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60) 부모

carmina 2015. 12. 31. 13:08

 

 

부모 (소월 시, 서영은 곡)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 정을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다 생겨 나와

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을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 보리라

 

 

한 해의 마지막 날. 

내일이면 내가 60년전 태어난 해인 10간 12지로 계산해서 병신년이다.

어릴 때 내가 태어난 해가 무슨 해냐고 물어 보면

나는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입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벌써 환갑이라니..

나도 모르게 참 많은 세월 흐른 것 같다.

어머니 무릎 앞에 앉아 양 손을 벌려 손에 털실을 감으며

뜨게질 하시는 것을 도와드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나는 어쩌다 생겨났을까?

부모님은 내가 여자로 태어나길 바라셨단다.

위로 아들 3명과 딸을 하나 낳으셨으니

내가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러나 내가 아들이니 딸을 낳고 싶어 내가 세상에 나온 뒤에도 애를 쓰셨으나

내 밑에 동생 두명은 모두 아들이다.

그래서 그런가 내 성격은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여성적이다.

 

나도 어느 덧 부모가 되어

늘 두 명의 자식들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데

어머니는 무려 7명이나 되는 자녀를 위해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약도 병원도 변변히 없던 시절에

아프기라도 하면 포대기에 싸 안고 동네 병원으로 달려가셨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쩌다 소홀히 하는 자식도 있었을 것이다.

 

늘 아이들의 옷들을 대물림하여 기워서 입히셨고

겨울이면 특히 수백포기의 김장을 하면서 늘 손이 얼고 불어서

퉁퉁한 어머니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동네에서 김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하는 공장에

잠시 일을 나가시며 가끔 가져 오시는 과자처럼 두터운 김은 어찌나

맛있던지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또 때론 어묵만드는 공장에도 다니시며 가져오신 어묵의 고소함을 잊지못해

나는 아직도 어묵반찬은 그 어느 반찬보다 좋아한다.

 

해마다 1월 1일이면 동사무소에서 우리 집까지 선을 연결해서 틀어주는 라디오로

어머니랑 따뜻한 방에서 장화홍련전을 듣고, 흥부전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왜 그 기억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을까?

 

어머니와 정말 많은 기억들이 있는데,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

억지로 잊고 싶은 기억도 있고...

어머니는 자식들이랑 어디 놀러 가는 것은 안 해보신 것 같다.

평생을 집을 떠나지 않으셨고 평생을 가족을 위해서 사신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때 내가 어쩌다가 도시락을 잊고 학교에 갔었는지

교실의 창문을 통해 내게 도시락을 전해 준 기억도 있고..

사진이 흔하지 않던 때라 그런 기억을 담아 둔 매개체가 없어

가족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중고등학교시절엔 6년동안 여름과 겨울방학도 없이

거의 매일 학교 보충수업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집에서 가족과 지낸 기억이 별로 없다.

고 3때는 내 건강을 위해 아침이면 뜨끈한 순두부사다가

따뜻하게 밥먹고 가라고 할 때가 참 좋았다.

 

그래도 제일 기억 많이 나는 것이 군시절인 것 같다.

입영하던 날 안양에서 내가 군용열차를 타고 떠날 때

기차 옆에서 눈물 흘리며 손을 흔드시던 모습.

내가 전방부대에서 산골짝 깊은 곳에서 벙커작업을 할 때

그 곳까지 면회를 오신 어머니가 내 등에 묻은 땀에 얼룩진 흙더미를 보시고

그날 밤 낯선 지방의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하루 잘 때

눈물흘리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잠시 외출 때 내가 함께 데리고 나온 지방출신 졸병에게 아들같이 잘해주시던 모습.

 

그래서인지 결혼해서도 TV에서 주말마다 하는 장병위문프로그램시

'엄마가 그리울 때 엄마사진 꺼내 놓고..' 라고 시작되는

어머니를 찾는 코너만 나오면 나는 가족들 모두 방 밖으로 내 쫒고

혼자 TV를 보며 눈물 지었다. 

 

1981년 나로 인해 과로로 인하여 중풍으로 쓰러 지신 후

8년 간을 불편한 모습으로 혼자 사시던 안타까운 모습.

불편한 어머니를 뒤로 한 채 해외근무를 위해 사우디로 나갈 때

혹시나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못할까봐 서로 걱정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늘 밝은 얼굴로 결혼 후 주말마다 집에 가는 나를 반기셨다.

 

아들이 교회다니며 여자들과 어울려 '연애질'이나 하고 

공부보다는 '아가리 벌리며 돼지멱따는 소리'로 기타치며 다니는 것을 걱정하셨으나

아들이 그렇게 노래를 좋아해서 평생 즐겁게 살고 있고

젊은 시절 놀러다니기 좋아해서 배낭메고 떠나는 것도 걱정하셨지만

아들이 그런 감성을 가지고 세상에서 마음껏 날개 펴고 다닌 것을

아마 절대 모르셨을 것이다.

 

나는 부모로서 내 자식들에게 어떻게 비쳐질까?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