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부천시립합창단 - 살리에르와 모짜르트의 레퀴엠 전곡연주

carmina 2016. 3. 18. 10:42

 

2016. 3. 17

 

살리에리 안토니 레퀴엠의 Sanctus 곡의 첫 Sanctus 음절이 유난히 길게 이어진다.

더 거룩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아마 살리에리가 당시 궁정악장이라는

선입견때문일 것이다.

왕이 신하들 앞에서 말할 때 속도를 천천히 해서 위엄을 주는 것처럼

내겐 살리에리의 음악이 참으로 더 레퀴엠다운 곡이었다고 생각되었다.

 

부천시립합창단의 새로운 도전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 4탄으로 내 놓은 살리에리와 모짜르트의 비교.

누구는 이 두 사람을 정적이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말은 후세에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두 사람은 비교조차 안되는 작곡가였다.

살리에리는 국왕의 총애를 받는 궁정악장이었고

모짜르트는 이제 갓 세상을 음악을 선보이던 풋내기였을 뿐이다.

 

연주전에 조익현지휘자님이 나와 친절하게 설명을 하였듯이

살리에리는 베토벤, 슈베르트, 훔멜, 리스트, 글룩등 현대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작곡가들의 스승이었다.

그 들이 살리에리의 영향을 받았고 기본을 배웠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단지 몇 명의 후대 음악가가 아닌 평론가나 소설가에 의해

왜곡되게 전해온게 사실이다.

특히 가장 파급효과가 큰 매스미디어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들을 극렬하게 비교를 해 놓았으니까..

 

살리에리의 음악이 모짜르트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되지 않는 것은

먼 훗날 사람들이 살리에리라는 작곡가의 곡을 거의 모를만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한다.

 

영화에서 숨은 코드를 찾아내기 좋아하는 내 기억속에

문득 아마데우스 영화 중 한 장면이 떠오른다.

모짜르트가 연주 후 요셉2세가 무언가 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워낙 당대의 음악과 달라 포인트를 지적하지 못하자 옆에서 신하가 거든다.

음표가 너무 많아.  그래 음표가 너무 많아.

그 대목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까지의 음악은 단순했구나 하고...

이제까지의 음악은 살리에리의 음악이 정통이었다.

모두 그렇게 작곡했고 모두 당연히 그런 연주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음표가 많으면 경박스러운 것으로

이해되었을지도 모르니 특히 레퀴엠같이 경건하고 거룩한 음악에

심하게 변화가 있는 멜리시마의 연속이나 포르테로 웅장하게

연주되는 음악은 신에게 거슬린다는 인간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연주에 두 곡을 비교해 보니

과연 모짜르트의 레퀴엠이 살리에리의 그것보다 훨씬 음표가 많았다.

즉 연속되는 멜리시마로 이어지는 부분이 많다.

 

개인 생각으로는 살리에리는 당시 음악의 흐름을 타고 있었고

모짜르트는 새로운 변혁이었다.

아마데우스 영화 전편을 봐도 거의 모든 대부분이 음악의

혁명을 이루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파격이었다.

 

오페라에 천한 할렘의 무용수들이 나와 춤을 추지 않나

흔히 쓰이지 않던 독일어 오페라 가사를 쓰기도 하고

영화에서 살리에리가 놀라움을 표현했듯이 끝없이 이어지는 아리아를

들으면서 소름을 끼치기도 했다.

 

살리에리도 무려 10개가 넘는 오페라를 작곡하였고

수많은 종교곡과, 기악곡들을 작곡했으니 불행하게도

가르친 제자들의 빛나는 음악으로 인해 그의 음악들은 서서히 잊혀졌다.

 

그러나 아직도 살리에리의 음악이 오늘처럼 연주되기도 하고

기록에 의하면 영화에서도 OST로 들어가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The Last Castle,

베토벤영화인 Copying Beethoven

그리고 최근에 영화 아이언맨에서도 삽입되었다.

