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강화도나들길

7코스 낙조보러 가는 길 - Soaked

carmina 2016. 3. 5. 18:37



2016. 3. 5


영어로 Wet 하면 보통 젖었다 라는 표현이지만

Soaked 하면 폭 젖었다는 뜻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폭 젖었다.


평소 늘 토요도보를 리딩하는 분이 오늘 화요도보팀과

해외 원정 트레킹가야 한다기에 대신 내가 토요도보를 리딩했다.

당초 잘 걸어보지 않은 분이 온다기에

일부러 코스를 조금 단축하여 스케쥴을 잡고

미리 지도상으로 새로 단축되는 코스를 숙지해 놓았다.


그런데..토요일 비 소식이 있다.

토요도보를 신청한 분들이 처음 보는 아이디인데

비가 와도 걷는지 물어 보는 전화가 온다.

당연히 걷는다고 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차를 가지고

강화도로를 달리는 간밤에 오던 비가 그쳤다.

비가 오지 않으면 좋을텐데 예보는 오늘 천둥 번개가 친다 했다.


7코스 출발점인 화도터미널에서 나까지 포함해서 5명이 모여

초보자가 오지 않았으니 오늘 완주하기로 합의하고

코에 스며 들어오는 기분좋은 촉촉한 공기의 기운을 느끼며 힘차게 출발.


성공회 내리교회에 들러 종밑의 항아리를 보니

커다란 울림통 하나를 보는 것 같다.

어릴 때 큰 항아리에 머리를 처박고 소리를 지르면

그 울림이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7코스를 역으로 걸어 하늘재로 올라가는 시멘트 언덕길을 오른다.

매번 나들길을 걸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강화가 참 많이 변화하는 것 같다.

길을 걷는데 커다란 포크레인차가 천천히 우리를 스쳐 지나가더니

하늘재 근처의 새로 짓고 있는 절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 근처도 무슨 작업을 하는지 부지가 정리되고 있고

산을 깎아 드러난 암벽들이 볼품없게 병풍을 치고 있다.


길가에 억지로 푸른 소나무를 심었는가?

커다란 플라스틱 소나무를 전봇대 옆에 세워 놓았다.

자세히 안보면 진짝 소나무 같았다.

꼭 저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 곳에는 나무들이 그득한데..

산을 깎아 나무를 잘라내니 미안해서 그런 애교를 부린건가?


절을 새로 짓는 것은 시작한 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아직도 공사 중이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 길의 숲들은 아직 겨울잠에 깊이 빠져 모든 나무가지들이 메말라 있다.

오늘이 개구리가 깨어나는 경칩이니 곧 이 길의 나무가지들도

개구리의 푸르름같이 파릇파릇해 지리라.


하늘재에서 잠시 쉬고 펜션촌으로 가는데 길가의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 작은 원들이 물결치고 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모두 우의를 뒤집어 썼다.

이때부터 사진찍는 것은 포기.

평소같으면 지금 이 시간쯤 펜션에서 일어난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오늘은 차도 별로 없고 오가는 이도 없다.


길벗들이 펜션촌에 세워진 각종 조형물들을 사진찍으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데 마주 오던 마을 어른이 옆길로 지나갈려다가

앞장 서 걷는 나를 기다리다가 하시는 말씀이

"산책하는 것 같은데 오늘 비가 많이 오고 낙뢰가 있다는데

이쪽 지역이 낙뢰가 많이 떨어지는 지역이니 조심하라"며

충고를 해 주시기에 고맙다며 주의하겠다 하고 길을 걸었다.


잠들어 있는 펜션촌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는 언덕 쯤에서

멀리 바다가 보인다. 비구름으로 바다와 하늘의 구분이

모호한 경계로 보이지 않는다.

김민기의 '친구' 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검푸른 바다위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오

그 깊은 어둠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오'


큰 도로에 나오니 바람이 세게 분다.

지나가는 차들이 바람을 몰고 다니는가?

얼른 농로길로 접어 들었다.

숲에서는 나무들이 가려 바람이 없어 비를 머리로 맞았는데

들길을 걸으니 빗방울들이 내 뺨을 두들긴다.

