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비오는 겨울 (18코스 왕골공예마을 가는 길)

carmina 2015. 12. 28. 10:17

 

 

2015. 12. 26

 

버스를 타고 김포를 지나며 길 양옆의 벌판이 눈에 가득 덮여 있다.

가슴이 설레인다. 오늘 눈길을 걸을거야

배낭 밑을 더듬거려 아이젠이 있는지 확인해 보다가

스패츠를 잊고 온 것이 걱정되었다.

크리스마스날 저녁에 눈발이 조금 날린 것 이외에는

도심지에는 전혀 눈이 쌓여 있지 않기에 눈쌓인 길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다.

 

고인돌 기념관 앞에 모이니 이 추운 날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오늘 일년의 마지막 송년걷기라 평소 잘 안보이던 얼굴들이 보여 반가왔다.

아내 혼자 걸으러 보내는 것이 안타까와 따라 나온 남편,

친구따라 등산배낭도 없지만 대충 캐쥬얼배낭 메고 따라온 친구.

평소 아들하고 같이 걷던 분도 날이 추운지 아들 대신 남편이 따라오고,

그런가하면 어머니를 모시고 온 분도 있다.

 

오늘은 18코스를 역으로 걷는다.

거대한 고인돌위로 하늘에 희미한 구름이 가득해 희미하게 보이는 태양이

마치 어제 저녁 보였던 럭키문이라는 커다란 보름달같이 보인다.

음산한 날씨. 눈이라도 금방 쏟아질 것 같다.

눈오는 숲길을 걷는 기분을 도심 사람들은 알까?

 

어차피 얼어 붙은 길. 어디나 길이다.

이정표따라가는 길도 있지만 그냥 마구 눈쌓인 논 벌판으로 걸어 들어가

스포츠머리처럼 겨우 밑둥이 남아 있는 볏자리들을

밟으며 와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둔덕을 넘어서니

커다란 나무가 가득차 있는 숲길을 나타난다.

아무도 걷지 않은 듯.

길은 눈길이나 낙엽길이나 발자국하나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길이 있는지나 알까?

드라이브 하며 강화가 한 번 휘 둘러보고 좋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강화도의 진면목을 10프로만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차에서 내려 바로 10미터만 안으로 들어오면 강화가 정말 좋다 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

 

이 곳은 고인돌이 많이 있는 곳이라 숲 속 어디서나

고인돌 유적지가 보인다. 그냥 커다란 돌 하나에 불과한 것이라도

고증을 거쳤는지 철 울타리를 쳐 놓았다.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끝이 보이는 나무들에서 무언가 떨어지기에

앞에 걷는 사람의 모자에 보니 작은 싸래기 눈이 떨어져 있다.

이제 눈이 올려나 보다.

낙엽이 두텁게 덮여 있어 목이 짧은 트레킹화를 신으면 양말속으로

눈이 들어갈 것만 같다. 다시 한번 스패츠 안 가지온 것을 후회해 본다.

 

숲 길 옆에 축사가 있는 듯 냄새가 고약하게 코를 찌른다.

그런데 왜 내겐 그 냄새가 향기로울까?

마치 과일의 왕이라는 두리안을 먹을 때 나는 냄새같이 처음엔 역겹다가

마음에 냄새가 들어오니 내 몸에 꼭 맞는 냄새인 것처럼 느껴진다.

 

비스듬한 길을 어느 정도 올라 왔는지 멀리 보이는 마을이 하얗게 눈이

덮여 있어 시골의 전형적인 풍광이 눈 앞에 펼져진다.

내가 좋아하는 가곡 '고향의 노래'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국화꽃 져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뭇서리 내리고...

아아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 보라..

산골짝 깊은 곳 초가마을에...

고향 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숲길을 한 참 걸어 마을길로 나오니

어?  비가 온다.

작은 가랑비라 굳이 우비를 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기 저기서 길벗들이 우산을 펼쳤다.

뭐... 이 정도야 내 고어텍스 등산복이 막아 주리라.

