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5코스 (동강 - 수철 간)

carmina 2015. 11. 2. 09:20

 

2015. 10. 30

 

지리산 둘레길 5코스 (동강 - 수철 간)

 

동강마을에서 맛있는 점심으로 포만감을 느끼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5코스 수철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을에 논에는 수확이 모두 끝나 있었다.

밭에는 물이 적당히 있었고 자라고있는 작은 파들은 나처럼 피곤한지

모두 푹 쓰러져 낮잠을 즐기고 있다.

 

아주 멀리 길을 걷는 사람이 보이는 2명이 수철방향으로 가고 있고

빨간 옷을 입고 있는 이는 멀리서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

이 길은 상당히 한적한 길이다.

 

긴 긴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었다.

혹시 지난 번 내가 하루 묵었던 허름한 할머니 집을 찾을 수 있을려나 했는데

유심히 보아도 그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여름철이었다면 이 길 걷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동강마을에서 숲길이 시작되는 방곡마을의 산천함양 사건 희생자 추모공원까지

2km가 넘은 길은 그늘 하나 없는 길이다.

지리산 둘레길도 계절에 따라 적당한 코스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추모기념공원은 지리산 공비토벌하기 위해 나선 국군들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700여명의 민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추모공원 가는 길에 모텔같이 생긴 지리산유는 4년전이나 지금이나

문이 굳게 잠긴 것은 같다. 이 곳에 사람들이 묵기나 하는 것일까?

지난 번에도 이 곳에 묵을려 하다가 주인이 불친절하게 대해

그냥 지나친 적이 있다.

 

이 근처에 조금 특이한 모양의 건물로 민박집이 하나 생겼는데

그 곳도 역시 조용하다. 지금은 휴가 시즌이 아니라 손님이 없는 것이겠지.

공원 앞에 펜션에는 작은 수영장까지 있는데 그 곳도 역시 인적이 없다.

 

추모공원까지 걸어와 시간을 보니 부지런히 걷지 않으면

어두워 지기 전까지 수철마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

기념관들을 관람하는 것은 지난 번에 한 번 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추모공원 앞에서 새로 만든 하천다리을 건너 상사폭포로 올라가는 숲길로 들어선다.

이 숲길에는 나무들마다 이름이 적힌 명패가 걸려 있어 자주 눈길을 주게 된다.

그토록 숲길 많이 다니는 편이지만 제일 부족한 것이 나무와 꽃 그리고 풀들의 이름인데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다.

 

폭포로 올라가는 길이라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작은 공간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어

비록 계곡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때론 가파른 언덕과 때론 짧은 평지의 오솔길이 이어지면서

수없이 많은 낙엽을 밟고 올라간다.

 

지난 밤 잠을 못자서인가 여독이 쌓여서인가 몹시 피곤한다.

다행하게도 미리 물집방지 패드때문에

다른 길을 걸을 때처럼 발에 물집이 잡혀 고생은 덜하는 편이다.

가끔 작은 돌이 많은 길을 걸을 때는 발 바닥이 아프지만

잠시 쉬면서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지압해 주니 곧 좋아지곤 했다.

 

습기가 많은 계곡이라 길가의 돌들도 다른 곳보다 이끼가 더 많이 끼어 있다.

어느 것이 폭포더라. 기억이 없다. 지난 번에 혹시 계곡 물 때문에

폭포가까이 가지 못했던가?

 

그냥 하염없이 걸어 올라가다 쉬고 올라가다 쉬고...

오가는 사람도 없고 잠자리같은 곤충의 흔적도 없다.

다른 길처럼 소나무도 보이지 않고, 보이는 나무는 모두 무채색에 가까운 이파리들이다.

아마 동강마을에서 평지로 추모공원까지 걸었던 거리만큼 올라왔나?

 

물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한참 올라가니 상사폭포로 내려가는 작은 길이 있다.

폭포 근처의 바위에 습기가 많으니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라기에

배낭을 내려 놓고 폭포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고

조심스럽게 걸어 오는데 아차...물이 아닌 낙엽에 미끄러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그 와중에도 카메라가 걱정되어 손으로 움켜 잡았다.

 

상사폭포 사진을 찍고 올라가다가 신기한 바위를 주목.

커다란 바위의 윗부분이 깨진 채로 위의 조각이 그대로 얹혀 있다.

이렇게 깨질 수도 있나?

