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40) 백구 - 양희은

carmina 2015. 6. 16. 11:39

 

백구 - 양희은

 

1.  내가 아주 어릴 때였나 우리 집에 살던 백구

     해마다 봄 가을이면 귀여운 강아지를 낳았지

    어느 해 가을엔가 강아지를 낳다가
    가엾은 우리 백구는 그만 쓰러져 버렸지


2.  나하고 아빠 둘이서 백구를 품에 안고
    학교 앞의 동물병원에 조심스레 찾아 갔었지

    무서운 가죽 끈에 입을 꽁꽁 묶인 채

    슬픈듯이 나를 빤히 쳐다봐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


3.  하얀 옷의 의사 선생님 아픈 주사 놓으시는데
    가엾은 우리 백구는 너무너무 아팠었나봐

    주사를 채 다 맞기 전 문밖으로 달아나

    어디 가는거니 백구는 가는 길도 모르잖아


     긴 다리에 새하얀 백구 음음음음음음음음음


4.  학교 문을 지켜주시는 할아버지한테 달려가
    우리 백구 못 봤느냐고 다급하게 여쭤 봤더니

    웬 하얀 개가 와서 쓰다듬어 달라길래
    머리털을 쓸어 줬더니 저리로 가더구나


5.  토끼장이 있는 뒤뜰엔 아무 것도 뵈지 않았고
     운동장에 노는 아이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줄넘기를 하는 아이, 팔방하는 아이들아
    우리 백구 어디있는지 알면 가리켜 주려마


6.  학교 문을 나서려는데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앞을 지나가면서 혼잣말로 하시는 말씀이  

     웬 하얀 개 한 마리 길을 건너가려다

     커다란 차에 치여서 그만 


     긴 다리에 새하얀 백구. 음음음음음음음음음


7.  백구를 안고 돌아와 뒷동산을 헤매이다가
     빨갛게 피인 맨드라미꽃 그 곁에 묻어 주었지

     그 날 밤엔 꿈을 꿨어 눈이 내리는 꿈을
     철 이른 흰눈이 뒷산에 소복소복 쌓이던 꿈을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내가 아주 어릴 때에 같이 살던 백구는
      나만 보면 괜히 "으르릉" 하고 심술을 부렸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어느 날 학교를 다녀 오니 늘 반갑게 맞아 주던

우리집 메리가 조용하다.

당시에는 개 이름은 메리 아니면 쫑이었다.

커서 알고보니 이게 625때 미군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미국에서 흔한 이름 여자는 메리 남자는 존

그래서 강아지 이름들을 그렇게 붙인 것 같다.

어머니는 가끔 내가 AFKN을 볼 때 이상한 소리가 나오면

그게 쌍소리인줄 금방 아셨다.

미군들이 한국에 있을 때 영어로 Son of a bitch 를 하면

어머니는 그게 욕인줄 알았고 '쌍노무배추'로 들으셨었다.

그래서 그 단어는 쉽게 이해하셨었다.

요즘도 미국 군대영화를 보면 거의 모든 대사가 쌍소리이니

당시 미군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어디 갔을까?

어제 부터 쥐를 잡을려고 놓아 둔 쥐약을 먹어서인지

앞마당 뒷마당을 마구 뛰어다니더니..

어디 갔을까?

어머니에게 물으니 쥐약먹고 미쳐서 처리했단다.

처리했다는 말은 아마 보신탕집에 팔아 버렸을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툇마루에 앉아 얼마나 울었던지.. 

내가 하도 슬프게 오랜동안 울어 그 뒤로 우리 집은

개를 기르지 않았다.

 

이 긴 노래를 한창 때는 모두 외워서 노래했는데

이젠 거의 2~3절까지 하다가 가사를 잊어 그만두고 만다.

마치 어릴 때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처럼...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본다.

 

우리 집이 내가 중3때까지 초가집이던 시절

오래된 나무 대문과,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

그리고 사랑채 하나가 있었고, 커다란 나무광이 있었다.

옆에는 실개천이 있었는데 그 옆에 닭장도 있었다.

뒷마당 텃밭에는 피마주, 돼지감자와 꽃들이 많았었다.

사랑채는 주로 전세나 사글세를 놓았다.

한참 월남전 시절에 사랑채에 남편을 월남으로 보낸

뚱뚱하고 못생기고 괄괄한 여자가 살았었다.

어느 날 남편이 돌아왔는데 어찌나 잘생기고 성격이 좋던지

어린 내게도 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이 무척이나 이상해 보였다.

