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64) 선구자

carmina 2016. 1. 14. 11:24

 

 

선구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는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때
사나이 굳은마음 길이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초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내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 준 분이

우리 큰 형님이다.

나와 11살 차이나니까 아마 내가 초등학교 시절엔 형님은

대학교 다니셨을 것이다.

 

어느 날 내게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을 제목도 안 알려 주고

다 들려 주시고는 무슨 느낌이냐고 내게 묻기에

무언가 조금 무섭다는 느낌이 든다 했더니

내가 음악의 느낌을 안다고 말하시기도 했다.

그런 큰 형님이 자주 부르시던 가곡이 선구자였다.

이제 생각하니 형님은 그다지 잘 하신 것 같지는 않았고

오히려 형님의 친구분이 더 노래를 잘 하셨다.

 

초가집이던 우리 집이 어느 날 소방도로 계획에 밀려

토지의 반을 시에 매각하고 그 돈으로 2층 양옥집을 지었다.

당시에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제일 먼저 현대식 집을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다지 잘 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전축을 사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층 마루에 그럴 듯한 스피커 일체형 전축을 사고

형님은 가끔 베토벤의 심포니와 슈베르트의 가곡과

한국가곡을 듣곤 하셨다.

내게 어린 시절 합창의 주제곡인 환희의 송가를 가르쳐 주기도 했고..

아울러 둘째형은 팝송을 좋아해서 톰 존스의 유행곡을 자주 틀어줘

따라 하기도 했었다.

 

그런 팝송을 귀 동냥으로 듣고 따라 하다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홈룸시간에 그만 반장이 나를

외국 팝송을 부르고 다니는 불량학생으로 비판해

앞에 나가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머리를 조아린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어이없는 비판이다.

아직도 키가 크고 피부가 히멀건한 반장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6남 1녀의 형제들 중 장남인 형님은

가난했던 시절 부모님께 대학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사정 사정해서 대학을 입학했으나 아버님은 입학금만 대주셨기에

형님은 어쩔 수 없이 낮에는 동네 아저씨가 운영하는 철물점에서 일하고

야간대학을 다니셨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공군 전역 후 복학한 형님은

나에게 그야말로 스파르타 식으로 공부를 강요하셨다.

학교에서도 성적 나빠서 선생님에게 맞고 오면

집에 와서는 큰 형님에게 또 맞아야 했으니

나는 정말 공부가 죽기보다 싫었고

형님이 군대에서 배워 오신 얼차려를 나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다 받아 보았다.

 

형님은 공부를 잘하셨는지 졸업 즈음에는 조교 사무실에서도 근무하셨기에

내가 고3 시절 형님과 같은 대학 입학시험쳤을 때 내 시험 점수를 미리 알고는

형편없는 수학, 과학, 영어 점수에 나를 무척 혼냈지만 

입시 4과목 중 국어점수가 거의 만점이라 총점으로 계산하니 무난히

원했던 공과대학 화공계열에 합격이 가능했다.

아마 내가 학창시절 소설 책을 많이 읽어 국어가 쉬웠던것 같다.

나와 형님은 과 동문이라 형님이 쓰시던 교과서를 그대로 이어 받고

형님이 입으셨던 교복을 그대로 입고 입학했다.

 

형님이 직장을 다니시면서 내 학비를 일부 부담하신 것 같고

결혼 후 오산에 있는 회사에 다닐 때 내가

어머니가 싸 주시는 반찬을 들고 겸사 겸사 가끔 용돈을 타러

오산을 찾아 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아 오랜동안 힘들어하시다가

나이 들어 다니던 직장에서 그만두셨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생전 안하시던 세탁소일을 하셨는데 그것도 체질이 아니신지

힘들어 하셔서 그만두시고 어느 업체 경비를 하시다가

그만 식도암에 걸려서 환갑이 조금 지난 이른 나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지난 날을 회고해 보니 동생들에게 참 반듯한 장남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동네에 우리같이 6남1녀를 우리 집의 남녀 순서와 똑같은 가정이 있었는데

그 집은 큰 형님이 군대 탈영을 비롯하여 형제들이 거의 모두

범죄에 연루되는 시쳇말로 콩가루 집안인 반면 우리 집은

큰 형님이 집안의 규율을 잡고 모범을 보이니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착한 형제들이 있는 집으로 인식되었다.

 

형님은 한번도 부모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행동하신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셔서 집에는

늘 친구들이 와서 자고 가고 난 늘 그 틈에서 자야 했다.

그 친구들 오시면 늘 식사해주는 뒤치닥거리는 우리 누님이 하셨고..

 

형님의 기일이 다가온다.

형님이 살아 계시던 때는 집안의 위계가 살아있었는데

돌아가신 후 질서가 사라졌다. 아쉽다.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형님을 안아 드리며 했던 말을 다시 해 본다.

 

형.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