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41) 도란 도란 피는 꽃

carmina 2015. 6. 18. 11:31

 

 

도란 도란 피는 꽃 (박목월 시, 김성태 작곡)

 

비바람이 창을 치는 어둔 밤에도

등불아래 이마를 마주 대이고

온 가족이 다소곳이 모여 앉으면

도란 도란 이야기꽃 절로 펴나네

 

근심걱정 없으련가 어려운 살림

고된 고비 숨가쁘게 넘었으련만

서로 돕고 의지하고 모여앉으면

도란 도란 괴로움도 절로 풀리네

 

세상살이 거센물결 사나우련만

맘을펴고 모여앉아 즐거운 한때

지난일을 웃어치고 털어버리면

잠자리에 숨소리가 절로 고르네

 

매스컴으로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내 애창곡이다.

 

젊은 시절 이 노래를 배우고

앞으로 결혼하면 이렇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 아래

결혼하면서 아내와 이 노래를 우리의 듀엣 18번으로 하기로 했다.

신혼여행 다니는 차 안에서 부부들을 소개할 때 우린 서로 음악을 좋아한다니

다른 신혼부부들의 요청에 의해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이래, 

집들이할 때나 친구들 모임에도 이 노래를 기타치며 듀엣으로 불렀으며,

최근 합창단 MT에도 이 노래를 같이 불렀다.

 

이 모습은 내가 어릴 때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다.

일곱 형제들이 좁은 방에 앉아

서로 다리를 교차하고 앉아 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하나씩 세고 나가면 노래가 끝날 때 걸리는

다리를 빼다가 최후에 남은 다리를 가진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그렇게 가족들이 도란 도란 살았었다.

 

형제들이 하나둘 씩 결혼과 직장으로 흩어져

모두 자기 삶을 살며 헤어지면서 그런 단란함은 옛날 얘기가 되었다.

나도 대학 졸업 전에 직장을 잡고

3년 후에 당시엔 누구나 다 나가던 사우디 근무를 1년하고 오니

어느 정도 돈이 모아졌다.

 

내가 평생을 같이 할 배우자 선택 전제 조건중 하나였던

음악을 전공한 여자를 직장 상관으로부터 소개 받아

8개월동안의 데이트 후 결혼을 작정한 후  

중동에서 번 돈이 있기에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가능한 신세를 지지 않기로 생각했다.

 

애당초 내 결혼은 그렇게 험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학창시절 남들처럼 과외공부를 가르쳐서

몫돈을 모으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시절엔 노래하러만 다녔으니 그런 능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장학생은 내게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였고...

그래서 늘 부모님께 미안했었다.

아내의 부모님께 내 뜻을 알렸고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님도 아내도 그렇게 내 생각을 받아 들였고

서로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사막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부천에 연탄 난방되는 주공아파트 전세 하나 얻으니

남은 돈이 없어 결혼식 비용은 모두 신용카드로 때워야만 했다.

겨울에 결혼할 예정이었는데 아내에게 줄 겨울 외투를 

여름에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사서 미리 준비해 두었고,

패물은 내가 사우디 근무 시절에 보기 좋아서 사놓은 시계와 목걸이로 대신했고,

반지는 당시 누구나 하던 백금 순금 반지할 여력이 안되어

18금으로 서로의 이니셜을 새긴 반지로 대신했다.

양가 부모님과 형제들에겐 우리 결혼에 대해

도와주지 않아도 되지만 대신 예단이나 선물은 없다고 미리 선포해 놓았다.

나는 아직도 결혼식때 내가 준비했던 전자시계를 30년동안 차고 다니지만

반지는 오래 끼다 보니 닳아서 날카롭게 변해버려 그간 모은 금붙이들과

함께 녹여서 작은 링반지하나 끼고 다닌다.

 

대신 결혼식은 목사님 3분이 사회와 설고, 기도, 축도로 진행했고

축가도 내 친구들과 아내친구들 모두 3팀이 나와 누구보다 풍성하게 치루었다.

 

당시 누구나 다 가는 제주도 신혼여행코스를 갈 여력이 안되어

마침 철도청에서 신상품으로 내놓은 신혼열차를 타고

경주와 부곡 그리고 부산을 다녀왔다.

 

맞벌이하다 보니 아침에는 서로 출근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저녁에 집에 오면 연탄불이 꺼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방 2개짜리 내 집이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결혼 2달만에 나는 다시 사우디로 나가고

아내는 친정 가까운 곳으로 이사가 그 곳에서 피아노 학원을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해외 월급이 한국월급보다 2배가 넘었고

전혀 지출없이 그대로 저축이 되었고 

아내도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내가 1년만에 집에 오니

우리 살림은 저축한 돈도 제법 되었고 금방 윤택해 졌다.

 

집도 사기 전에 중풍에 걸려 늘 집에만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기 위해 새빨간 색의 자가용 프레스토를 사고

매달 월급날은 인근 돼지갈비집에서 포식하는게 제일 큰 즐거움이었고

우리가 맛있게 먹으라고 주인아저씨는 애기를 대신 봐주기도 했다.

그러나 살고 있는 연립주택 주인이 부도를 내고 경매를 붙인다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살던 집을 조금 손해 보고 샀지만

그래도 결혼 2년만에 남들이 하기 힘든 마이홈의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커가고 집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신도시 아파트 분양 받은 후 여러 은행에서 소액 대출을 받아

중도금을 4개월 마다 넣어야 하는 시점에 터진 IMF 기간에도

극적인 계기들로 년리 20프로에 달하는 대출이자를 갚아 나가고

중도금을 무사히 낼 때마다 아파트 현장으로 가서 감사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참으로 지난 일을 되돌아 보니 고비 고비 숨가쁘게 나의 삶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지금까지 평생 맞벌이를 하지만 서로 얼마나 버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나 한 번도 서로 돈에 대해서 의심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서로 믿고 서로 욕심부리지 않고 살고 있다.

언젠가 지난 30년간 모은 급여 명세를 정리하면서

나의 인생을 되돌아 볼 시간이 있어 혼자 흐뭇해 한 적이 있었다.

그 적은 월급에서 교회에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가면서도 이렇게

견디어 왔구나 하는 뿌듯함 때문에.. 

 

그냥 불평하지 않고 자족하며 살았을 뿐이다.

지금도 나는 겉으로 화려한 인생을 바라지 않는다.

골프를 치지 않고, 주식이나 복권같은 일확천금을 꾸지 않으며

도박같은 것은 내겐 다른 나라 이야기고, 내기를 좋아하지 않고

내 돈 내고 거하게 술을 마시지도 않고, 담배도 피워 본 적이 없다. 

나름대로 가능한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건강 유지를 위해 헬쓰보다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트레킹에 힘쓰고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부지런하고 비용도 제법 지출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면적인 부자가 되기 위해...

이게 내가 추구하는 삶이려니 하고...

 

우리는 가능한 절약을 하며 살지만 친구들과 식사할 때는 될 수 있으면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대접받으면 꼭 은혜를 잊지 않는다.

 

지금도 가끔 어디 가서 우리보고 듀엣하라 하면 늘 이 노래를 부른다.

서로 노래를 무척 좋아하고 노래할 기회도 많지만 

남 앞에 서기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 아내의 성격으로

듀엣으로 노래하는 적이 많지 않아 실은 나도 조금 불만이다.

 

노래여 나의 노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