아주 오래 세월 전에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서 충격으로 조각이 나고

그대로 몇 천만년 지난 것이 아닐까?

 

폭포 위에 작은 쉼터가 있어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마실 수도 있겠다는 희망으로

가 보았지만 문이 잠긴 상태였다.

여기서 언덕이 끝나나 했는데 이 언덕은 쌍재로 올라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쌍재에서 끝날 줄 알았던 언덕도 고동재까지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당초 이 언덕만 넘으면 민박하나 구해서 하루 쉬고

다음 날 오전 남은 길 걷고 오후에 서울 도착하는 계획이었는데 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참 걸어 올라가다 하늘이 보여 이제 다 올라왔구나 하고 올라갈 때 쯤

이전에 걷다가 잠시 쉬웠던 비닐하우스 쉼터를 발견해 조금 쉬고자 했으나

그 곳도 문들 닫아 걸고 영업을 하지 않았다.

 

맥이 풀려 다시 산을 올라가는데 전화 벨.

산속을 오를 때 전화가 안되어 꺼 놓았었는데 정상에 오르니 통신이 가능했던지

산위에 오르자마자 벨이 울린다. 숨이 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니

"몸이견딜수 없으면 포기해" 나는 대답했다.

"내 마음이 원하면 견딜 수 없어도 내 몸이 견뎌야 해. 그렇게 내 몸이 익숙해져야 해."

 

길을 걸으며 옆에 산양초 재배지역에 출입 금지 안내표시와 대나무로 만든 보호대가

자연적으로 무너진 것을 보니 이 곳은 거의 변함이 없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올라오면서 생각하길,

지난 번 역으로 걸을 때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는데

이 길은 역으로 걷는게 편한 것을 알았다.

 

길가에 누군가 잠시 쉬며 땀을 닦고 난 수건을 흘리고 갔다.

아마 저 사람은 앞으로 쌍재와 고동재 올라갈 때 저 수건이 무척 필요했으리라.)

수건에 먼지가 별로 없는 것을 보아 아마 오늘 길을 간 것 같아

챙겨서 혹시 만나면 가져다 주고 싶었지만 나도 지금 무척 힘들어 천천히 걷는 걸음이라

그 사람을 따라 갈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두었다. 누군가 필요하겠지.

 

고개를 들어 보니 커다란 쉼터가 보여 좀 쉴 수 있으려니 했는데

그 마저 문이 잠겨 있다.

밭일을 하는 중이라며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적어 놓았는데

나 하나를 위해 일을 하다 말고 오게 할 수 가 없어 그냥 아쉬움만 두고 지나쳤다.

이 쉼터 옆에서 멋진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의 꼭대기부분이 얼마나 많은 가지를 쳤는지 그야말로 작고한 천경자화백이여

여인의 머리칼을 온통 뱀으로 그린 명화같이 보였다.

 

이제 계곡에서 벗어나 멀리 산들이 보인다.

하늘이 푸르고 작은 구름 몇 점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길의 지명들이 있다.

지리산 둘레길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다 보면 이순신장군 백의 종군길, 뱀사골 둘레길, 동의보감둘레길,

지리산 전설길 등등 금방 기억도 못한 이름을 가진 이정표들이 많이 보인다.

지리산도 둘레길 말고도 걷기 좋은 길이 많으니 그런 길들을 소개할 필요는 있다.

 

폭포를 지나 또 한 참을 걸어 쌍재에 올랐다. 거리를 보니 1.7km

평지라면 멀지 않은 길인데 산길이라면 쉽지않은 거리다.

여기서 고동재까지 넘어 갈려면 또 2.5km를 걸어야 한다.

그런데 벌써 해가 저편 산을 위해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여 발길을 서둘렀다.

이러다 정상에 도착하면 해 질라.. 그러면 낭패다.

아직 해질 시간은 아니지만 산속의 낮 길이는 도심과 사뭇 다르다.

생각같아서는 등산화를 벗고 발 맛사지도 하고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다.

비탈길 올라가는 것도 이젠 힘에 겹다.

다행하게도 비탈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평지와 비탈길이

순차적으로 있어 적당하게 힘의 배분을 했다.

 

어느 정도 올라갔나. 반가운 건물이 보인다.

산불 감시초소. 저 곳이 정상이다. 혹시 감시원이 아직 근무하실까?