안경이 젖는다.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안경에 물방울이 가득하다. 조금 바보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어느 전봇대의 이정표에는 이정표 위에 전신주에 붙이는

넓은 노란 띠를 붙여 놓아 이정표 방향표시가 사라졌다.

7코스의 코스가 조금 달라졌다.

이전에 조금 돌아가는 길을 조금 적게 걷는 지름길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만 그 끝에는 비오는 날에 제방으로 오르기 힘든 지경이 되어 버렸다.

겨우 겨우 조심스럽게 개천을 건너 뛰어 넘고 제방위에 서니 바람이 더 세다.

묵묵히 영화의 어느 한 장면처럼 내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길을 지난다.


날씨가 좋으면 그 둑 끝에 있는 갯벌 탐사용 차들이 뻔질나게 갯벌을 드나들었을텐데

오늘은 전면 휴업이다.

이제부터는 숲길을 걷는다. 비가 오니 길이 미끄럽다.

가능한 미끈한 흙길보다는 낙엽을 밟으며 걷다보니 낙엽의 습기가

등산화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미끄러지는 것 보다 차라리 그게 낫다.


갯벌조망센터에 들어가 세찬 비를 피하고 작은 창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같다.

멀리 갈매기가 갯벌위에 드문 드문 앉아 있는 모습이 세상으로

나오라고 유혹하는 것 같다.

알에서 깨지 않으면 새는 세상을 볼 수 없다.

오늘같은 날도 집에만 있으면 이런 세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집에 있으면 우리의 모습이 한심해 보이지만

걷는 우리는 정말 행복감을 느낀다.

두려워하지마라. 세상은 어떤 어려움도 충분히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다.


조망센터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동안 치지 않던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문득 천둥이 친다는 것은 번개가 치는 것이고 2시간전에 지나치는 동네아저씨의

충고가 생각났다. 벌판에서 우리만이 금속 스틱을 가지고 있는데

잘못하면 큰일 날 수 도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일곶돈대로 가는 길이 조금 바뀌었다.

이전에 몽골텐트로 쳐 있는 펜션앞을 지나쳤는데 아마 그 쪽에서

항의를 했는지 조금 위로 돌아 가는 길로 변경되어 돈대에 도착하여

넓은 바다를 보니 세상이 다 내것 같다.

이렇게 좋은 것을...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랴.


5월정도되면 산딸나무 이파리들로 아름답게 변하는 숲길의 언덕이

오늘은 순간 발을 헛딛으면 질퍽하고 미끄러워 질 정도다.

낙엽을 많이 밟았더니 신발속으로 물이 들어와

신발 속의 질퍽한 느낌이 양말신고 물 위를 걷는 기분이다.

실로 오랜만에 이런 경험을 다시 해 본다.

어디 앉을 자리라도 있으면 신발을 벗고 양말과 깔창을 꼭 짜서

물기를 덜어내고 다시 신고 싶건만 그럴 자리도 없다.


긴 숲길을 걸어 일몰조망대에 오니 빗방울이 시멘트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우유처럼 왕관현상이 생긴다. 정말 세찬 비가 오고 있다.

점심식사를 위해 갯벌식당에 전화하고 식당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시냇물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벌건 흙탕물이

비탈길로 쏟아져 내려 온다.


양말도 벗고 축축한 바지 아랫단도 접어 올리고 식당에 들어가

따뜻한 볼테기탕과 된장 그리고 후식으로 나온 누룽지탕으로 추위를 녹여본다.


길벗들에게 내 걱정을 얘기했다.

천둥치고 번개치는데 우리가 들판의 유일한 표적이 될 수 있다.

원래는 식사 후 계속해서 걷기로 했지만 

오늘은 이쯤해서 걷기를 중지하는 것이 낫겠다 하니 모두 찬성한다.


비록 중간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13km를 걸었고

오늘 처음 나온 몇 분이 힘들었지만 너무 행복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기에

리더로서 미안한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물론 번개를 맞는다는 것은 로또 맞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그 로또가 확률이 높다면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니...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