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62) 섬마을 선생님

carmina 2016. 1. 6. 13:45

 

 

섬마을 선생님 (작곡 박춘석, 이미자 노래)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철새따라 찾아 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구름도 쫓겨가는 섬마을에

무엇하러 왔던가 총각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시름을 달래보는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좀처럼 트롯트를 부르지 않는 나도 이 노래는 가끔 흥얼거린다.

내가 평생 좋아하는 하나밖에 없는 우리 누님이 어릴 때 부터 좋아하던 노래기에..

 

6남1녀의 대가족.

1950년대 아직도 남존여비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한 아버님은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고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초등학교만 보내고 중학교를 보내지 않으셨다.

 

어머니 한 분이 많은 대가족을 건사하기 힘드셨을테니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부모님께 딸 공부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들어 보지 못했으니...

 

누님은 어릴 때 부터 집에서 하는 수산업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셨다.

일을 하시다가 배우고 싶은 노래만 나오면 옆에 메모장을 하나 두고

급히 가사를 적어 내려가셨다.

그런 노래 가사가 적힌 노트장이 몇 개가 되고

누님은 그 노트장을 보고 늘 흥얼거리시며 즐겁게 일하셨다.

 

그렇게 해서 번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누님은

대학생이던 큰 형님의 용돈과 담배값을 대셨고

내게도 늘 신경을 쓰셨다.

 

나는 누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른다.

어릴 때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모두 챙겨준 분이 오직 누님이었으니까.

유독 형제들 중 나만 교회를 다녔기에 모두 미워하셨는데

누님만은 그런 나를 좋아하시고 몰래 몰래 도와주셨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이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 부터 교회를 다니고

중학교를 올라갔는데 대부분의 친구들이 번듯한 성경과 찬송가를 지니고 있었지만

내게는 중등부 올라갔다고 선물로 주어진 공짜 기드온 성경책 한권외에는 없었다.

중등부 올라가니 초등학교 때처럼 궤도에 가사를 써 놓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고

모두 자기가 가진 찬송가를 보고 찬송을 부르는데 난 그게 없으니 심한 열등감을 가졌다.

 

그렇지만 내가 교회다니는 유난히 싫어하시는 부모님께 찬송가 사달라고 할 형편도 못하고

늘 소심하게 지내는데 어느 날 내 머리맡에 누님이 찬송가 한 권을 내 선물로 놓아두셨다.

그처럼 행복했던 때가 있을까?

누님은 내가 중학교 올라가서 쓰라고 만년필 두껑에 A자가 선명한 APIS 만년필도 사주셨다.

본인은 그렇게 못하지만 동생이 어디가서 기죽지 않도록 배려해 주신 누님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중고등학교 때도 틈틈이 용돈을 조금씩 집어 주시고

대학교 들어가서도 내 용돈은 거의 모두 누님이 조금씩 대 주셨다.

 

군대를 다녀 오니 식구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다.

형님들은 결혼하거나 지방 직장으로 나가고 동생은 군 복무를 하게 되니

집에 방이 남아 어머니는 인근의 직장 다니는 청년을 하숙을 시켰다.

그런데 이 하숙하는 사람이 얼마나 막걸리를 잘 먹는지 늘 술에 쩔어 다녔다.

어느 날은 나를 데리고 인천극장앞에 색시집에 데리고 가 술을 사 주었는데

내 눈에 그런 모습이 심히 안 좋아 보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하숙생이 우리 누님을 좋아하고 있었다.

누님은 키도 작고 얼굴도 참 안생기셨는데 괜히 누님을 희롱하는 것 같아

어느 날 내 방에 있는 하숙생 짐을 모두 꾸려서 밖으로 내 놓았다.

'우리 누님께 상처주지 말고 당장 이 집을 떠나라'고...

그런데 어머님이 극구 말리셨다.

알고보니 어머니는 그 하숙생을 사윗감으로 찍어 놓은 뒤였었다.

누님의 학벌도 얼굴도 재산도 그리 내세울 것이 없으니

누군가 좋다하면 마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만히 보건데 그 하숙생이 술은 많이 좋아하지만

성격이 바르고 무척 겸손하여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누님에게 섬마을 선생님같은 분이 나타난 셈이다.

 

결국 누님은 그 분과 결혼했고 두 아들 낳고 잘 살고

성실한 매형도 나를 잘 챙겨 주셨다.

지금까지 가장 친한 형제로 지내고 있다.

 

결혼 후 맞벌이 하느라 애를 낮에 돌보지 못하니

아내대신 누님 댁에 주중에 돌봐주고 주말에 데려 오기를 몇 개월 하기도 했다.

누님은 참 정이 많았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과 친척들의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셨다.

 

나이 들어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 인정시험도

합격하신 것을 보면 만약 누님이 어릴 때 부터 공부하셨다면 무척 잘 하셨을 것 같다.

그 모든 노래들의 가사를 모두 외워 노래하시는 것을 보면

누님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대충 짐작이 된다.

 

군시절 훈련소에서 처음 누님 편지를 받고

겉봉투만 보고도 얼마나 울었던지..

그 편지를 읽을 때는 얼마나 더 울었는지 짐작이나 할까?

 

결혼 후 생전 겨울에 김장을 하지 않는 아내를 위해

늘 배추 몇포기 더 해 우리 집에 주시고

어쩌다 누님 댁에 놀러가면 아내 손에 이것 저것 반찬꾸러미를 가득 챙겨나왔다.

나는 누님 댁에 가면 어머니의 반찬 맛을 볼 수 있어 늘 행복하다.

 

그런 누님을 위해 누님의 환갑잔치를 형제들 모두 모여 우리집에서 할 때

비용 일체를 누님에게 드리는 선물로 모두 내가 부답했다. 

 

내겐 어머니만큼이나 큰 사랑을 누님에게서 받으며 자랐다.

 

 

(셋째형, 고등학교 졸업한 나, 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