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가는길 -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carmina 2016. 1. 24. 08:46


2016. 1. 23


며칠 전부터 북극의 찬 공기가 틈새를 비집고 한국으로 내려왔다 한다.

매일 매일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고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눈만 보일 정도로 꽁꽁 싸매고 종종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걸어간다.

특히 회사가 있는 여의도는 더욱 바람이 강하게 불어

길을 건너면 몸이 흔들릴 정도다.

그 와중에 애연가들은 빌딩밖에서 추워 고개를 숙이고 짬짬이 담배 피우느라

옹기 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그리고 남부지방과 제주도에는 연일 폭설이 내리고

미국 워싱턴에서는 시속 100km의 눈태풍으로 오바마 대통령이 탄 차가

미끄러질 정도로 기상이변이 생겼다.


이 겨울에 간절히 눈길을 걷고 싶었다.

며칠 전 잠시 폭설이 내리는가 싶더니 그것도 금방 녹아 버리고

연일 주말 날씨를 눈여겨 보았다.


토요일 서해 해상에 눈이 예보되어 있어 혹시나 하고 길을 나섰다.

영하 16도. 근간에 들어 가장 낮은 기온이다. 낮에도 영하 9도.

양말을 두켤레를 신었다. 그간 가지고 있는 겨울 등산복으로는

이 혹한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거위털 파카도 하나 사 놓았다.

두툼하게 껴 입고 새벽 공기를 마시니 찬 바람이 쨍 하고 내 뺨을 두들긴다.

평소 주말에 강화로 가는 버스는 만원이었는데 오늘은 무척 한산하다.

늘 모이는 인원도 오늘은 10명도 안 될 정도로 단촐하다.


나들길 3코스 왕릉가는 길.

모든 것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풀도 나무도...

어느 집 굴뚝에서 나오는 흰 연기도 하늘로 솟구치지 못하고

그래도 90도 각도로 차가운 대지에 흩어져 버린다.

겨울 장갑을 끼고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벌써 손이 시렵다.

입김이 얼어 구름이 되어 버릴 것 같아 숨도 참고 걷기 시작했다.


숲속의 낙엽들도 마치 얇은 얼음처럼 발길에 부서져 버린다.

솔잎 낙엽들은 추위에 견디기 어려운지 그 뻣뻣한 기세를

구부리고 말았다. 이제까지 간신히 나무에 버티어 달려 있던

마른 이파리들도 이젠 완전히 백기를 들고 떨어져 나무는 완전히 벌거벗었다.


길벗들이 얼굴이 사라져 버렸다.

겨울 반짝이는 눈들이 보일 뿐이고 어쩌다 내 놓은 얼굴은

뺨이 발그스름하게 연지 곤지 찍었고 코도 심하게 감기든 것처럼

발갛게 변해 버렸다.


길가의 어느 집 앞 정자에 무언가 말려 놓기 위해 널어 놓은 야채는

그야말로 쓰레기처럼 변해 버렸고 공중에 매달린 시렁도

휑하게 모든 것을 떨구어 버렸다.


진강산 올라가는 입구에 세워진 정자조차 추위에 쓰러질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아마 얼어붙은 내 눈으로 보는 착시일 것이다.

아! 눈이 그립다. 흰 눈 가득 덮였다면 모든 것이 아름다웠을텐데...


끝없이 숲속을 걷는다.

평소 같으면 이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내 폐속 깊숙히 빨아드렸을텐데

오늘은 가뿐 숨으로 도심 빌딩 숲속에서 쌓였던 내 몸의 독소를 내 뱉는다.

길가의 작은 나무가지도 건드리니 금방 부러져 버린다.

그러니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은 발로 밟으면 바스라질 정도다.

그 와중에 산비둘기 한 마리 들고양이에 먹혔는지

비석도 없는 무덤위에는 눈처럼 보드라운 깃털이 가득 덮여 있다.


문득 그간 보이지 않던 감사문 표시가 선명한 색깔로 눈을 끈다.

'강화나들길을 허락해 주신 마을주민께 감사드립니다.

신학생들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지나가 주십시요.'


4코스 정제두묘부터 3코스 숲길 끝까지 '아름다운 숲길'로 선정되어

사람들이 많이 온다 한다. 그러니 인근 기도원에 사람들이 불편을

느꼈나 보다. 나들길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내게 추천하는 코스를

물으면 난 주저없이 3코스라고 대답한다. 그만큼 3코스는

울창한 나무가 가득한 긴 숲을 걷는 즐거움이 아주 크다. 


숲 속에 산소가 몇 기 보였었는데 오늘 보니 또 새로운 산소가 하나

더 생겼다. 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가리..

