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43) 강변에서

carmina 2015. 6. 21. 22:30

 

 

강변에서 (송창식)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맘이 설레인다


강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
순이네 뎅그란 굴뚝엔 파란 실오라기 펴오른다
바람은 어두워 가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돌아 오는걸까

높다란 철교 위로 호사한 기차가 지나가면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아이야 불밝혀라 뱃전에 불밝혀라
저 강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저어라 열여섯살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저어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아이야 불밝혀라 뱃전에 불밝혀라
저 강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나 어릴 때 우리 집은 바다가 있는 화수부두까지 걸어서 5분거리에 있었다.

그 바다는 보통 생각하는 푸른 바다가 아니고

늘 생선비린내가 나고 녹슨 새우젓 드럼통이 가득한 곳이며

선술집 막걸리냄새가 풍기던 곳이라

난 아직도 그 비린내가 좋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생선을 먹지 못하면 하다못해 마트에 가서 어물전이라도

기웃거려야 한다. 아직도 내 생애 최고 반찬은 생선이다.

 

동네 집집마다 장독대위에선 생선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고

시골아이들이 참외서리 수박서리 하듯이 우리는 생선서리를 했다.

말리는 생선 훔쳐다가 연탄불에 구워 먹는 맛은 얼마나 고소한지..

 

가끔 그 바다로 혼자 밤에 나가는 날은

주로 부모님께 혼나고 바닷물에 빠져 죽고 싶을 때 였다.

어선이 닿는 곳이라 부두의 수심은 깊었으며

안전막이도 없던 시절이라 마음만 먹으면 죽는 것은 참 쉬웠다.

그 시커먼 바닷물 속에 엉덩이만 조금 내 밀어

툭 떨어지면 세상 모든 것을 잊을 것 같았다.

수산 고등학교를 나온 형님의 친구도 어느 날 그 뱃터에서 뱃일을 하다가 그만

어둠속에 빠진 것을 모르고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약한 바람이 부는 날이면 잔 파도에 정박된 배끼리 이리 저리 부딪히며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들끼리는 널판지로 서로 고정시켜 놓았는데

그 널판지로 이동하는 뱃사람들을 보면 보는 나도 위험해 보였다.

 

음력 정월 초 하룻날은 모든 배들에 풍어를 비는 뜻으로

오색 깃발이 돛대에 달려 펄럭거렸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부두가 가깝다 보니 동네 아주머니들은 생선과 관련된 일이 많았다.

잡아 온 생선을 다듬고, 비늘을 벗기고 하느라 늘 그 곳은 지저분했고

부둣가에는 얼음제조 공장이 있어 더욱 축축한 곳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한 때는 어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셨기에

나도 가끔 바다로 어머니를 보러 나가고 따뜻한 어묵을

먹어 본 기억이 있어 나는 지금도 어묵을 상당히 좋아한다.

당시만 해도 어묵이 참 귀했는데 부잣집 아이들의 도시락엔

어묵이 있어 늘 부러워 하다가 어느 날 용돈이 조금 생겨

시장에 나가 어묵을 사들고 어머니에게 드리며

내일 이 어묵으로 나 도시락 반찬 해달라고 말했다가

어머니에게 혼나고 그 어묵은 그 날 저녁 아버님의 술 안주가 되었다.

물론 다음날 내 도시락 반찬은 어묵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어묵이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제조된 것을 안다.

그러나 어묵은 그래야 맛이 있다.

요즘 어묵은 너무 깨끗해서 일본 음식같다.

 

2년전 직장이 먼 곳에 있어 혼자 고시텔에서 생활할 때도

밥은 안 해먹었지만 가끔 인근 마트에서 어묵을 사서 저녁으로 대신하곤 했다.

 

이 노래를 부르며 늘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은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이름이 우리 어머니 성함이라 더 각별했다.

 

특히 노래가사처럼 이 바다에 나가면

멀리 공장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 곳 했다.

가까운 공작창과 인천제철의 굴뚝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는

하늘 높이 올라갔고, 그 연기속으로 때론 연이 빨려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집집마다 굴뚝에서 모락 모락 연기가 피어나고..

 

저녁때가 되면 공장에서 일하고 오시는 아버님을 마중나가

손에 들고 계시는 달그락 거리는 빈 도시락통을 받아 들고 와야 했다.

 

이 노래를 처음 배울 때 우리 동네랑 참 비슷하다 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나이들어 어머니가 그리울 때 나는 이 노래를 부른다.

 

얼마 전에 고향에서 결혼식이 있어 가는 김에 화수부두를 방문했다.

이제는 깨끗하게 정리된 그 곳에 작게나마 횟집도 있고

바다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건너편 바라보이는 공장도 깨끗한 담장으로 막아 놓았고

어디에도 축축한 곳은 없었지만 아직도 집집마다 생선을 말리는

모습은 여전했다.

 

내 고향 인천은 늘 비린내가 좋다.

어머니의 몸에서 가끔 맡았던 비린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