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9코스 (덕산 - 위태 간)

carmina 2015. 11. 30. 15:28

 

 

2015. 11. 27

 

지리산 둘레길 9코스 (덕산 - 위태 간)

 

서울에는 어제 첫눈이 내리는 듯 말았는데

전라도 산청군 원지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충청도 지역은 눈이 산야를 두텁게 덮어 버렸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혹시 지금 내가 가는 지리산 둘레길도 이렇게 눈이 많이 온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몰라 같이 가는 합창단 친구들에게 아이젠을 챙려 오라 했다.

 

그러나 버스가 몇 개의 터널을 지나 정확히는 모르지만 경상도의

어느 지역을 지나가니 눈의 흔적이 전혀 없다. 다행으로 생각했다.

물론 아직 눈덮인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 본 적은 없지만 호기심은 있었다.

눈 오는 둘레길은 어떠할까?

 

5년만에 다시 찾아가는 지리산 둘레길 9코스

오래 전 떠났던 고향에 돌아가는 듯한 약간의 흥분감을 느끼며 찾아 가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을 통해서 트레킹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 들던 때였다.

한 여름 폭우 주의보에 걷기를 포기하고 돌아갈려다가 그래도 걸어보자 하고

9코스의 중간부터 걷고 비가 너무 많이 와 이어걷기를 포기하고 그 다음날 다른 코스를 걸었었다.

 

늘 혼자 다니던 지리산 둘레길에 이번엔 며칠 전 같이 공연을 끝낸

합창단원 중에서 동행했다. 원지에서 내려 바로 덕산으로 가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그만

동행 중 한 명이 버스에 자켓을 두고 내렸다. 급히 터미널 관리자에게 도움을 청해

이미 다른 지역을 달리고 있는 버스기사와 연락이 되고 곧 자켓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덕산에 있는 맛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던 계획이 원지에 있는 식당에서

맛있는 돼지국밥으로 대신한 것도 좋았다.

 

덕산을 향해 가는 버스가 눈에 익은 남명조식선생 유택옆을 지나고 있다.

오랜 만에 다시 찾은 곳.

신발끈을 조이고 다리를 건너니 나무 밑에 지리산둘레길 안내 서체가 반갑다.

다리를 넘어 건너편 산을 보니 멀리 보이는 높은 산에는 하얀 눈이 아름답다.

길이 변했다. 이전에 덕천강가를 걷는 흙길이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길로 바뀌었다.

송하마을이정표 근처에 다른 둘레길 이정표가 바닥에 나 뒹굴고 있다.

누군가 차로 후진하다가 쓰러트린 것 같다.

보이지 않던 집들이 보이고 이전에 정원에 비행기 모형이 있던 집의 나무들이

키가 많이 커졌지만 비행기 모형은 밖에 세워 두어 그런지 페이트 칠이 벗겨져

낡아 보였다. 넓은 공터에 골프연습장이 들어 서려는 듯 땅을 잘 다듬어 놓았다.

불과 5년의 세월이 이렇게 많은 것을 변하게 하니 앞으로 5년이 지나면

얼마나 더 변할까?

 

문득 길가 숲의 둔덕에 많은 감들이 썩어 문들어져 가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런 안타까운 모습들이 계속 보였는데 나중에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의 껍질을

벗기는 분을 만나 그 사정을 알았다. 감이 문들어진 것은 곶감을 만들 수 없어 모두 버린단다.

그런데 길을 지나가면서 줄기차게 본 모습인데 감을 수확한 나무에는 대개 한 두 개의 감을

남겨 두었다. 이런 것이 까치밥이라는 것이구나. 거의 모든 나무에 예외가 없었다.

그것을 보면서 가슴이 찡했다. 이 곳에서는 사람도 동물도 모두 자연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한 부류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농부들이 일부러 나무들 있는 곳에 감껍질과 먹지 못할 감을 버리는 것은

아마 그게 자연적으로 비료가 될 것이라는 진리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추울 것 같아 겨울 자켓을 껴 입었더니 금방 땀이 나기에 가벼운 옷으로 갈아 입고 하늘을 보니

보기만 해도 공기도 맑은 공간에 흰 구름이 둥실 떠 있어 발걸음도 가볍게 날아 갈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을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찾아 온다.

 

길가에 약수가 있었다. 아니 옥수가 있었다. 약수의 이름이 옥수였다.

이끼가 낀 돌틈에 박힌 작은 관을 통해 졸졸졸 흘러 나오는 약수는 아마 돌 뿐만이 아니라

이끼사이로도 흘렀을 것이다. 이런 물이 진짜 약수겠지.

 

긴 아스팔트길을 걸어간다. 길에 골곡이 없다 보니 발걸음이 빨라져서 그런지

평소와 다르게 발이 신발안에서 불이 나는 것 같다. 이러다 물집 잡히는 것이 아닐까?