 

또 어느 해는 그 집에 별로 얘기를 안하는 부부가 살다가

이사갔는데 어느 날 군 방첩대에서 우리를 찾아 오더니

그 부부 어디로 이사갔느냐고 묻기에 이유를 물으니

부부 간첩이었단다.

어쩐지 같은 지붕에 살면서 거의 왕래가 없었다.

미리 알았더면 정말 포상금도 받았을텐데...

 

안방은 톱밥이나 나무를 땠었고

건넌방은 부엌이 있어서 연탄을 땠다.

톱밥이 오는 날은 톱밥을 나르느라 온 종일 피부가 가려웠다.

혹은 톱밥나무라 해서 톱밥을 압축해 긴 널판지 식으로 오는 날도 힘들었다.

커다란 마루 천정 밑에 횡으로 나무 두 개를 가로 질러 놓아

그 곳에 커다란 소쿠리나 큰 물건을 얹어 놓았다.

 

어릴 때 동사무소에서 주는 미군 원조품인

노란 전지분유(우유가루)를 받아 그 나무 위에 오려 놓으면

키 작은 나는 깡총 깡총 뛰어서 손에 전지분유를 묻혀 핥아 먹고 했다.

마루는 자연 에어컨이었다.

더운 날 마루에 누우면 마루틈 사이로 불어 오는 바람에 낮잠이 달콤했었다.

집의 기둥도 모두 나무이다 보니 가끔 날파리 벌레가 나무 틈사이에 집을 지어

집에 종일 날파리가 날라다니기도 했다.

 

당시 라디오가 귀하던 시절이라 동사무소에 라디오가 하나 있고

각 동네 반장집에만 스피커를 연결해서 들었다.

우리 집은 아버님때부터 동네 반장을 거의 40년가까이 한 것 같다.

동사무소에서 알려 줄 사항이 있을 때 스피커가 들렸고

내년 정월이면 라디오 흥부 놀부나 장화홍련전 등이 방송되면

나는 어머니 무릎을 베개삼아 듣곤 했다.

 

앞 마당은 부드러운 흙으로 되어 있어 구슬치기, 엽전치기 하는데 아주 좋았었는데

비가 오면 마당이 젖으니 어느 날은 마당을 세멘트로 모두 덮어 버렸다.

 

장독대에 항아리(우린 장독이라 불렀다)가 많았는데

여름이면 열어놓은 고추장독에 빠져 있는 풍뎅이를 다리를 잘라

뒤집어 놓으면 뱅뱅도는 풍뎅이가 무척 재미있었다.

 

연날리기를 좋아하던 둘째 형님은 담위에 올라가 늘 연을 날렸다.

나는 여름만 되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금파리를 주워 오면

그걸 쇠절구통에 넣고 곱게 빻아 런닝셔츠에 올려 놓고 거른 후

바닷가에서 얻어 온 물고기 박대기(서대)껍질을 팔팔 끓여

그 안에 사금파리 가루를 넣고 옷핀을 통해서 연실에 가루를 매기면

연싸움 할 때 최고의 무기가 되었었다.

가끔 연이 끊어지면 연을 찾으러 먼 길을 쫗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연을 좋아하던 둘째 형님은 옆집 사는 누님과 

담넘어로 눈짓을 나누다가 결혼했다.

 

하늘에서 반짝 반짝하고 삐라가 떨어지는 날이면

이웃 동네 어디선가 곡마단 트럼펫 소리가 크게 울렸고

가끔 동동구루무 팔러 다니는 아저씨가 동동 북을 치며

골목길을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겨울엔 그 골목 개천에서 외날 썰매를 타고

고드름이 맛있는 간식이었고

여름에는 동네 국수가게에 널어 놓은 국수가닥이 참 달콤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다니던 친구 누님에게 과외공부하러 가는 날이면

그 누님은 뜨거운 커피를 우아하게 소리내지 않고 마시는 법을 시범보이곤 했다.

 

지금 반월 이전엔 군자가 고향인 아버님은

3남 2녀의 막내로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결혼 후

인천으로 오셔서 배만드는 목공을 하셨다.

그러다가 인천제철에 입사하신 후

용광로옆에서 평생 일하신 아버님.

아버님의 다리는 늘 불똥이 튀겨서 데인 흔적들이다.

뻘건 쇳물의 색깔을 보시면 온도를 알아낼 정도로 명인이셨다.

