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carmina 2015. 7. 28. 17:44

 

 

2015. 7. 26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과

 

그곳에 내가 있었고,

내 가족이 있었고

내 친구들이 있었고

나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숨어 있었다.

 

어쩌다 어쩌다 연락이 되어 47년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처음 만나는 장소를 당시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곳에 세워진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인천의 달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으니

우리의 모습도 달동네의 이미지에서 멀리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시절에 달동네라는 말없었다.

그 때는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단지 다른 지역은 개발이 빨리 되었고

그 동네는 개발이 안 된 것 뿐이다.

 

이 곳이 달동네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면

인천의 대표적인 기차역인 동인천의 뒷부분에 있는 동네였고

그 동네 뒤로는 모래사장도 없는 바닷가였으며

거대한 제철공장, 기계공장이 있었지만 이 곳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생활은 거의 동네와 반대편이었다.

지정학적으로 봐도 공장이 있는 곳 외에는 넓고 평평한 마당이 있는 곳은 없었다.

따라서 대규모 아파트를 세우기도 어려웠고

새로 짓는 아파트 들은 가능한 서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이 곳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보는 아파트도 별로 없었고

공장으로 드나드는 대형 트럭과 경인 고속도로로 가기 위한 승용차들만

지나치는 넓은 도로가 있을 뿐이었다.

 

내가 어릴 때 이 곳 수도국산이 그렇게 가난한 동네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작은 언덕위에 큰 공간이 있어 그 곳에서 단오날이면 장이 서고

아주 끈이 길고 큰 그네가 있어 어머니가 그네를 타고 하늘을 날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네를 잘 타셨고 널뛰기도 상당히 잘 하셨다.

그네를 타시면 거의 지면과 수평의 높이까지 올라가셨고

널 뛰기를 하며 키보다의 거의 3배 정도 높이 올라가실 정도이셨다.

 

박물관이 있는 좁은 언덕길을 차로 올라가니 골목 주변에 차를 주차시킬 공간이 없을 정도로

차들이 길 양쪽으로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다.

47년이 지났지만 초등학교 앨범에 나와 있는 얼굴 형태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친구들고

그 부부들을 만나 들어간 박물관.

 

박물관의 설명이 벽에 걸려 있었지만 내 눈에는 설명보다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학창 시절의 교복 모습에 눈이 먼저 갔다.

까만 교복, 까만 모자와 명찰.

낡은 괘종시계와 가족사진을 넣어 걸어 놓은 액자.

누군가의 공부방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어느 집이나 다 그렇게 되었었지.

이렇게 작은 자녀들 방이 있었고

안방에는 작은 구들방이 있었고,

나무나 연탄을 때는 부엌과 그릇들을 올려 놓는 선반.

양은 그릇과 냄비가 있었고, 작은 소쿠리들이 가득했다.

오늘 본 그 부엌의 바닥과 솥을 걸어 놓는 부뚜막은 세멘트로 되어 있지만

당시 우리 집의 부엌은 흙이었고, 부뚜막도 찰흙을 이겨만든 부엌이었다.

천정에는 30촉 백열등이 길게 내려져 있고

밥할 때 무쇠솥을 열면 김이 작은 부엌을 거의 암흑으로 만들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순간 부엌에 있던 쥐 한마리가 들어가 죽은 줄 모르고

그대로 그 김속에서 밥을 퍼 그릇에 넣었다가 식사하다가

형의 그릇안에서 발견이 되어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다.

 

방바닥에는 노란 기름칠을 한 종이가 장판이었고

작은 창문은 창호지로 도배하였고 벽은 꽃 무늬가 있는 장판지로 도배하였다.

그러나 어느 집들은 벽을 모두 신문지로 도배했던 모습이 거기 그대로 있다.

 

가끔 국내 여기 저기 여행다니다 보면 오래 전의 동네 모습들을

전시해 놓은 셋트장을 보기는 했지만 이 곳처럼 리얼하지는 않은 것 같처럼

느끼는 것은 지금 보이는 것은 바로 내가 살던 집을 보는 것 같아서일 것이다.

 

은율솜틀집. 간판을 이 전에 있던 곳에서 그대로 가지고 왔단다.

그러고 보니 다른 가게들 간판도 모두 낡은 것으로 보아 가게를 철거하면서

누군가 보관해 놓고 박물관에 기증한 듯 하다.

연탄가게 아저씨.

학교 옆에 커다란 연탄공장이 있었다.

누구나 다 연탄이나 장작을 때던 시절.

 

내가 살던 초가집이 도로계획으로 헐리고 

반만 남은 대지에 새로 양옥집을 지을 때도

이전에 있던 나무나 톱밥을 넣는 광(창고)은 없었지만

연탄광은 따로 있어야 했다.

