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carmina 2015. 8. 11. 13:23

 

2015. 7. 28

 

지난 일요일 초등학교 친구들과 47년만에 해후하여

추억을 이야기하던 중 친구들은 초등학교 일들을 많이 기억하기에

평일 문득 어린 시절의 내 생활기록부가 보고 싶었다.

 

마침 가까운 초등학교에서 팩스로 받을 수 있기에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읽어 보니

이제까지 내가 전혀 생각못했던 내 모습들이 종이위의 펜글씨로 보인다.

수우미양가로 표현되던 내 성적, 그리고 결석 일수

아마 결석일수로 대충 평가해 놓은 내 건강평

 

놀라운 것은 내가 1학년 들어갔던 시절에 생일이

이제까지 한번도 공식 기록에 없었던 내 음력생일로 표시되어 있다.

아마 그 시절엔 주민들록 등본이 없었으니

부모가 읽어 주는대로 적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내 생일이 음력으로 1월 5일이니 입학을 7살에 시킨 것 같다.

 

학창생활을 하면서 나 스스로도 다른 동급생 친구들에 비해

발육이 늦고 늘 조금 부족했던 것은 아마 이런 몇 개월 차이였으리라

그러다가 4학년 되니 제대로 내 주민등록상의 생년월일이 표시되었다.

그러나 호적상으로 이 한 해 늦은 꼬리는 내 평생 붙어 다녔다.

특히 조금 으시대고 남을 깔보기 좋아하는 아이들은

늘 내 생일을 꼬투리 잡아 놀려댔다.

그런 친구들 중에 대학까지 같이 다닌 친구들이 있는데

나는 지금도 내게 그런 행동을 보인 친구들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또 하나 중요한 내 기억의 오류를 발견했다.

1학년 담임이셨던 여선생님이 3학년을 다시 맡은 줄 알았는데

기록을 보니 1학년과 2학년 담임이 같다.

그리고 선생님의 성이 '최'씨가 아니고 '채'씨였던것을 이제야 알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3학년 담임선생님의 이름은 도무지 생소한 이름이고

4학년 담임이름은 도장밑에 겨우 보이는데 판독불가.
기록을 보고 5학년 담임이름을 겨우 생각해 냈다.

내가 얼마나 머리가 나쁘기에 그런 것도 잊었을까.

어째서 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을까?

 

아마 내 생애 처음으로 나의 어린 시절 기록을 본 것 같다.

 

내게 붙은 평가는 대체적으로 안 좋은 것이었다.

기록의 의하면 5학년때를 빼 놓고는 각 학년마다 일년에 3 ~ 4일씩 결석을 했다.

그래서인지 담임선생님들이 내게 준 평가는

주로 안색이 안 좋고 허약하게 보인다거나, 경솔하다거나, 소극적이라거나

우리 집의 생활수준은 아주 낮았다고 평가되어 있고

 

공부도 논리와 추리력이 부족하다거나,

지식,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표시되어 있는 등

거의 모든 과목에 평균 '미'일 정도로 남에게 부끄러운 평가를 받다가

5학년때는 고등정신기능의 발휘가 특히 우수하다고 표현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내가 5학년때부터 공부에 전념했을까?

 

그러고 보니 6학년 때의 성적은 거의 '우'를 받았다.

5학년이면 내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을때인데

혹시 제대로 교육받은 가정의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다보니 자극을 받았을까?

 

우리 집은 형제는 많지만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형은 없었다.

큰 형님이 열심히 공부하셨을텐데 아마 그 당시 낮에는 공부하시고

밤에는 어느 가게의 점원으로 나가 일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도 낮에는 일하시고 야간을 다니셨으니 좀체로 볼 기회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다니던 시절에 몇 개월 간 잠시 저녁 시간에 같이

보내는 정도였을 것이다.

둘째형도 일찍 산업전선에 뛰어 들었고

셋째형도 실습을 주로 하는 학교에 다니셨기에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누님도 일찍 돈벌고 계셨으니 누가 나보고 그 어린 시절에

공부하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 친구 중 한 명이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사를 가버리고 말았다.

아직 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한다. 기준이...

 

그러나 나는 당시 만화에 빠져 있었으며

만화를 보기 위해 공부 및 내 생활습관은 엉망이었다.

