 경비들이 출입증에 기록되어 있는 아랍어가 마치 외국인이 억지로 그린 것 같다고 시비를 잡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어쨌거나 사우디는 우리 한국인이 쉽사리 돈 벌어 먹기 쉬운 곳이 아님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