 

내가 직장 다닌지 10년 후에 S건설에 입사했는데

상관 한 분이 과거 인천제철에서 실습을 했다며

어느 용광로 기술자의 놀랄만한 경험담을 이야기하기에

우리 아버님이라 했더니 깜짝 놀랬다.

 

늘 힘든 곳에서 일하시니 스트레스로 골초셨고, 애주가셨다.

집안의 벽지는 담배진으로 누렇게 변해 손으로 문지르면

진이 묻어 나올 정도였다.

장판은 늘 담배 불똥으로 검은 구멍이 많았다.

 

아버님은 매 식사때마다 아침에 소주 반 병 저녁에  한 병을 드셨다.

맥주컵으로 한 잔 가득 따르면 소주 반병이 된다.

늘 한 병을 다 드시면 병을 방바닥으로 또르르 굴리셨다.

손님이 오시면 늘 빈 주전자를 들고 나가 대포집에서 막걸리를

받아 오면 주전자 꼭지로 막걸리가 흘리니까 들고 오며 입으로 조금씩

마셔야만 했던 막걸린느 참 달콤했다.

아버님은 그렇게 약주를 좋아하셨어도 한 번도 주정을 부리신 적이 없다.

나도 이런 면은 아버님을 닮았다.

 

야간근무가 있으신 날은 우리 형제들은 도시락을 날랐다.

가끔 공장내 목욕탕에 들어가 공짜 목욕도 하고..

어느 날 신문에 난 아로나민 광고에 아버님 얼굴이 실렸다.

의지의 한국인 (1) 라고...

이후 의지의 한국인 2, 3, 4 는 등대지기, 열차기사, 사진사 등등으로 이어졌다.

후에 알아보니 이게 우리나라 최초의 시리즈 광고란다.

 

산업화시대에 절대 필요한 것이 비타민이니

아로나민 선전하면서 산업화에 절대 필요한 제철

그리고 그 제철을 만드는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모델이 되셨다.

아버지는 모델료로 약간의 아로나민을 받으셨다 한다.

당시 신문 스크랩해 놓았는데 이사하느라 모두 사라졌기에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뒤 아로나민 홍보실에 전화했더니

광고를 우리 형제수만큼 액자를 만들어 보내주고 아로나민 골드도 보내주었다.

 

화장실은 나무광을 지나서 있었는데 나무 판대기를 두개 놓아 만든

완전 퍼세식화장실이었다. 당시는 어느 집이나 다 그랬으니..

형제들이 많은 우리 가족은 아침에 학교 갈 시간에 화장실이 급하니

남자형제끼리는 서로 엉덩이를 마주 대하고 같이 일을 보기도 했다.

여름에 비가 오면  개울을 흘러가는 거센 빗물에

똥을 철모로 만든 바가지로 퍼다 버렸다.

겨울이면 똥이 얼어 뾰족하게 올라오니 삽으로 솟아오른 똥을 깎아내야 했다.

 

동네 언덕 위에 말 손수레를 끄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일이 끝나면 말만 데리고 언덕을 올라갈 때 동네 아이들은 말 뒤를 따라 다녔다.

왜냐하면...말이 걸을 때마다 말의 다리만큼이나 크고 긴 거시기가 말다리같이 보였으니..

 

마루에는 커다란 뒤주가 있었다.

식구가 많으니 집에는 늘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에 담긴 쌀이 두 세 가마니씩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늘 키로 그 쌀을 까부셨다.

키 손잡이에는 어머니의 손길로 늘 반들 반들했었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집안의 물건들을 나누어 가졌다.

동생은 뒤주를 가지고 가고

나는 어머님이 쓰시던 키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지금 그게 어디갔을까?

나만 애지중지했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집에 오래된 일제시대 술병과 그릇이 많았었는데 그게 다 어디로 갔을까?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놋그릇을 닦으셨다.

초가집 지붕에서 밀집을 뽑아

기왓장 깨진 것을 쇠절구에 곱게 빻은 가루를 묻혀

파랗게 녹이 슨 그릇을 닦으면 반짝 반짝 광이 났다.

 

한 겨울과 한 여름을 지내면 여닫이 방문의 창호지에 누래지고 구멍이 생기니

보수해야 한다. 색이 변한 창호지를 모두 뜯어내고

새 창호지를 풀로 발라 그늘에 말린 후

창호지를 툭 건드리면 문에서 신기하게도 탱~ 소리가 났다.

 

어렸을 때의 추억에 관한 내용은 조금씩 보완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이 페이지는 계속 이어가고 이 다음에

우리 애들에게 보여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