 

벌거벗은 나무들이 숲 속에서 집단으로 춤추는 곳의 사이 사이를

울긋불긋한 색들이 열을 지어 바늘 귀에 실 꿰듯이 꿰뚫어 가고 있다.

황금색 낙엽이 깔린 누비 이불에 색실로 수를 놓는 것일까?

학이라도 한 마리 그려 놓는 듯 온갖 색실들이 눈덮인 낙엽을

이리 저리 스쳐 지나가고 있다.

 

비가 오니 나는 젖어도 되지만 카메라가 젖으면 안 될 것 같아

품속에 넣으니 이젠 마음으로 느끼며 걷는다.

마을길 삼거리에 커다란 소나무가 잔가지 없이 겨우 버티고 서 있다.

비도 오고 쉬기도 불편하니 그냥 걸을 수 밖에 없다.

 

숲을 지나니 지리한 시멘트길을 걸으며

아마 이 코스가 나들길 20개 코스 중 시멘트 길이 제일 길어

지루한 곳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도로로 나오는 지점 쯤에 강화도의 거의 북쪽에 있는 화문석 문화관이 있다.

강화주민은 무료입장이지만 타지인은 1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이미 한 번 들어갔던 곳이기에 일행들을 밖에서 기다렸지만

왕골로 만든 아름다운 화문석 작품들이 많아 집 안에 저런 작품하나

걸어 놓으면 주인의 고상한 품격이 조금 돋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문화관을 나와 가는 길에 어느 집 앞 나무를 잘 다듬어

사람얼굴을 만들어 놓아 지나가는 이들에게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다  

도로 옆에는 송해면의 넓은 벌판이 끝이 안 보일 정도다.  

이 곳을 가을에 걸었다면 아마 넘실거리는 황금물결에 모두 좋아했을 것 같다. 

 

바닷가 철책선 인근에 고종이 강화로 피난왔을 때 건너왔다는 곳에

고종사적비에 모여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멀리 군인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사진찍으면 안된다고 경고를 준다.

 

점심은 마을회관에서 준비해 준 맛있는 집밥을 먹고

다시 도로를 따라 걷다가 작은 개천을 따라가는 마을길로 들어 서니

멀리 허리가 불편한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이 걷는 모습이

한 편의 실루엣이다.

 

이 곳도 개발이 한창인 듯, 혼자 왔으면 길을 찾기 힘들 것 같은

작은 길을 따라 가니 누군가 '고라니다' 라고 소리치기에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 가니 자세히는 안 보이지만

무언가 숲 속에서 뛰어가며 언덕으로 금새 사라져 버렸다.

 

길이 질퍽하다.

비는 그쳤는데 눈이 비에 녹고 얼어 있던 흙이 녹아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양오 저수지길을 따라 걷는 아스팔트 길의 호젓함이 좋다.

달 밝고 날씨 좋은 날 이 곳에 연인과 팔장을 끼고 천천히 걸으면 좋을 것 같다.

수면에 잠긴 건너편 낮은 산의 그림자가 멋진 데깔꼬마니의 영상이 되어

마음에 근심이 있는 날 이 곳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 질 것 같고

작은 바람이라도 부는 날 그 곳을 멍하니 바라보면 내 마음도 흔들릴 것만 같다.

 

저수지에 오리들 몇 마리가 헤엄치고 있기에 또 내 장난기가 발동하여

우선 카메라를 오리 떼 맞추고 커다란 목소리로 훠이 하고 소리 지르니

오리들이 물을 박차고 날아가는 모습에 얼른 셔터를 누른다.

 

저수지 끝에 쯤에서 다시 마을길로 가는데

길게 이어진 이 길은 마치 지리산 둘레길 일주를 할 때

수없이 많이 본 마을길의 한 장면 같다.

마을 끝에 어느 집에 재미있게 그려 놓은벽화가 주인의 모습이라면

그 집은 분명 행복한 가정일 것이다.

 

그 마을 길을 지나 이젠 차가 다니는 도로로 나와 오랜 동안 걸어야만 했다.