지난 번 이 곳을 지나치며 감시원과 만난 이야기를 내 블로그에 썼었는데

한참 뒤에 그 글에 낯모르는 이의 댓글이 달렸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내 글을 보게 되었다며 감시원이 자신의 부친이라고..

참 반가왔다. 감시원 아저씨 계시면 그 이야기를 할려고 한 걸음에 달려

올라갔는데 문이 잠겨 있다. 가을 겨울엔 일찍 내려가신다고 했었는데

벌써 내려가신 것 같아 아쉬웠다.

 

배낭을 내려 놓고 주위를 보니 지리산의 인근 산들이 다 보인다.

천왕봉, 중봉, 진주 독바위, 함양독바위, 팔봉산, 웅석봉 등...

가슴이 시원하다.

해는 천왕봉 정상까지 도달하는데 그다지 멀지 않을 것 같고

어스름 저녁 운무가 산골짜기에 드리워져 있다.

이 곳에 오래 앉아 서늘한 가을바람을 즐기고 싶지만 지금 그럴 여유가 없다.

급히 사진 몇 장 찍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고동재까지 거리는 조금 멀어도 내려가는 길이라 시간은 별로 안 걸릴 것 같아

발바닥이 아프니 혹시 빠르게 걷다가 발목에 무리가 갈까봐 조심조심하며 내려 와야 했다.

 

한참을 내려와 보이는 숲길 저 아래에 도로가 보인다.

이제 안심이다. 해가 져도 도로 걷는 것은 문제가 없을테니...

 

고동재 입구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커다란 장승이 있다,.

그런데 어디선가 녹음된 소리로 산행 안내 멘트가 들린다.

주위를 둘러봐도 스피커가 안 보이기에 장승앞으로 가보니 장승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다.     

누군가 길 바닥에 작은 돌을 주워 한글과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그려 놓았다.

"다근 WANT DO IT" 아마 여자가 쓴 것 같다.

무엇을 남자에게 바라고 싶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둘레길을 찾아올 때 삶의 고민을 가득 가지고 온다.

내가 처음 찾았을 때도 그랬고 지금 내 주위에도 그런 인생의 고민때문에

둘레길을 가겠다고 얘기하는 이도 있다.

둘레길을 힘들여 걷는다고 그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생각은 참 많이 하게 되니 여기서 답을 얻을 수도 있다.

몇 마디 글씨에서 커다란 삶과 인생이 보인다.

 

민박집을 찾아야겠다.

당초 5코스 중간 쯤에 민박을 정하고 마지막 밥을 지낸 후

남은 거리를 오전에 걷고 오후에 서울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는데

그만 중간에 민박이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오늘 5코스를 끝내야만 한다.

그리고 서울가는 버스편이 어찌 될지 모르니 잠만 자고

느지막히 일어나 내일 돌아가는 것으로 했다. 

 

안내판에 계속 보이는 곳에 우선 민박을 정하고 

내려가는 길이 이전의 길과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고 걷다 보니

내가 정한 민박이 이전에 왔을 때 묵었던 집같아 그 집은 별로 마음이 안 내켜

다른 민박집을 찾으려 여기 저기 전화해 봐도 여의치 않았다.

 

등에 땀이 식고, 바람이 살살 부니 한기가 스며들어 얼른 옷을 바꿔 입었다.

고동재에서 수철마을까지 거리가 무려 3.7km. 짧은 거리가 아니다.

이런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발이 계속 아래로만 쏠리니 무리가 갈 수 있다.

계속되는 급한 경사의 세멘트길을 가능한 천천히 걸었다.

 

길 가에 멋진 펜션들이 보인다.

특히 독일식 이름을 가진 펜션은 모양도 독일 고성을 본 따 지은 것 같다.

수철마을에 다가올수록 자꾸 마음이 변한다.

오늘 예약한 곳이 음식도 일반 식당 음식이고 잠자리도 허름하다는 생각에 

오늘 늦더라도 서울로 올라가거나 혹은 가까운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 묵기로 하고

콜택시를 찾았으나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다행하게도

친절한 분이 마침 그 곳으로 가는 길이라며 나를 산청터미널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로써 2박 3일간의 짧은 여정이 끝이 났다.

때론 혼자 걷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과 걷기도 했다.

때론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보기도 하고 때론 그 자연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매번 내게 만족을 주는 지리산둘레길이 내 걷기 인생의 커다란 출발이었다.

 

나는 또 다시 이 곳에 와야 한다.

 

내 인생에 커다란 기념될 만한 일을 위해..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