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언제나 좋은 3코스 숲길

carmina 2015. 8. 30. 00:20

 

 

2015. 8. 29

 

폭염은 수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고, 짜증나게 했지만

폭염은 벼가 천천히 익어가게 하고, 과일을 달게 만들었다.

 

폭우는 그대로 있어야 할 것들을 사라지게 했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었지만

폭우는 자연을 더 깨끗하게 하고 숲속의 잔가지들을 모두 아래로 쓸어 내려 버렸다.

 

태풍은 어부들이 며칠동안 일을 못하게 하고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지만

태풍은 병든 바닷물을 갈아 엎어 물고기들이 숨을 쉬게 하고

대기의 답답한 먼지들을 모두 날려 버렸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늘 나쁜 면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어느 것 하나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늘 태풍 고니가 지나 간 뒤의 나들길을 걸으면서

폭염이 지나가는 듯한 늦여름에 숲에 들어가면서

내 주위의 모든 것들에 감사해야 했다.

 

그리고 지난 주 내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북한의 극단적인 전쟁 위협에 가장 중심지에 있던 강화도를 걸으면서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나들길 리더가 오늘은 그간의 조바심이 풀어진 기분에 조금 욕심을 내었다 보다.

보통 한 코스를 걷는 편인데 오늘은 한 코스 반을 걷겠단다.

나야..2 코스라도 걷지..

 

강화로 가는 하늘에 어느 새 가을이라는 구름표와 바탕색이 보인다.

그렇게 더웁다고 아우성대던 2개월이 이제 지나갈려나..

기분 좋은 마음으로 터미널에 들어 섰는데

그만 터미널 승차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몰지각한 사람때문에 기분이 잡쳤다.

저렇게 참지 못할까?

 

한가해야 할 버스가 우리 일행으로 가득 차 버렸다가

우리가 정제두 묘 앞에서 내리니 다시 썰렁해 졌다.

도로의 내리막길에 꽃길을 만들어 놓아 깨끗한 도로와 더불어

주변이 더 깨끗해 보인다. 조선시대 주자학과 양명학을 연구했던

큰 학자인 정제두선생과 부친의 묘도 잔디도 잘 다듬어져 있고 깨끗하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의 묘에만 세울 수 있던 석상.

아직은 풍상에 시달리지 않은 편이다.

 

나들길을 처음 오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

리더가 여러가지 정제두 묘에 대한 설명 후 숲 속으로 들어간다.

 

폭염과 몇 번의 폭우 속에 나들길의 보행로가 잡풀이 덮혀 최근에

걷기 어렵다는 민원이 게시판에 제기되더니 그간 부지런히 벌초 작업을 했는지

보행로의 잔디가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다.

 

길게 줄을 지어 숲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온갖 시름에 가득차 이 곳에 오면 그 모든 시름을 금세 잊을만한 풍경이다.

밤들이 푸르게 익어가고 그 중 미리 익은 밤송이들이 떨어져 눈길을 끈다.

떨어진 밤송이를 까보니 크게 여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토실 토실하게 보였다.

 

열을 지어 길을 걷다 보며 앞 사람의 발 뒤꿈치만 보고 걷게 되어

가능한 맨 앞에 서기 위해 걸음을 빨리 한다.

시야가 트이고 자연의 푸르름을 먼저 대하게 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숲길 양 쪽으로 이어진 거미줄이

얼굴에 닿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스틱을 앞에 들고 걸으면 그래도 조금은 피할 수 있는데

오늘은 그냥 대충 걸었다. 굳이 신경쓰기 싫어서..

 

나무들이 이파리들이 숲속의 빈터들이 깨끗하다.

폭우에 모두 쓸려 내려 갔으니 운 좋은 가지들만 남아 있다.

그러나 어느 나무들이 뿌리 쪽의 흙이 무너져 내려 뿌리가 벌거벗은 채로 있어

안타까운 모습이다.

 

다음 달에 추석이 있어 여기 저기 무덤들이 정리되어 있지만

아직도 많은 무덤들이 잡풀로 볼품없게 덮혀 있다.

늘 이 길을 지나가며 보던 하동 정씨 가족묘가 궁금했었는데

오늘 마침 사람들이 벌초를 하고 있기에 하동 정씨 어느 파냐고 물어보니

나와는 다른 파다.

 

갈멜산 기도원 앞을 지날 때에 이제껏 한 번도 인기척이 없었는데

오늘은 크게 열린 철대문 저 안 쪽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

 

다시 숲길로 들어가는데 길 옆에 누군가 나뭇가지들을 얼기 절기 엮어

작은 조형물들을 만들어 놓았다. 필경 기도원에서 온 사람들이 무언가

창의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숲이 많이 우거져 있어 거의 터널을 지나는 듯하다.

이렇게 걷는 것도 잠시 뿐일 것이다. 이 수풀들이 다시 시들어지면

얼키 설키 엉켜진 가지들과 줄기들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 갈 것이다.

 

지난 봄에 쓰러져 길을 막았던 커다란 나무도 나무를 모두 잘라서

길을 터 놓았다. 누군가 열심히 길을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길을 걸으면 외래식물인 자리공을 보이는 대로 뽑아 버렸는데

여름 한 철 지나니 이젠 그 한계치를 넘어가버려 외래종이 아주 범람해 버렸다.