 

마을로 들어서니 모든 집들이 사람사는 집인 줄 알았던 집이 모두 곶감 건조하기 위해

만든 창이 터진 집이었다. 도심지의 단독주택들의 창문 블라인드같은 곶감들이

주렁 주렁 달려 있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늦은 가을이라 모든 사물이 색을 잃어가는데

길 가의 시선을 끄는 주렁 주렁 길게 매달린 감들이 색깔이 예뻐 그만 다른 것에

관심을 잃어 버렸다. 마침 감을 깎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기에 인사드리고

옆에 서서 보니 날이 짧은 작은 손 칼로 감을 손으로 굴려가며 껍질을 까는데

껍질 두께가 A4종이정도의 두께로 순식간에 감 하나를 밤톨같이 깎아 버린다.

분명 나이들어 시력도 안 좋으실텐데, 어찌 그렇게 일정하게 감껍질을 벗겨내는것일까?

아마 나이들면 기술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본능적으로 일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중태마을에 둘레길 안내센터는 문이 닫혀 있다. 지리산 둘레길은 12월 중순정도면

가급적 통행제한 조치가 내려진다. 일반 등산로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니

눈이 쌓여도 금방 길이 만들어 지는데 둘레길은 눈이 쌓이면 걷는 흔적이 별로 없어

금방 길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이정표가 자주 잇는 것도 아니니 나도 아직

겨울에 지리산 둘레길을 다닌 적이 없다. 그래서 둘레길 안내센터도 문을 닫는다.

 

이쪽 지리산 마을은 온 가을을 온통 감나무만 매달리는지 다른 농작물을 손을 댈 틈이 없어

썩어 가는 것들도 있다. 마지막 남은 감을 수확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감나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다.

마을에 도무지 인적이 없다. '유령같은 도시'라는 말이 이런 곳에서 사용하는 말인 것 같다.

가끔 공무 때문에 지나가는 승용차나 인근에 작은 회사가 있는지 회사 마크를 부착한 차량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까지 2시간을 넘게 걸었는데도 흙길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모두 나같이 발에 무리를 느꼈는지

길가에서 모두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의 열기를 식혔다. 마을을 지나고 한적한 길로 접어드니

그간 자연의 색이 주홍색 감밖에 없다가 그나마 사라지고 모든 자연은 무채색이 되어 버렸다.

차라리 오늘은 파란 하늘 빛깔이 꽃보다 더 이쁘다. 아마 다음 달은 모든 무채색의 자연이

하늘에 내려주는 하얀 눈으로 덮여 버릴 것이다. 그렇게 겨우 내 잠자고 있길..

그리고 어느 낮은 산의 중간 부분은 모두 죽어 있는 나무로 갈색인데 윗부분만 파릇하게 살아있고

그 윗부분은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이 만나고 있어 정말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중 독야청청한 나무는 사사사철 절개를 지키는 대나무였다.

이틀 내내 걸으면서 대나무에 폭 빠져 버린 이번 둘레길 여행은 대나무들이 어찌나 튼실한지

대나무 숲에만 들어가면 매끈한 대나무를 만지는 것도 좋고, 사람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한 숲에 일부러라도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도 일어 좋았다.

 

작은 언덕을 넘어 가니 숲 속만큼이나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집들이 굳게 문을 닫아 걸고

지리산을 떠난 것 같다. 한 겨울에 지리산의 별장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감옥같을 것이다.

이전에 거센 비를 맞으며 걸었던 길인데도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 때는 아마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없었나 보다.

 

작은 능선을 올라가니 골짜기 바람이 조금 불어서인지

몸에 다시 한기가 돌아 벗었던 자켓을 다시 껴 입었다.

앞서 걸어가는 부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같이 보조를 맞추어 걷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대개 남녀가 걸으면 남자가 빨리 걷고

여자는 힘들다고 뒤에 처져 걷는데 이 두 분은 산티아고 800km  트레킹을

같이 한 사람이고 같이 여행을 좋아해서인지 같이 걷는 뒷 모습이 무척 보기 좋다.  

이번 여행에도 부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어깨를 같이 하고 걸었다.

 

길 옆에 작은 돌에 써 있는 길이 인상깊다.

2005년 이 길을 포장한 기념비에 '사랑의 길잇기'라고 제목을 붙이고

'우리가 걸은 이 길 위에서 다른 이들이 그리던 꿈이 한걸음 다가가길 바랍니다.'

이 길에서 사랑이 싹트고 우정이 깊어진다.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고

사람들의 이야기마당이 이어지고 삶이 공유된다. 그것이 길의 존재이유다.

 

산과 산이 겹치고 커다랗게 V자로 이루어진 계곡에 파란 하늘이

흰 구름을 머금고 있다. 여름같으면 신록이 우거져 파란 하늘 빛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을텐데 겨울이라 나뭇잎이 빛을 잃고

말라져 가는 숲위의 하늘이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낙엽치 가득 쌓인 임도가 계속 이어지는 길이 멀리까지 보인다.

우리가 오늘 걸어야 할 길이다. 문득 시간을 보니 우리가 너무 빨리

걸은 것 같아 걷는 속도를 줄이기로 했다. 해지기 전까지 걷고

그 곳에 숙소가 있다면 가능한 더 멀리 가겠지만 오늘 숙소가 이미 정해졌고

그 곳에서 하루를 묵어야 하니 굳이 서둘러 걸을 필요가 없다.