 

교회를 나가니 자연스럽게 내 주위에 부모님이 교육받은 분들의

자녀들이 교회에 많았고 그 들과 어울리니 자연스럽게 내 생활이 바뀐 것 같다.

 

6학년 시절에 우리 반 친구이면서 교회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집안이 교육자 집안이고 형도 서울대를 다닐 정도로 수재였다.

그 친구는 우리 반에서 늘 1등을 차지했고

나도 그 친구랑 어울리다 보니 때로는 그 친구에 이어 2등까지 해 본 적이 있다.

맹모 삼천지교라는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나를 처음으로 교회에 데리고 간 이웃집 형이 내게 동화책을 읽어보라고 주었다.

나는 그 때 부터 만화책을 보는 열정으로 동화책을 섭렵했다.

교회에 있던 동화책은 모두 읽으니 그 형님이 어디선가 세계어린이 동화집을 가져다 주었고

나는 그것도 모자라 학교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그때가 아마 제일 처음 도서관이란 것을 알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뒤 대학졸업할 때까지 나의 학창시절은 거의 도서관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교회는 나를 크게 변화시킨 것으로 유추된다.

5학년때부터 나의 생활이 바뀌었다.

공부를 하고 좋은 중학교를 들어가고 싶었나 보다.

당시는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들어가야 했고

나는 5학년 때 동네 대학생 누나에게서 과외공부를 받기도 했다.

그 누나는 나에게 커피를 우아하게 마시는 묘기를 보이기도 했다.

같이 공부하던 이웃집 친구는 다른 학교를 다니지만 나와 동급생이었고

아버님이 배다리근처의 양키시장에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청바지를 판매하셔서인지 그래도 부잣집에 속했다.

그 친구는 대학생 누나가 친척뻘이라고 가끔 누나 앞에서 신경질을 부리며

연필심을 마구 부러뜨리기도 했다.

언젠가 그 친구의 친척집이 있다는 부평을 찾아갔다가 둘이

벌판에서 동네깡패를 만나 혼나기도 한 기억이 있다.

 

지금에 와서 내 성적표를 보니 참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6학년에는 성적이 '수'가 하나도 없고 거의 '우'뿐이었는데

왜 담임선생님은 나보고

인천에서 제일 좋고 경쟁률이 센 인천중학교에 시험치라고 원서를 써 주었을까?

우리 어머님이랑 상담하셨을까?

아니면 그냥 선생님의 판단이셨을까?

상담하셨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것에 관심없었을테니..

한 학년에 전체 13학급.

그 중 남학생이 6개반, 여학생이 7개반.

각 반바다 학생이 약 60명에서 70명

 

인천 중학교의 1학년이 몇 명이나 될까?

그래도 초등학교 한군데서 갈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인천에는 공부 잘하는 학교들이 많았으니까..

우리 학교는 그다지 우수학교가 아니었을텐데..

 

중학교 수험번호를 받으니 경쟁률도 모르지만 내 번호는 1번.

기억속에 시험 사전 소집에서 본 지원생들의 숫자는 운동장을 다 채울 정도로 많았다.

보편적으로 번호가 빠르면 떨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난 떨어지고 말았다. 1, 2, 3번 떨어지고 4번부터 붙었다.

그래서 내 인생 첫 입학시험은 낙방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집에 와 꺼이 꺼이 우니 누님이 내게 농구화를 하나 사주셨었다.

 

6학년 시절의 공부는 혹독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시험을 보고

매일 매일 100점에 못 미치는 점수만큼 매를 맞았다.

막대기로 손바닥을 맞는 것은 기본이고,

종아리나 엉덩이를 맞으면 바지로 가릴 수 있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책상위에 무릎꿇고 앉아 허벅지를 두들겨 맞을 때는 정말 아찔했다.

걸상을 들고 무릎꿇고 앉는 것은 체력단련을 위해서였을까?

그러나 나의 귀한 자식을 때린다고 학교에 찾아 오는 부모님은 절대 없었다.

 

모든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다.

하다못해 음악책까지 다 외워버렸다.

노래를 외운 것이 아니고 오선지만 내 주면

악보를 외워서 그릴 정도로 각종 숫자로 부호로 외워야만 했다.