 

살리에리의 C단조 레퀴엠에 대한 기대를 가득 가지고 음악에 몰입했다.

전주가 이어지며 음산한 분위기의 남성합창으로 시작된다.

Requiem aeteman dona eis, Domine

영원한 안식을 저들에게 주소서. 주님.

멜로디의 굴곡이 크지 않는 입당성가.

사람들이 커다란 성당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주로 남성이 선창하고 뒤이어 여성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아마 이 것도 당시의 전통적인 합창 형태이었을 것이다.

입당성가 후 바로 쉼없이 Kyrie로 이어진다.

 

살리에리의 곡을 들으며 모짜르트의 레퀴엠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Dies Irae (진노의 날)

강하게 포르테로 몰아붙이던 모짜르트의 진노의 날에 비해

살리에리의 그것은 엄청난 진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큰 소리로 자식을 꾸짖는 아버지의 모습같아 보였다고나 할까?

곡중 SATB 솔로 사중창의 고운 화음이 뒤에 서있는 합창단의 소리만큼이나

건강하게 들리고 희망을 가진 자신있는 소리가 작은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

무언가 다짐하는 것 같다.

 

모짜르트 레퀴엠의 주요한 부분인 Lacrimosa가 여기서는 파트의 한 부분으로

이어질 뿐이다. 전체적으로 길게 길게 이어질 뿐이다.

아마 이런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편한 마음으로 졸았을 것이다.

 

죽은 자를 추모하는 찬양이 이제는 서서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밝은 멜로디로 변하고 있다. 음악이 빨라지고 금관악기의 소리가

하늘로 솟고 팀파니의 진동이 커진다.

 

Sanctus의 긴 음이 크레센토로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런 작위적인 크레센토가 약간 더 거룩하게 보인다.

 

소프라노 앨토가 리드하는 듯 4중창의 Benetictus가 고운 화음으로

이어진다. 만약 이 음악을 여성파트를 어린아이들이 했으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있어야 천국에 간다 했으니..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Agnus Dei, 후반으로 갈수록 음악은 평온해진다.

영혼들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일까?

그리고는 Libera me 나를 구원하소서...

음악은 심포니처럼 웅장하게 마무리짓지 않고

뒤처리를 하다 만 것처럼 그렇게 서서히 Ending으로 이어졌다.

 

살리에리 레퀴엠의 전곡을 들으며 이 곡이 왜 후대에

인기가 없는지 대충 이해할 것만 같다.

 

언젠가 방송에서 히트치는 음악들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분석한 TV 영상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에는 어떤 특별한 코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살리에리의 음악은 경건할 뿐이지 어떤 뚜렷한 코드가 없는 것 같다.

단지 제례음악으로 만족해야 하는지...

 

내가 좋아하는 회를 먹기 위해 일식집을 가면

꼭 접시에 회와 함께 얇게 저민 생강을 놓는다.

이 생강의 목적이 맛이 다른 여러 종류의 회를 먹을 때

바로 전에 먹었던 회 맛을 입안에서 씻어주는 것이라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 같다.

 

살리에리의 레퀴엠을 귀에서 씻어내야만 했다.

아니, 씻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귀다 닳도록

들었으니 그냥 편하게 들으면 된다.

 

누군가 그랬다. 살리에리의 음악이 재미없다고..

그건 아마 우리가 MSG에 익숙한 김치찌게를 먹다가

조미료 없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때의 밋밋함일것이다.

내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리에리의 레퀴엠은 유기농이었다고..

 

모짜르트의 D Minor Requiem KV626.

내가 아는 클래식 매니아 친구는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종류별로 무려 300개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

그만큼 절대적으로 명곡이다.

몇 년전 고음악 전문 지휘자인 니콜라스 아르농쿠르가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과 쇤베르그 합창단 이끌고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할 때

이 곡을 최고의 연주로 들었었다.