3코스에는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유난히 등나무가 많은 구간에 있는 나무들이 밑에서부터

구렁이처럼 나무 껍질부터 감싸 들어오는 등나무에 천천히

수십년 동안 풍상을 이기며 하늘을 꿈을 향해 치솟았던

자기 목숨을 내 주어야 한다. 등나무는 나무에서 수액을 먹고 자라며

점점 나무 꼭대기까지 감아 오르면 결국 나무들은 죽어 버리고 만다.


나들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니 평소 불편하지만 자연의 미가 있던 곳이

편리함이라는 미명아래 인공적인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 비탈길에 여름이면 두더지들이 놀던 그 곳에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사람들에게 편하지만 동물은 자기 집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숲길을 걷는 내내 땅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추위가 오기전에 두더지들이 열심히 땅 속으로 길을 내며 움직이는

그 곳의 흙이 얼어 붙어 발로 밟으니 바삭하고 흙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런대로 기분이 좋았다.

마치 푹신한 잔디를 밟는 느낌이랄까?


늘 이 길은 나무들이 빼곡하여 거의 숲길 양 옆의 시야가 막혀 있었는데

오늘은 나무들이 모두 옷을 벗으니

나무 사이로 휑하니 뚫린 길로 멀리까지 보인다.

겨울산은 이런 매력이 있구나.


얼마 전에 이 길을 걸을 때만 해도 날씨가 푸근해 초 겨울에도

몇 몇 엉덩이에 뿔이 솟은 개나리들이 노란 꽃봉우리를 머금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얼빠진 나무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석릉 앞에도 보이지 않던 이정표가 하나 더 생겼다.

3코스를 걷는 중 이런 역사 유물이 있는 곳은 그곳을 잠시 보고

다시 제 코스로 돌아와야 하는데 어떤 이들은 그런 원칙을 모르고

석릉까지 와서 능의 뒷산을 넘어가며 나들길 이정표가 없다고

투덜거렸는지 능 앞에 나들길은 되돌아 가라는 선명한 표식을 해 두었다.


능을 내려와 길을 걷는데 무언가 앞에서 움직이는 것이 있다.

고라니일까 하고 얼른 카메라를 잡으니 어떤 여자 분이

집에 있는 뚱뚱한 개를 운동시킬려고 산책을 나왔다.

몸통이 길고 다리가 짧은 개들이 우리 일행을 더 반긴다.


오늘은 걷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평소 쉬는 곳에서도 간식을 나누어 먹다가도 땀이 식으니

추위를 느꼈는지 얼른 배낭을 챙기고 일어서야 했다.


숲이 끝나고 동네 마을길로 접어들었는데 거의 모든 집들이 인적이 없다.

앞 마당에 나와 고추를 따던 할머니도, 동네 꼬마 아이들도

경운기를 몰고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가 차를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들 만이 무심하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길정저수지의 낚싯터에 어름 낚시를 즐길만한 사람들이 있을텐데

왜 없을까? 저수지 가에 물이 꽁꽁 얼어 붙어 그 위를 걸어가도 괜찮을 정도다.

저수지가 창백해 보인다. 곁에서부터 서서히 어름이 덮여 이젠 가운데까지

곧 빙판으로 변해 버릴 것 같다. 이번 추위가 다음 주 까지 계속된다 하니

아마 곧 이 넓은 저수지가 하얀 얼음막이 생길 것이다.


모든 것이 죽어 있을 것 같은 겨울 공간의 얼어 붙은 겨울 하늘에

무리지어 날으는 오리떼들과 덤불속에 떼지어 있는 참새들,

흔들리는 갈대들 그리고 뜨거운 입김을 내 뿜고 있는

우리같은 걷기 매니아들이 살아 있다.


뜨끈한 떡만두국으로 점심을 즐기고 다시 가파른 둑길을 올라오니

모자를 날려 버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휘몰아 친다.

멀리 보이는 겨울 벌판이 시린 하늘 아래 금같이 빛나고 있고

왼편 저수지에는 빙판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아! 참 아름답다.

춥다고 집에서 나오지 않는 자들은 이 아름다움을 즐길 자격이 없다.


하지 않는 자는 하는 이의 즐거움을 모른다.


가끔 검은 구름이 있는 곳에서 작은 눈들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다.

다음에 눈이 많이 오는 날 휴가를 내서라도 기필코 길을 찾아와야겠다.


매스콤에 보니 곰배령이 겨울 트레킹에 최고라 하기에

자꾸 구미가 댕긴다. 잡아 먹을거야...


오늘은 너무 추워 집에 와 사진을 보니 평소보다 거의 3분의 1 정도밖에 찍지 못했다.

그러나 걷는 내내 뜨거웠던 내 가슴에 그 길의 아름다움을 모두 담아 두었다.


길은 언제 어디서든 만족한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