 

임도가 끝나고 산길로 접어 들었다.

문득 산길 저 멀리 하얀 줄이 얼기설기 그림을 그린 것같이 펼쳐져 있다.

가까이 가서야 바닥에 쌓인 눈은 녹고 쓰러진 나무위에만 남아 있어만

하얗게 남아 있어 마치 바닥에 흰 페인트로 선을 그은 것같이 보여졌다.

 

지리산둘레길 이정표는 어느 곳이나 형태가 정해져 있는데 유점마을을 지나

조금 이상하게 생긴 이정표를 발견했다. 둘레길을 걸을 때는 가끔 부근의 식당이나

다른 코스들의 안내기둥을 둘레길 이정표와 비슷하게 만들어 자칫 길을 잃은 경험이

있어 이상하게 생긴 이정표는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한다.

 

재를 넘어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낙엽이 수북하여 이 길에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비탈길의 디딤돌 바위들도 모두 낙엽에 덮여 버렸다.

더욱 조심스럽게 걸어야 미끌어지지 않는다. 다행하게도 어렴풋이나마 길의 흔적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눈이 많이 쌓였다면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아직 지리산 둘레길 중 인기가 없는 코스에는 나무에 단체등산팀들이 달아 놓는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낙엽길을 한참 걸은 후에 눈에 익은 대나무 밭에 도착했다.

양 옆으로 통이 굵은 대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사이에는 대나무 이파리들이 푹신하게

깔려 있다. 시간이 충분하니 대나무밭으로 들어가서 쉬어볼까 하고 숲으로 들어가니

오랜동안 이파리들이 쌓여 썩지 않고 게속 쌓이고 쌓여서인지

엉덩이를 대고 앉으니 너무 푹신해 오히려 앉기에 불편했다.

그 숲 사이에 앉아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대나무 숲 끝지점에는 의 '갈치재'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제 위태마을가지 거의 다 온 것 같아 우리 일행은 이 곳에서 한참을 쉬며 수다를 떨었다.

오랜 세월 같이 지내서인지 생각이 같고 사고방식이 비슷하니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만약 서로의 아내들이 있었다면 더 오랜동안 앉아 있었을 것이다.

 

마을로 내려가는 오붓한 길을 걷다가 문득 바닥에서 물방울 보석을 발견했다.

이미 낮이 한참 지났고 오후에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길가에 떨어진 낙엽위에 물방울이 마르지 않고 그대로 남아 물방울 그림의 전문가인

김창열 화백이 그린 그림처럼 물방울에 명암이 뚜렷한 그림자가 드리어져 있다.

 

언덕 아래 끝에는 하늘빛을 담은 시골집 마당만한 작은 호수가 구름을 품고 하늘을 품고

산을 품고 숲을 품고 있다. 멀리 지리산의 형제들이 서서히 멀어지고 있고 희미해진 산들은

아득하게 구름너머로 사라지고 있다.   

 

넓은 벌판에 볏짚을 말아 놓은 흰 색 곤포사일리지가 군데 군데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곧 마을이 보일 것이다. 민박집 안내표시가 보이고 오늘 묵는 위태마을 민박집에서 가꾸는 텃밭도 있다.

위태마을에는 인근 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을 담은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관리를 잘해서인지 저수지 주변이 깨끗하고 길가 버스 정류장 옆에는 이쁘게 지은

화장실도 보였다.

 

오늘은 여기서 걷기 끝.

저녁에 묵은 위태마을의 '하늘가애'라는 민박집은 내가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서

유일하게 몇 번 묵은 집이다. 어느 폭우가 오던 날 이틀 묵을 때 참 친절하게 해 주고

같이 묵는 길벗들끼리 좋은 시간도 마련해 줘 그 다음에 아내와 같이 여수엑스포에 내려

갈 때도 둘레기를 한 코스를 걸으면서 이 집에 묵었었다. 그 때는 같이 하루를 지낸 손님 중에

전주의 옛길을 개척한 분과 대학에서 레크레이션을 가르치는 분이 같이 묵어

저녁시간을 아주 즐겁게 지내기도 했다.

 

'하늘가애'에서는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식사의 재료들을 모두 직접 키워 제공한다.

오늘 예약을 할 때 내가 특별히 지리산흙돼지 구이를 주문하여 즐거운 식사를 할 때

곁들인 야채는 금방 텃밭에서 따온 싱싱한 야채들을 같이 먹어 모두 즐거워 했다.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선생님이 조상대대로 이어 내려 온 시골 집을 개축하여

주말이나 방학동안에 민박을 하였고 이제는 민박집 위에 예쁜 펜션을 지어 펜션사업을

아내와 같이 하고 있다. 우리에게 특별히 펜션을 내주어 같이 걸었던 친구들과

편하게 저녁을 지냈다.

 

저녁 식사 후 밤공기가 서늘한 저녁에 하늘의 별은 환한 보름달에 빛을 잃어 겨우

볼 수 있는 별은 오리온좌 뿐이었다. 아마 새벽쯤엔 다른 별도 많이 볼 수 있을텐데

그만 새벽에 일어나지 못했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