우리나라 호수에 자리잡은 외래종 어종인 블루길처럼 이젠

한국 전역에 자리공과 가시박이 덩쿨이 산야를 덮어 버려 안타깝다.

 

어쩔 수 없다.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자.

구름이 아름답다. 설마 구름까지 외래종은 없겠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진강산을 덮고 있다.

지난 8월 초에 그토록 힘들게 걸었던 진강산이 멀리 아스라하게 보인다.

 

숲길을 잘 정리해 놓아 비단길이나 웨딩마치 길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벌초도구를 운반하기 쉽도록 차가 들어오기 편한 곳의 길들은 잘 정리해 놓았다.

 

3코스에 접어 들었다.

가릉이 있는 이 곳에 오면 잘 다듬어진 비탈진 잔디밭에서

삼천갑자 동방삭이처럼 늘 한 번 굴러 보고 싶다.

진강산 정자에 누군가 말벌집이 있다고 신고했는데 아마 그 것도 정리했을 것이다.

 

나들길이 모터 사이클을 즐기는 사람들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어서인지

산속 숲길로 들어가는 길목에 안내판과 함께 통나무로 차단을 해 놓았다.

그런다고 들어오지 않을까?

 

3코스이명소인 장대같은 소나무들이 서 있는 숲길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나무로부터 기를 받고 싶은지 나무를 끌어안는다.

요즘은 이런 자연 치유를 하는 단체들이 많다.

숲 속에 들어와 매트를 깔고 누워 하늘을 보고

커다란 나무에 등맛자지를 하거나 나무를 깊게 포옹한다.

 

늘 쉬던 공터에 도착하여 앉아 있으니 누군가 매미가 벗은 허물을 보여 준다.  

창백한 매미 허물이 아직도 살아 있는 듯 가녀린 발로 나무를 꼭 끌어안고 있다.

 

그런가하면 누군가 버린 것인지 떨어뜨린 것인지 제법 큰 수박한덩이가

길가에 있다. 어떤 사연이 있는 수박일까? 혹시 방금 놓여진 것이 아닐까 해서

발로 굴려 보니 지면에 닿던 부분이 썩어가고 있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 저 곳이 마니산이라 하고 알려 주는데

봉우리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오늘은 숲의 기운 뿐만이 아니라

마니산의 기운까지 받으며 걷고 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자연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데

길벗들 옆을 지나가며 귀에 들리는 대화들도 모두가 밝은 이야기들 뿐이다.

그 중 대학다니는 딸과 엄마의 대화는 나도 비슷한 또래의 딸을 가진

아빠로서 심히 부러워할 정도로 걷는 내내 다정하게 서로를 칭찬해주고

배려하는 대화와 모습에서 감동받았다.

 

온 천지에 칡넝쿨이 나무들을 덮고 있다. 그리고 미안한지 보랏빛 칡꽃들을

빼꼼히 내 밀고 있다. 등나무길은 나무들의 지옥이다.

등나무들이 큰 나무들을 칭칭 감고 올라가는 그 위에는 나뭇잎들이 힘이 없어 보인다.

서서히 비비꼬아 조이고 조여서 말라 죽이고 있다.

 

길벗들이 얼굴에 페이스 페인팅처럼 이상한 풀잎들을 붙이고 다니기에 이상했었는데

알고보니 그렇게 하면 모기들이 가까이 오지 못한단다.

근데 그 모습이 숲 속이라 그런지 참 자연스럽다.

 

석릉으로 올라가는 길은 매번 다른 모습이다.

때로는 솔잎으로 가득 덮혀 있고

때로는 이끼가 완전히 길을 덮고

때로는 오늘같이 깨끗한 세멘트 길만 보인다.

 

석릉에 올 때마다 늘 묘지를 지키는 두 석상을 손으로 만져보곤 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지켰기에 이렇게 코다 다 문드러 졌을까?

무덤안에 희종을 지키기 위해 몸이 가루가 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릉을 내려와 한적한 숲길을 조금 걸으니 이제 아쉬운 숲길이 끝났다

다시 뙤약볕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

길가에 새로 지은 집에 사는 부부가 이불을 들고 나와 빨래걸이 너는 것을 보고

모두들 부러워한다. 나도 저런 집에 살면서 이불을 널고 싶다고..

 

마을에 할머니가 마당에서 말리고 있는 빨간 고추가 무척이나 튼실해 보이지만

폭염에 인삼밭의 인삼 이파리들은 시커멓게 말라 죽고 있어 안타깝다.

폭염은 잡풀을 무성하게 자라게 해 길가의 지저분한 쓰레기통들 덮어 버렸다.

 

맛있는 야콘냉면과 야콘만두, 빈대떡 그리고 야콘 튀김으로 배를 채우고 나와

식당앞의 널려 있는 머루를 따 입이 새까매지도록 먹었다.

 

길정저수지위로 걸려 있는 하얀 뭉게구름이 한 폭의 그림이다.

 

오늘은 그렇게 그림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제 곧 가을이 오면 그 그림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겠지.

 

둑 위에서 내려다보는 벌판이 평화롭고, 잔잔한 수면에 온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