물론 차가 다녀도 사람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해 놓아 길 걷기에는

문제가 없다. 길 옆에 어느 마을은 휘트니스타운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보아

아마 어느 동호회 사람들이 특별히 계획한 마을 같이 오래 된 집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모두 한결같이 비슷한 모습의 주택들이다.

 

오래 전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이런 마을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하여

어디에 다세대 주택을 지을 것인지 알아보기도 하고

각 가정의 평수를 어느 정도 할 것인지도 구상해 본 적도 있었는데 

아마 그 때 이런 시골을 보고 그런 구상을 했으면

각 가정을 단독가옥으로 결정해 쉽게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젠 봉천산으로 올라가는 마을길로 들어가니

거의 사람이 살지 않거나 오래된  낡은 집들이 많다.

그런 낡은 집 건너편에는 도시사람들이 별장인 듯 잘 지어놓은 집도 있어

그런 집들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했지만 아마 이웃의 감정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철망울타리에 내 느낌이 맞다는 듯 수세미열매들이 썩어서 문드러지고 있다.

  

그런데 비록 지금 시간에는 인적 없는 곳이지만

어느 집마다 모두 개를 키우고 있어 사람의 냄새가 난다.

 

숲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할머니 모습을 닮은

석조여래입상이 있는 작은 누각이 있어

아주 큰 돌에 부처님을 음각해 놓은 입석을 관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 마을 빨래터에 한 여인이 가 담겨진 함을 발견하여

임금께 바쳤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봉우라 짓고 그가 자라서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한다. 그래서 임금이 봉(奉)라는 성을 하사하여

봉씨의 시조가 되었다 하고 이 곳에 있는 산이 봉천산이다.

그래서 이 곳에 함이 있었다 해서 하음면라 이름붙여지고

지금 하점면의 마을이름이 하음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이 곳에 다른 코스에 있는 코스스탬프 박스와 조금 다른 새것이 세워져 있는데

작은 문을 열어보니 아직 스탬프를 가져다 놓지 않은 듯 깨끗하다.

나들길을 처음 걷는 사람들이 길을 찾기 힘들다고 해서

군청에서 여기 저기 많은 돈을 들여 이정표를 세워 놓았는데도

워낙 개발이 빠른 지역이라 길이 없어지거나 새로 생겨

고충을 겪는 것 같다.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누각옆에 작은 계곡에 다니기 쉽도록

예쁜 나무 다리도 만들어 놓았다.  

낙엽이 가득하여 오솔길의 흔적이 없어진 작은 언덕을

나들길 이정표 리본을 따라 가니 오층석탑에 도착해 잠시 쉬고 하산.

몇 명은 약 290m 높이의 봉천산을 등반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포기하는 듯 했다.

 

이제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길로 접어 들고 마을을 지나는데

어느 집 마당에 있는 목련나무에는 요즘 날이 따뜻해 정신을 잃어버렸는지

꽃망울들이 생겨나고 어떤 개나리나무는 자그마하게 노란 빛을 머금고 있다.

 

멀리 우리가 출발했던 강화역사박물관의 모습이 보였다.

그 길에 작은 하천에는 예년같으면 꽁꽁 얼어붙은 수면위에

구멍을 뚫고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있었을텐데 오늘은 얇은 얼음이

겨우 수면을 덮었을 뿐이다.

 

눈이 많이 와야 하고 추워져야 하는데..

그래야 겨울이고 그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올 한 해도 나들길을 참 많이 걸었다.

나들길을 걷는 동안 나는 건강한 몸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4년전 이 맘 때 쯤 나는 길벗들에게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하고 기약없는 작별의 인사를 했다.

건강 검진 중 우연히 발견한 내 몸의 암덩어리를 발견하고

수술을 앞에 두고 있었기에 어쩌면 이 길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나들길 뿐만이 아니라

더 길고 힘든 길을 갈 수 있는 건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건강할 때 자주 걸으리라.

그러면 내가 분명 다음 길도 쉽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어 가듯,

내 삶의 작은 순간들이 모여 내가 가장 즐거운 일을 하며

오래 오래 살 수 있으리라.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