조 이름 외우는 것은 기본이고 반음쉽표 온쉼표도 다 외워야만 했고,

음악을 배운 것이 아니고 암기력을 배운 것 같다.

단지 입시만을 위해서...

아직도 외운 숫자와 계명들을 기억한다.

 

생활기록부에 이런 표현도 보인다.

- 대담하고 명랑 쾌활함

- 상냥함

- 인상이 상냥하여 호감이 감

- 학업에는 남에게 지지않으려는 태도가 보임

- 화분 화병관리를 잘함.

 

늘 형들에게 혼나기만 해서 주눅이 들어 지냈을텐데

내가 왜 대담하고 명랑 쾌활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대충 적으신 것은 아닐까?

내 실마리같은 기억속에서도 나는 그다지 명랑하고 쾌활하지 않았던 것같다.

 

상냥하긴 했을 것이다.

소심하고, 배짱도 없었고, 싸움을 위해 무력을 쓸 정도로 용기나 깡도 없었으니

내 생활은 조용했을 것이다.

키도 크지 않아 집에 있는 어른 자전거를 타기가 무서웠다.

자전거에 대한 공포심은 오랜동안 지속되고

지금도 자전거는 능숙하게 타지도 못하고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나를 아는 동네 어른들은 커서도 내게 하시는 말씀이

어릴 때 부터 내 얼굴이 유난히 하얀 피부를 가졌었다 한다.

아기때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한 번씩 안아보고 양키새끼라고 놀리기도 했단다.

지금도 내 6학년 졸업앨범을 보면 다른 친구에 비해 내 얼굴이 밝고 웃는 형이다.

 

생활 기록부에 특별활란에 내가 화분 화병정리를 잘한다고 써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화단에서 꽃을 다듬고 토끼를 키웠으며 
화단에 기온과 습도를 관측하기 위해  온도계가 들어 있던 하얀 백엽상 관리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 올랐다. 

이 회상을 하면서 그런 것들이 모두 내 기억속에서 아주 사라진 줄 알았는데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잠시 잊고 있던 것 뿐임을 알았다.

 

아마 나는 이런 자연에 대한 애착이 어린 시절부터 있었나 보다.

지금도 자연 속을 있기를 좋아하고 그 안에만 있으면 평화를 느낀다.

이러한 나의 본능은 선천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다 그렇지만 내 주위의 상황이 그렇게 자연속에 살지 않았고

내게 자연은 그저 시골 사촌형님댁이나 외갓집에 갔을 때 이외에는

자연을 모르고 지냈다.

비록 잘 살지 못하는 동네지만 내게 자연이란 것은

오로지 풀한포기 없던 바다였다.

늘 검은 물이 흐르고 생선 비린내가 나던 그 곳이 내가 만나던

유일한 자연이었고, 풀숲과의 만남은 인천의 자유공원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살면서 숲속에서의 내 모습은 늘 이상향이었다.

 

그다지 잘 살지 않는 동네이고 어느 집이나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기에

동네는 늘 아이들로 시끄러웠다.

이웃집의 사내아이들은 조금 거칠었고

우리 집과 남자 형제수와 딸 하나 있는 것까지 같고 딸의 순서까지도 같은

이웃집의 남자들은 내가 생각하기도 무척 불량스러운 가족이었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안좋은 이웃이었던 그 형제들.

결국에 그 집 형제들은 누구는 살해당하고 누구는 군대서 탈영하여 헌병들이 찾아오고

누구는 집을 나가 버리는 둥 아주 콩가루 집안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웃들도 당시 내 눈으로 보기에는 모두 질이 안 좋은 이웃들이었다.

아마 그 중 우리 집 형제들이 제일 모범생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마 엄하고 근면하셨던 우리 아버님과 자상한 어머님덕분이고

공부도 잘하고 옳바르게 자란 우리 큰형님덕이었던 것 같다. 

 

생활기록부에 내 시선을 끄는 강력한 펜글씨 하나.

1학년 때 특별활동란에 '음감이 예민함"이라고 써 있다.

놀랍다. 정말 놀랍다.

내가 1학년에 이런 평가를 받다니....

