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부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말러 4번'

carmina 2016. 2. 5. 14:15

 

 

2016. 2. 4

 

부천시립예술단의 홈페이지에 부천시립합창단 공연 관람후기를

올려 놓았더니 좋은 후기로 선정되었다며 상품으로 공연티켓을

제공하겠다기에 얼른 일정을 보니 부천 필의 말러 공연이 구미를 당겼다.

 

말러, 그 영원한 숙제.

보통 클래식에 관심없는 자들도 모짜르트나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브라암스 등

유명 작곡가의 교향곡을 들으면 대개 좋다 하는데

말러라 하면 도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클래식 애호가들의 취향은 다르다.

오래전 하이텔의 고전음악동호회 내부에 두 개의 큰 서브 동호회가 있었으니

바그네리안과 말러리안이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는 무리들과

말러의 곡들을 좋아하는 무리들.

그들은 늘 바그너와 말러의 음악과 생애에 대해 많은 글을 올리고

음악을 공유하고 끊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구스타프 말러는 모짜르트와 같은 국적인 오스트리아 태생으로서

모짜르트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대개 밝고 맑은 감성을 준 반면

말러는 많은 고독감이나 절망감 같은 음악을 주어 20세기 근대음악의 시초를 열었다.

 

이상하게 교향곡도 베토벤처럼 9개를 작곡하였으며

아마 이게 거인의 한계인가 할 정도로 교향곡은 아주 특별한 작곡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10개의 벽을 넘지 못했다.

슈베르트도, 브루크너도 말러처럼 10번의 교향곡을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모짜르트 빼 놓고는 거의 모두 10번을 작곡하다가 죽어버리는 이상한 역사를 만들었다.

모짜르트는 그 벽을 넘었으니 정말 신이 사랑하는 (Amadeus) 작곡가인가? 

 

각설하고...

부천 필의 어제 공연은 말러 4번을 연주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바리톤 정록기씨의 말러 가곡 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의

4곡으로 전반 무대를 꾸몄다.

정록기씨는 우리 서울싱잉커플즈 합창단에서 메시아 원곡연주를 할 때 바리톤 솔리스트로

참여하였고, 그 뒤로도 여기 저기 공연에서 그의 노래는 귀에 익다.

 

제 1곡은 내용이 마치 트윈폴리오가 부른 웨딩케이크의 내용과 흡사하다.

사랑하는 연인의 결혼식을 보면서 탄식하는 젊은이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는데 일반 가곡같이 피아노의 반주로만 하지 않고 교향곡으로 하니

가사와 노래는 몰라도 악기의 음을 통해서 상황과 젊은이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결혼식의 축제음악이 여러개의 악기로 배경으로 들리는 가운데 목관악기가 젊은이와

동행하며 그 아픈 마음을 같이 한다.

 

제 2곡은 아침들을 걸으며 느끼는 생각들을 노래로 표현했다.

가수의 표정이 밝고 마치 걸어가며 노래할 듯한 분위기다.

악기들은 모든 만물이 깨어나는 듯, 새와 같은 소리로 화답한다.

내가 아침 일찍 시골길을 트레킹할 때의 기분이랄까?

그러나 그 밝은 마음도 곧 차분해지고 음악은 진지해진다.

팀파니의 잦은 리듬으로 마음이 동요되고 있다. 무슨 생각일까?

역시 젊은이는 어느 상황에든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이겠지.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그 마음을 하프의 영롱한 소리로 남겨둔다.

 

제 3곡은 타는 듯한 단검으로 라는  제목처럼

젊은이는 무언가 가슴답답한 일로 고민하는 듯

오케스트라가 격한 리듬을 쏟아 낸다.

소리가 높아지고 현악기와 목관악기도 빠른 3박자 리듬으로

소리치고 있다. 어떤 괴로움일까? 분명 실연했을꺼야.

나도 그랬으니까...모든 것을 버리고 죽고 싶었으니까..

내가 그 당시 노래해도 저렇게 노래했을꺼야.

 

제 4곡은 그녀의 파란 두 눈이...

그러나 평생 잊지 못할 사랑.

젊은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부드러운 소리로 탄식한다.

팔셋토로 노래하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악기도 조심 조심 연주하고, 느낌도 아다지오로 흐른다.

그 격정의 순간이 다 어디갔을까?

바이올린의 활을 천천히 긋고, 팀파니는 치는듯 마는 듯,

목관은 연주자가 천천히 어깨가 움직이며

지휘자의 손을 움직이는 범위도 무척 좁다.

젊은이는 그렇게 사랑에 실패하고 방황의 길로 가 버린다.

 

젊음은 그런 것, 끝없는 방황의 연속이다.

그래서 젊다.

 

말러 4번 천상의 삶

 

1악장의 첫 멜로디를 들으며 갑자기 근육질 액션배우

아놀드 슈발츠네거가 생각이 났다.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이면서 주로 액션영화만 찍다가

어느 날 '유치원에 간 사나이'와 '솔드 아웃'이라는 코미디 영화를 하나 찍었다.

말러의 전편 교향곡들이 웅장하고 거대하고 종교적이고

말러 1번 '거인' 2번 '부활' 말러 3번은 너무 길고...

그런 말러의 취향에서 교향곡 3번은 1악장부터 부드러운 명랑한 G장조의 멜로디가

주 선율로 이루어져 친근해 진다.

 

팜프렛의 곡 설명에는 아이들에 의한 천국의 세계를 나타내는 악장이라고 표현했듯이

밝은 소리를 내는 금관악기들이 주 선율을 이끌어 간다.

 

곡의 처음부터 무슨 악기인줄 모르겠는데 맑은 금속소리가 들린다.