 

그나마 생활이 안 좋을 때는 동네 연탄집에서

연탄을 몇 개씩 사와야 했었다.

짚으로 만든 밧줄인 매끼의 끝에 매듭을 짓고

19공탄 연탄의 가운데 구멍에 넣고 운반하던 추억들.

어쩌다가 연탄불을 가느라 집게로 들다가 놓쳐서 연탄이 반으로 깨지만

어머니에게 늘 혼나곤 했다.

 

요즘도 서울의 달동네에서는 연탄을 땐다고 대기업에서

양복입던 사람들이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그 연탄을 직접 언덕까지 나르곤하지만

당시는 그게 일상이었다.

 

비만오면 질퍽해 지는 운동장이라

비 오는 날은 당연히 연탄재를 들고 등교해야했다.

언젠가 가본 모교의 운동장에는 파란 인조잔디가 깔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당시 연탄재를 운동장에 부수어 깔고 나중에

땅이 마른 후 그 곳에서 전교생이 뛰고 엎어지고 놀았을텐데

연탄재의 미세먼지는 다 어디로 들어갔을까?

당시에는 폐병이 참 많았었다.

 

어느 집을 통째로 뜯어 놓은 듯한 전시관 앞에서 나는 탄성이 터졌다.

이거 완전 우리집의 축소판이네.

조금 틈새가 벌어진 마루와..

우리 집에 있던 것보다는 작지만 쌀을 담던 뒤주,

문 지방 위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

안 방에 있는 미닫이 있는 흑백 TV.

녹화된 것이겠지만 TV에서는 김일 레슬링 장면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 TV로 황금박쥐 만화와, 여로를 보았고, 김일레슬링을 보았고

내가 좋아했던 전국노래자랑,
일요일 아침이면 전석환씨가 나와 기타치며 부르던 정든 그 노래,
AFKN에서 파바로티가 아버지와 부르는 생명의 양식 이중창을 보았고,

여행가 김찬삼씨의 뉴스들을 보곤 했었다.

 

마루 위에 올라가 사진액자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아는 얼굴이 있지 않을까?

 

어느 방에서는 성냥곽을 제작하는 모습도 있다.

인천의 성냥공장이라는 노래도 있듯이

우리 집이나 우리 동네사람들은 하지 않았었는데

이런 부업도 있던 것 같다.

아마 인천에 대성목재가 있었기에 나무구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어느 방 한구석에 개어놓은 이불들.

옥색빛, 초록빛 색깔들의 이불들이 가지런히 개어 있고

어느 방에서는 비키니 옷장도 보인다.

자개농을 가진 집은 그래도 조금 살만한 집이었을 것이다.

 

우물의 모형도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의 대표적인 이정표가 쌍우물이었다.

비록 내가 자라던 시절엔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아마 그 곳에 우물이 두개였을 것이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푸는 것도 기술이라

난 늘 형을 따라다니면서 속칭 빠게쓰라는 것을 보조하는

역할만 했었다. 후에 생각하니 그게 영어의 버킷이었다.

 

비록 집에 수도는 있었지만 수도가 자주 끊기니

집의 커다란 드럼통엔 반드시 물이 가득차 있어야 했고

우리가 하나 넉넉히 들어갈만한 크기의 장독에도 물은 늘 차 있었다.

 

천천히 둘러봐도 수도국산 달동네는 내가 살던 동네보다 더 못하는 곳 같았다.

 

2층으로 전시실에는 그래도 조금 나은 도심을 표현해 놓은 듯

영화포스터가 걸려 있고 커다란 솜틀기계도 있다.

다방이 있고, 이발소도 있고, 사진관, 양장점이 있다.

 

그리고 눈길을 끄는 것은 바닥에 있는 인천의 커다란 항공지도.

언제적 사진인지 모르지만 아파트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970년 후반 정도 일 것 같다.

강화 유리로 만들어 지도위에 올라가서 볼수 있게끔 되어 있어 

친구들과 우리가 놀던 골목들과 오가던 길 그리고

놀던 장소들을 하나 하나 되새겨 보았다.

동인천역, 수문통, 화수부두, 배다리, 대성목재, 한국유리

자유공원, 차이나 타운 등등..

 

이런 초라한 곳들이 내게 삶의 큰 근본이 되었고

비록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어둡게 살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즐겁게 추억여행을 하고 난 후

근처에 56년된 복집이 있다 해서 찾아 가는데

차를 가지고 가니 지도를 보고도 찾지 못해 헤매는 실수를 범한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이상하게 친구들의 과거 기억들은 선명하던데

나는 왜 이렇게 어린 시절 기억이 사라졌을까?

 

너무 초라하게 지내서?

아니면 아픈 추억만 있어서?

그런 이유때문에 기억하기 싫어서일까?

 

문서로 적힌 나의 과거를 찾아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