내게 1학년에 대한 기억은 담임선생님의 얼굴외에는 하나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분이 내게 음감이 있다고 표현하셨다.

1학년 때 배운 노래라야

나리 나리 개나리...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송아지 송아지 ...

등 멜로디만을 배웠을텐데 내게 음감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혹시 목소리가 남보다 조금 컷을까?

그래서 음감이 있다고 했을까?

 

내가 처음 남 앞에서 부른 노래는 아마 5학년 때라고 추측되는데

교과서에 있는 노래를 하나 불렀다.

'시냇가에 제비꽃 한들 한들 제비꽃...' 이라고 시작되는 노래

이 노래를 부르고 선생님에게 시원하게 잘 부른다고 칭찬을 들었다.

 

자라면서 노래라는 것을 들은 것은 교과서 노래보다

팝송을 더 많이 들은 편이었다.

형님들이 집에서 듣는 음악이 저절로 귀에 들렸으니

내게 톰존스나 엘비스 프레슬리가 더 친숙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5학년 시절 뜻도 모르고 그런 노래들을 흥얼거리고 다녔었는데

어느 날 한 달에 한 번 학급친구들의 자치행사인 홈룸시간에

반장이 나와 사회를 보다가 나를 지적했다.

퇴폐적인 팝송을 흥얼거리며 다닌다고..

결국 나는 반항도 못하고 앞에 나가서 반성을 해야했다.

다시는 안 부르겠노라고..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굴욕이었고 공산주의 시대의 자아비판이었다.

 

초등 5학년 때 교회 여름성경학교에 다니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다.

추억하건대 그 때가 내가 제일 처음 노래에 대한 흥미를 가졌을 것이다.

커다란 종이에 가사밖에 없는 노래를 따라 수없이 따라 부르며

차츰 차츰 노래가 좋아졌다.

교회 친구들 중에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게는 그 시간이 참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내겐 천부적으로 노래에 대한 소질이 있던 것 같다.

 

내 생활기록부를 보면서

과연 선생님들이 학생들 개개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런 평가를 내렸을까 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자꾸 든다.

무언가 형식적인 말을 쓴 것도 같고..

그러나..

나는 아직도 1학년 시절의 담임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학교 밖 거리에서 몇 년 뒤 나를 알고 아는 척 해 준 선생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시절인가...

어느 날 비가 오는데 바로 위 고등학생 형이

우산없이 학교를 갔기에 어머니가 우산 가지고 버스 정류장 가서

기다렸다가 우산 주고 오라해서 동인천역 버스 정류장에서

많이 기다렸는데 형님을 만나지 못해 마음이 울적해

집으로 오는데 비닐 우산이 뒤집어져서 형님 줄려고 했던 우산을

내가 쓰고 뒤집어진 우산을 질질 끌고 오다가 지나가던 초등학교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며 나를 달래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 이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던 그 선생님이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마주침이 평생의 마지막이었지만 내겐 학창생활 16년 중 스승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오로지 그 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 결석 기록을 보니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심한 병을 앓은 적은 없던 것 같다.

1년에 한 번이나 두번 정도이니

아마 감기나 열이 나서 안 간 정도였을것이다.

 

기록을 보니 지금도 내게 있는  신체적인 결함의 상태는

아마 학교입학전에 앓았던 것 같다.

내 기억에도 없고 단지 큰 형님이나 사촌형님이 기억하고 있다.

 

성적을 하나 하나 살펴보았다.

 

국어는 1,2,3학년까지 미, 4,5,6학년 우

산수는 계속 미만 받다가 6학년에 우

사회나 자연은 미가 대부분

음악은 1, 6 학년 우 나머지는 미

단 하나 수를 받은 것은 5학년 실과.

 

전학년 최종 종합평가는
경솔하고 소극적인 장난을 잘하나

학업에는 남한테 지지 않으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66년)

 

66년인 것을 보니 5학년 말기에 평가해 놓은 것 같다.

 

종합평가를 보고 지금의 내 모습을 보니

내가 중 고등학교를 그리고 대학교를 거치면서 성격이 조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서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과거들이 조금씩 생각난다.

아마 친구들과 더 얘기를 하면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날 것이다.

 

이 글은 추억이 생각나는대로 업데이트를 해야 할 것 같다.

 

may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