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57) - 캠프 송 아가씨들아

carmina 2015. 12. 16. 15:58

 

 

캠프 송 아가씨들아 (폴랜드 민요)

 

산새들이 노래한다 ~ 수풀속에서(랄라 ~라)
아가씨들아(랄라 ~라) 숲으로 가자(랄라라랄라)
우리 들은 아름 들이 나무를 찍고 (랄라 ~ 라)
아가씨들아 (랄라~라)풀을 매어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트랄랄라
랄랄라 랄랄라 랄랄라 랄라~

 

대학에서 공과대학 화학공학을 전공한 나는 

졸업 하기 한달 전 부터 여의도에 있는 플랜트 전문

C 엔지니어링 회사에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 회사는 일반 토목 건축회사가 아니고

정유공장이나 화학공장같은 플랜트 건설을

주로 하는 회사였기에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유명 공과대학 출신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주로 외국회사들과 거래를 하거나

해외에 공장 건설을 하였기에 

모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도 잘해야 업무가 가능했다.

 

당시만 해도 모든 설계도면은 모두 직접 큰 제도판 위에

종이나 트레싱 용지에 그려서 작업을 했는데

이런 일은 주로 영어에 자신이 없지만 그런 기술을 배운  

전문학교를 졸업한 남자들이나 아가씨들이 전문적으로

세밀한 도면을 그리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드래프팅 인원이 몇 백명에 달할 정도로

우리 나라에서는 알아주는 회사였다. 

 

그러나 사업주를 만나고 영어나 일본어로된

서류를 읽고 이해하고 공학 계산을 하고

도면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일은 모두

공과대학을 나온 남자들이 하였기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각 부서마다 존재하였다.

당시만 해도 여의도에는 식당이 거의 없어

그 들은 싸온 도시락으로 식사도 따로 모여 하고,

저녁 회식도 따로 하였다.

   

입사를 하고 2개월 정도 지나 따뜻한 봄 어느 날.

자료실 근무하며 사우회장을 맡은 상관이 나를 불렀다.

자신이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내가 대학시절 인천에서 싱얼롱과 레크레이션을

많이 한 사람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회사에 들어갈 때 면접시에도 나의 이런 활동이

임원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아 같이 면접보러 갔던

우리 과의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모두 탈락시키고

나만 합격한 것도 알고 있었다.

 

사연인 즉

봄에 회사 전체 야유회를 가는데

대학졸업한 사원들과 전문학교 졸업한 사원들과의 괴리가 커서

사사건건 업무 트러블이 있고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으니 

융합을 위해 나 보고 친목을 위한 야유회 프로그램을 

진행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것은 요청이 아니고 지시였다.

 

서로 마주 대할려고도 하지 않은 그들의 화합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제 갓 입사한 내가 기타를 메고 야외에 나가

서로 같이 박수치며 모두 잘 아는 포크송 노래를 하고

두 그룹을 섞어 조편성을 하여 게임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 들은 서먹하던 사이를 게임의 우승을 위해

이마를 맞대고 작전을 짜고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종일 흥겹게 놀았다.

 

그 이후 그 들은 사무실에서 도시락도 같이 먹고

같이 술도 마시며 회사 분위기가 바꿔 놓았다.

내게 레크레이션을 부탁한 상관도 내 덕분에

회사 생활이 많이 밝아 졌다고 고마와 했다.

 

그러나 당시의 중동지역의 이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수행중이던 프로젝트들이 중단되고 회사가 자금압박을 받아

결국은 그 다음 해 다른 대기업으로 매각되었지만 

직장생활이 거의 마무리되는 지금도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또 내가 지난 30년간 거쳐간 엔지니어링 회사에는

그 들이 중견 사원이나 임원이 되어 있었고 

연필이 아닌 컴퓨터로 도면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까지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해외에서 주로 수주하던 단순 토목 건축 공사들을

80년대 후반부터 중동의 현지업체들이나 외국의 후발 기업들에게

자리를 내어 줄 때 일본 업체들이나 유럽 업체들이

독식하던 해외 플랜트 프로젝트에 국내의 엔지니어링 회사들이

전 세계의 초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외화를 벌고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하며 이제는 일본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쟁력으로 다른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과를 내고 있다.

 

내가 처음 다녔던 C 회사는 엔지니어링 업체의 사관학교라

불릴 정도로 체계적으로 일을 하여

그 곳의 경력이 있으면 어느 동종 기업에서든 인정을 해 주었었다.

 

나 또한 그 곳의 경력으로 지난 직장생활동안 사정이 있어

회사를 그만 둘 때 다른 동종의 대기업에 쉽게 이직할 수 있었다.

 

내가 젊은 시절 가장 즐거움을 가지고 하던 일들이 나의 앞길도

탄탄대로로 만들어 주었다는 계기가 되어 늘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