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노래 한곡의 추억

나의 애창곡 (67) - 서울로 가는 길

carmina 2016. 1. 21. 10:43

 

서울로 가는 길

 

우리 부모 병들어 누우신 지 삼년에
뒷산의 약초뿌리 모두 캐어 드렸지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병드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아침이면 찾아와 울고 가던 까치야
나 떠나도 찾아와서 우리부모 위로해
나 떠나면 누가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앞서가는 누렁아 왜 따라 나서는 거냐

돌아가 우리 부모 보살펴 드리렴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병드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좋은 약 구하여서 내 다시 올 때까지

집 앞의 느티나무 그 빛을 변치마라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대학을 졸업하던 해 1981년 2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여의도에 순복음교회 뒷편에 있는 엔지니어링 회사.

화학 공장이나 정유 공장 설계와 시공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당시 국내에 이런 회사가 몇 개 없었다.

 

국내의 탑 5 공과 대학의 우수인재만 뽑는 이 회사에 전역 후

혼자 영어학원을 꾸준히 다니면서 배운 영어회화 실력과

군시절 혼자 책으로만 독학한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고

대학시절 레크레이션 리더같은 써클활동을 높이 평가받아

비록 성적은 그다지 내세울 바는 못되었지만

주로 외국회사와 일하는 이 회사에 필요한 직원이라 해서

해외영업부에 취업되었다.

 

주요 업무가 시간대가 다른 외국회사와 교신해야 하는 일이기에

늘 야근의 연속이었고, 어깨 넘어로 배운 타이핑 실력으로

서류작성이나 텔렉스 송신같은 일은 늘 내 차지였다.

야근하는 날은 늘 인근 중국집에서 야식을 시키며 가져오는

고량주를 마시다가 그게 발동이 되어 술자리로 변하는 일이 빈번했고

당시 여의도에는 사무실이 별로 없던 관계로 교통편도 안 좋아

출퇴근버스 아니면 회사에 접근이 어려웠으니

야근 후 집에 가기 위해서는 술을 급히 먹고

영등포로 나가 인천가는 총알택시를 타는 일의 연속이었다.

 

3달 정도 지난 그날도 퇴근 후 술에 취한 채 전철을 타고 서서 가다가

주안역쯤에 마침 자리가 생겨 앉아 깜빡 졸다가 눈을 뜨고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방금 제물포를 지났단다. 그러면 다음이 내가 내려야 할 동인천역이니

일어나서 개찰구에서 가까운 앞쪽 칸으로 걸어 가는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와 반대방향으로 걸어 오고 있다.

이상하다. 왜 이럴까?

당연히 동인천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나랑 같은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데...

그런데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서는데...아차! 주안역이다.

내가 의자에 앉아 깜빡 졸은 것이 아니고  푹 잔 뒤

종점인 인천역까지 가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열차가

다시 서울방향으로 가는 중에 깬 것이다.

 

집에 와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하니 어머니가 갑자기 내게

옷을 벗어 보란다. 왜 그러느냐며 상의를 벗으니

그만 내 몸이 온통 노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름하여 급성간염으로 인한 황달에 걸려 버렸다.

 

즉시 인천의 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데

피곤해서 생긴 급성간염은 그저 잘 먹고 쉬는게 약이다.

약 한 달 정도 후 퇴원하고 집에서 쉬며

어머니께서 각종 민간처방약을 내게 주시기에 그저 받아먹었는데

어느 날 제 색깔로 돌아오던 내 몸이 다시 급격히 노란색깔로 변해 버렸다.

무언가를 잘 못 먹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나는 급히 다시 서울대병원에 후송되어 2개월 넘게 입원해야만 했다.

 

그런 사고를 겪다 보니 어머니는 자신때문에 아들이

큰 병에 걸렸다는 자괴감에 이제껏 아들이 자신보고 그토록 교회나가자 했는데

가지 않아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내가 다니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모든 예배에 열심히 울며 기도하셨다.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 어머니는 수시로 반찬을 만들어 오시다가

어느 날 부터인가 형수님이 대신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내가 퇴원하는 날

비가 몹시 왔는데 어머니 대신 형수님이 퇴원 수속하고 택시를 타고 인천의 집에

도착하니 집은 그야말로 초상집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퇴원날짜가 정해지니 그 때 부터

아들이 집에서 요양하는 동안 필요하다며 요와 이불빨래를 열심히 하시다가

그만 혈압으로 쓰러지셔서 오른 쪽 반신이 마비가 되는 중풍을 맞으셨다.

 

나는 주먹으로 벽을 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교회 다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서 겨우 이루어졌는데

어머니를 이토록 힘들게 하시는 하나님이 야속하여

'앞으로 교회 안다니겠다'라고 하며 울부짖으니

어머님이 거의 말씀도 못하시는 웅얼거리는 어투로

'절대 그러면 안된다'며 나를 타일렀다.

 

나는 어느 정도 완쾌 후 어머니께서 내 직장 생활을 돌보주시니 못하니

형님 댁으로 얹혀 살고 나중엔 해외현장 생활과 결혼까지 하며

사는 동안 어머니는 조금씩 좋아지시기는 했어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원 상태로 돌아오지는 못하셨지만 불편한 몸으로 아버님과

두 분이 사시는데 무리가 없으셨다.

 

결혼 후 해외 현장을 다시 1년 다녀 온 후 집을 사는 것보다

우선 승용차를 샀다. 어머니께서 자신이 몸이 보기 흉하다고

절대 집 밖에는 안 다니시기에 내가 모시고 다니고 싶어서

차를 샀지만 그마저 겨우 몇 번 밖에 모시고 다니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지신 후 7년을 사시다가 

어느 날 대 식구를 위해 평생 일하시던 부엌에서 쓰러져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 하셨다.

 

어머니가 이렇게 고생하실 때 내가 늘 부르던 노래가

'서울가는 길'이라는 노래였다.

늘 이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흘렀다.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해외 현장으로 떠나면서 다시는 어머니를 뵐 수 없을 것 같아

이 노래를 부르며 울며 비행기를 탔고, 주일마다 집에 가

어머니를 뵙고 서울의 내 집으로 돌아가면서 늘 이 노래를 불렀다.

 

평생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께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그저 내가 지금 할 일은 자주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는 것 밖에 없다.

 

난 참으로 바보같은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