 

이번에 부천시립합창단과 연주한 알테무지크서울은 고음악 연주단체이긴 하지만

이번 연주에 사용한 악기들을 고음악 전문 악기가 아니었다.

 

Kyrie 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이 휘몰아친다.

아마 요셉2세 왕이 이 부분에서 거슬렸을 것이다.

경건하게 연주해야 하는 레퀴엠을 연속되는 멜리시마로 이어지니

밝고 경쾌하게 들린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머리를 조아리는 가사에 몸을 제대로 흔들어야 나오고

듣는 이도 저절로 몸이 흔들리니 어찌하란 말인가?

 

Dies Irae 부터는 음악은 마치 교향곡처럼 힘차게 이어진다.

마치 다 부숴버릴것 같은 강렬한 외침들...

죽은 자들도 다 무덤에서 나올 것 같은 강렬한 외침이 그 곳에 있다.

 

베이스 솔리스트의 Tuba Mirum
알레그리와 어찌 이리 다를까?

혹시 모짜르트가 알레그리의 레퀴엠을 의식해서

이렇게 역설적인 리듬으로 작곡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이어지는 4중창도 알레그리의 4중창은 주로 4명의 화음이었는데

모짜르트의 것은 유난히 각 파트의 솔로가 많다.

 

곡의 길이도 알레그리는 약 40분 정도인데

모짜르트의 것은 거의 55분이다.

아니 곡의 길이는 모짜르트가 의도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모짜르트는 이 곡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제자인 쥐스마이어가 작곡을 이어가면서 스승의 의도를

파악한 것 같다.

 

시종 경쾌한 리듬으로 곡이 이어진다.

소프라노의 합창이 천정을 울리고..

아...이 곡을 유럽의 어느 성당의 돔 천정을 통해 반사되는 소리로 듣고 싶다.

 

드디어 모짜르트가 작곡하다가 멈춘 Lacrimosa의 멜로디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지휘자들이 연주를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모짜르트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연주를 이어가곤 한다.

 

쥐스마이어가 이어간 레퀴엠은 전반부의 흐름을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아마츄어어인 내가 보기에도 때론 전반부의 화성이 그대로

들리는 것 같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 스승에 그 제자임에 틀림없다.

 

영화 아마데우스 아니 소설가 피터쉐퍼가 쓴 희곡 아마데우스는

단지 픽션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모짜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죽을지 모르는 공포에 있다고

쓰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모짜르트 생애 살리에리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고

전해 오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살리에리가 음악에의 질투로

독살했을까? 아니면 영화처럼 심리적인 압박을 주었을까?

 

오스트리아 여행 중 음악가 공동묘지에 꽃 한 송이 들고 찾아간 적이 있다.

모짜르트의 묘비는 눈에 잘 띄는 정 중앙에 있고

살리에리의 묘비는 공동묘지 구석의 담장에 피아노 교본으로 유명한

체르니의 묘비와 함께 놓여있다.

어즈버 세월의 무상함이여..

 

이번 부천시립합창단의 비교 연주는 대단히 주목받을 만한 연주다.

살리에리의 레퀴엠 초연 도전도 칭찬해 줄만 한데

모짜르트의 레퀴엠까지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조익현 지휘자님의

정열과 무언가 새로운 음악을 탐구하는 열정에 내 가슴이 타들어 갈 뻔 했다.

그래서인지 연주를 하고 나온 지휘자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살리에리도 모짜르트도 하늘에서 행복했으리라..

그리고 Wolfgang Amadeus Mozart

그는 진정 신이 사랑하는 (Amadeus=Beloved of God) 작곡가였음이 틀림없다.

 

아마, 이 곡을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했으면 아마 음악애호가들로

만석이 되었을 것이다. 꼭 그렇게 앵콜 공연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연주를 보고 나오는 초봄의 밤하늘 공기가 무척 싱그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