기분이 좋다. 바이올린 선율이 소리를 더 맑게 하고 연이어 순차적으로

악기들이 그 즐거움에 동참한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일까?

종일 1악장만 듣고 싶다. 아침에 이 곡을 들으면서 눈을 뜨고 싶고

정원이 보이는 창문에 앉아 김이 모락 모락 오르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 곡을 들으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것 같다.

오보에의 이어지는 맑은 소리가 부천 시민회관의 작은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런 리듬이 나오는 것일까?

같은 선율이 반복되는 것 같다. 다른 곡 어디선가 들은 멜로디가 흐르고...

유난히 플륫 연주가 많다. 아마 기분좋은 연상을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런데 클라리넷이 연주 도중 자꾸 리드를 교체한다. 왜 그럴까?

리드에 따라 음색이 달라는 것일까?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음이 커진다.

온갖 악기가 어지럽게 풀사운드로 소리를 낸다.

이제야 제대로 말러다움이 보인다.

온 동네 아이들 나와 마구 떠들듯이 온 악기가 모두 합주하다가

어머니의 자애로운 미소같이 1 악장을 마무리를 한다.

 

2악장은 이제까지 본 오케스트라와 다른 모습을 처음부터 보였다.

악장이 바이올린을 2대 들고 나오는 것을 보며 아내가 놀란다.

왜 바이올린을 2대를 들고나오느냐고....

난 이미 예습을 했기 때문에 두번째로 가지고 나온 바이올린ㅇ

음이 다르게 조율된 것을 알고 있었다.작곡자는 어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악장은 2악장이 시작하자마자 의자 앞에 놓인 다른 바이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각 파트의 악장들만의 연주로 시작되는가 싶더니 곧 모든 악기들이 합주한다.

불협이 들린다. 선입견인가? 바뀐 바이올린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다.

선율이 갑자기 끊기는가 싶더니 전혀 다른 멜로디로 변한다.

참 난해하다. 이런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예측할 수 없는 음악의 진행.

이래서 말러를 어렵다고 하는 것일까?

하긴 창작이라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창작이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으면 창작이 아닐 것이다.

스타카토의 음들이 계속되고 또 2악장도 스타카토로 끝낸다.

 

3악장의 아다지오. 이젠 편히 들어 보자하고 의자에 깊숙히 뭄을 박아 놓고

연주장 천정을 보다가 별로 아름답지 않아 눈을 감았다.

느리게...느리게..얼마나 더 느려질 수 있는가?

모든 스포츠의 진정한 프로는 느리게 하고 단순하게 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연주도 그럴 것이다. 느리게 하면 감정을 더 많이 실어야 하고

여유로움이 없으면 아다지오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 전에 정명훈씨도 아다지오라는 음반을 따로 낼 정도로

아다지오는 음악 매니아들이 가장 원하는 부분일 것이다.

눈을 감고 들으면 눈물이 날 것 만 같다.

몸이 구름에 뜬 기분을 느낄 것이고 천천히 흐르는 강물에

내 몸이 떠 내려가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아다지오는 안단테로 바뀌고 모데라토로 바뀐다.

음악을 밀고 땡기고, 지휘자의 커다란 키가 악단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한다.

오케스트라는 공연장에서 실연으로 보는 것도 좋지만

연주자들과 같이 호흡하며 음악감상을 하기 위해서는 영상으로 보는 것도 좋다.

지휘자와 눈을 맞추는 그 진지한 모습을 볼 때 나도 같이 빨려 들어갈 수 있다.

3악장의 조용한 흐름이 큰 물결이 되어 흐르다가  맑은 자일로폰 소리와

금관악기의 합주 후 그윽한 현악으로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온 악기들의 풀 사운드로 이어지다가 하프의 맑은 선율로 3악장이 끝난다.

 

3악장때부터 흰 드레스를 입고 나와 단원들 가운데서 기다리고 있던

소프라노 박현주씨가 무대 앞으로 나왔다.

교향곡의 악장에 소프라노 솔로라...과연 이 것도 말러답다.

합창이 들어가는 교향곡은 베토벤의 나인심포니나

내가 부천 필과 객원단원으로 같이 연주한 경험이 있는 말러 2번의 '부활' 

그리고 아마 멘델스존의 교향곡에서도 들은 바가 있는 것 같다.

그 것도 소프라노 솔로라면 소리 전달을 위해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최대한 줄여야 하는데

왜 말러는 교향곡의 마지막 4악장에 이런 선택을 했을까?

어쩌면 이후에도 이어지는 악장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원래 교향곡 3번은 6악장으로 구성할려고 했었다는 얘기도 있다.

 

아마 천상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 악기보다

천사의 목소리인 소프라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소프라노의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소리가 마이크 없이도

오케스트라의 큰 소리를 뚫고 나와 충분히 뒷자리에 전달될 정도로 힘이 있다.

아니, 그건 힘이라기보다 느낌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 같다.

소프라노 소리와 목관악기의 화음이 참 잘 어울린다.

2번째 곡을 노래할 때는 노래하는 표정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보는 사람도 행복을 느낀다. 저런 미소는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

노래를 많이 하면서 느끼는 것이

노래할 때 미소를 짓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늘 체감한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표정과 고음이 아주 자연스럽다.

음악이 조용히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

천국은 저렇게 조용하게 들어가는 것이겠지?

어린 양같이 부드러움으로 온 몸을 감싸고, 주님 옆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흰 드레스를 입은 것도 양을 표현하기 위해서인가?

 

우리의 고단한 삶이 더블베이스의 조용한 선율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갔다.

 

앵콜곡으로 연주된 귀에 익은 멜로디를 듣고 무슨 곡인지

궁금해 하다가 다른 이의 블로그에서 카바렐리아 루스티카나 인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