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38) 욕심없는 마음

carmina 2015. 6. 11. 13:40

 

사월과 오월 - 욕심없는 마음

 

내가 사고 싶은 집은 작은 초가집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구운 옥수수
욕심없는 나의 마음 탓하지마라
사람들아 사람들아  음음

내가 입고 싶은 옷은 하얀 저고리
내가 갖고 싶은 책은 작은 성경책
욕심없는 나의 마음 탓하지마라
사람들아 사람들아  음음

 

젊은시절 이 모습이 내 모습이었다.

 

위로 형님 3분 누님 1분 밑으로 남동생 2,

7남매의 가운데서 자란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은 내 옷이라는 것을 사주지 않으셨다.

 

당시에는 의무사항은 아니었지만 대학생도 교복을 입었는데

그것도 큰 형님이 입던 것을 물려 받았고

거의 모든 옷들이나 학용품들을 형님들이 쓰던 것을 대물림했으니..

나는 큰 형님하고 다녔던 대학과 전공도 같으니 대학교과서도 거의 물려 받았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누님이 졸업식에 오셨는데

가지고 오신 졸업장을 담는 졸업통을 보니 며칠 전 바로 위의

형님 중학교 졸업했을 때 사용했던 졸업통임을 알고 집으로 뛰어 와

왜 내 것은 하나도 없느냐며 마루 바닥에 누워 얼마나 울었던지..

 

부모님과 형님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이라

형제들 중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홀로 교회를 다닌 나는

늘 식구로부터 왕따였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미신을 믿으신 것은 아닌데

내가 교회를 다니다 보니, 집에 가끔 여학생들이 찾아오고

주말이면 공부는 안하고 아침부터 교회가서 지내다가 저녁이면 들어 오고..

 

그러니 집에서는 완전히 내 놓은 자식이었지만

교회를 가면 누구든지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니 너무 좋았고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노래라는 것이 교회에서는 절대 필요하니

나 같은 젊은이는 할 일도 많았었다.

 

식구들 중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없으니

중학교 올라가면 누구나 다 가지고 다니는 성경과 찬송가가 없었다.

국민학교때는 그런 것 없이 앞에 궤도에 걸려 있는 있는

가사만을 보고 노래 불렀으니까..

다행하게도 성경은 6학년 졸업할 때 교회에서

졸업선물로 받은 공짜로 나누어 주는 기드온 성경이 있었지만

찬송가가 없어 늘 교회가면 열등감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일찍부터 돈벌이를 시작한 누님이

내 고민을 알았는지 찬송가를 하나 사 주셨다.

누님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APIS라는 만년필도 사주셨고
부모님에게는 감히 달라고 하기도 힘든 용돈을 대학시절에도 가끔 내게 찔러 주셨다.

(누님은 내게 그야말로 천사였다. 어릴 때의 일들이 너무 고마와
누님의 환갑잔치를 내가 해드리고 축하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눈물이 흘렀던지...)

 

그러나 성경 찬송가를 끼고 집에서 나오면 내가

교회가는 줄 알고 혼내고 못가게 하니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방법이

교회 가는 골목길의 어느 집 굴뚝 밑에 흙을 파고 

양회푸대로 싸서 묻어 두었다가 

교회갈 때 꺼내 가고 예배 후에는 내려오다 흙에 묻고 하기를 몇 주..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많이 왔다.

문득 내 성경찬송가 생각이 들어 급히 교회가는 골목으로 뛰어가

묻은 곳을 파보니 그만 책이 비에 젖어 표지와 뒤 겉장이 너덜 너덜.

그 책을 붙들고 얼마나 슬프게 울었던지..

그러나 성경 찬송가의 시련은 또 있었다.

내가 공부 안하고 노래하고 교회다니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시던

어머니께서 성경 찬송가를 아궁이 속으로 던져 버린 적도 있었다.

그 뒤로 내가 직장다닐 때 어머니는 내게 어떤 계기가 있어 교회다니기 시작하셨고

큰 시련을 당하시다 돌아가셨지만 어머님이 그토록 싫어하시던

젊은 시절 내 모습 때문에 내가 인생을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 줄

당시는 상상도 못하셨을 것이다.

 

검소하게 사는 것은 내게 익숙한 습관이었다.

욕심내지 않고, 그냥 조용히 지내는 범생이었던 나.

특별히 잘하지도 못했던 공부라 학교에서도 기를 피지 못했고

몸이 허약했던지 축구나 농구처럼 부딪히며 열심히 뛰어 다니는 운동도 잘 못했고

고등학교시절 다른 애들처럼 중국집 골방가서 빼갈 한 잔과 담배피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착하고 순진해서 남들처럼 친구들 말로 기를 죽이는 욕설도 못하며 살았고
(속칭 악이나 깡다구도 없었고..)

눈이 나빠 중3시절 1970년 5월 17일부터 끼기 시작한 검은 뿔테 안경과

당시 유행하던 엘리트학생복지로 만든 교복을 입은 애들은

주름이 잘 잡혀지고 구겨지지 않은 바지를 입었는데

나는 무릎 부위가 툭 튀어 나온 광목 바지가

내 모습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어쩌다 친구들 앞에 자랑스럽게 서는 내 모습은 기타를 드는 날 뿐이었다.

아직 기타치는 친구들이 많이 없던 시절이라

기타치고 노래하는 내 모습은 그 들에게 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소리통이 크고

Sing Along Y를 오래 다니는 덕에 많은 노래들을 가사도 모두 외워서

기타치며 노래를 하는 모습을 애들이 부러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Sing Along Y에서 배운

가수 사월과 오월의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이 제목과 가사가 내가 살아야 하는 모습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비록 시골은 아니었지만 내가 어릴 때 살던 초가집.

그래서 초가집같이 소박한 집에 대한 꿈이 있다.

지금도 시골길을 걸으면 자주 보는 오래된 나무 대문에 손때가 가득한 동그란 철고리가 있고

마당에 툇마루가 보이는 작은 집이 갖고 싶다.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시골로 간다면야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누가 내 뜻을 따라줄꼬.

 

직장을 다니면서도 욕심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남들처럼 진급을 하기 위해 상사를 찾아 다니며 잘 보일려 노력하지도 않았고

무언가 큰 일을 해 낼려고 끈기있고 악착같은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아마 게으르거나 선천적으로 남 위에서 군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탓일 것이다.

나는 지난 직장생활동안에도 하급직원이나 여직원에게도 거칠게 지시를 하거나 

함부로 대한 적이 없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이제 직장생활 시작한 지 무려 35년.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남들처럼 일반 직장인의 꿈인 임원이 되는 큰 결과는 없었지만

보통 대기업이 정하는 정년나이인 55세가 넘었고

지금 60세까지 끈질기게 붙어 일하며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다.

 

살면서 일확천금을 위해서 노력했거나

혹은 수입이 없거나 빚때문에 쪼들린 적도 없고

가난해서 남에게 돈 빌려 사는 적도 없었다.

내가 광고카피 중에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부자되세요'라는 말이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하는 이야기가 난 늘 거부감이 든다.

부자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닌데...

 

중용(中庸)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조금 소극적인 자세.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고

그게 주어진 내 인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