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지리산둘레길

지선 코스 하동읍 - 서당마을 구간

carmina 2016. 3. 24. 13:36

 

 

2016. 3. 22

 

아침에 민박집에서 된장국에 밥이나 먹고 가라기에

혹시 달랑 그거 두개만 나오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밥상을 차려놓은 것을 먹음직한 시골반찬들이 많아

내 구미를 동하게 만들었다.

어제 먹다 남은 고기로 맛있는 김치찌게도 만들고

풋풋한 봄나물 무침과 오래 묵혀둔 반찬들이 맛있었다. 

 

목아재 - 당재 구간을 어제 걷고

오늘 아침 하동을 가기위해 구례터미널로 가는 버스을 기다렸다.

시골 할머니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는 버스 정류장에

시간에 맞추어 모이는데 이제는 할머니들의 옷차림이 변했다.

이전에 전통적인 시골 노인들의 겉옷이 어느 새

브랜드있는 등산복으로 바뀌고 있다.

아마 아들이나 손주들이 할머니에게 폼 좀 잡으라고 사드린 것 같다.

어느 새 고급 등산복은 남이 인정해 주는 외출복이 되어 버렸다.

 

구례가는 버스가 둘레길에 거쳐가는 코스라 눈에 익숙한 기촌마을을 지나고

화개장터도 잠시 거쳐 손님을 태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거리상으로 참 멀리 떨어진 곳인데

정류장에서 매번 차에 오르는 사람들이 버스에 타는 사람들과

평소에도 잘 아는 사람들인 듯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거리상으로도 이 분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상당히 먼 곳인데

어떻게 이리도 잘 알고 있을까?

 

아마 서로 사는 동네는 몰라도 늘 볼일 보고 오고 가는 버스안에서

서로의 정을 키워 가는 것 같다.

매일 출근하는 전철에서 같은 칸을 타기에 매일 같은 얼굴을 봐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 것인가?

 

구례에서 하동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승강장에 앉아 있는데

어떤 동양인같은 여자분이 내게 와 영어로 묻기에

얼른 내가 영어로 답변하니 반가움에 눈이 동그래 진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다가 말이 안통해서

도시사람같이 생긴 내게 묻는 것일 것이다.

 

지리산 산수유 축제를 보고 내일 지리산 등반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가는지 묻기에 축제를 보고 다시 여기로 와서

지리산 성삼제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했더니 메모지에

성삼제라고 영어로 써달라며 펜을 건네 준다.

 

다시 찾은 하동.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이 곳을 몇 번이나 왔던가.

이젠 작은 읍의 모습이 눈에 무척 친숙하다.

 

하동읍 안내센터에 하동읍 - 서당 구간을 걷기 위해

어느 쪽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교통편이 좋으냐 물었더니

택시를 타고 서당마을에 가서 하동읍으로 오는 것이 낫겠다고 조언해 준다.

걷는 동안 먹을 곳이 없을테니 하동읍에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약 15분을 차를 달려 도착한 서당마을의 마을 회관.

이 곳에서 숙박을 한 경험이 있다.

어제보다 날씨가 더 따뜻해 옷을 간편하게 입고 눈 앞에

보이는 우계저수지의 둑을 향해 걷다가 문득 이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길은 둘레길의 다음 코스로 가는 길이고

내가 오늘 갈 길은 하동읍이니 검정이나 빨간 화살표가 아닌

녹색의 화살표가 그려진 이정표를 찾아야 한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마을회관 옆에서 이정표를 찾고서야

내가 왜 이걸 기억해 내지 못했을까 후회해 본다.

 

재작년 어느 뜨거웠던 여름에 며칠간 다른 코스를 걷고

삼화실로 와 하동읍으로 길을 걷다가 너무 더워 중간에 포기했던 것이

아쉬워 지금 다시 이 길을 찾았는데 그걸 잊었다니..

 

아직은 대지가 푸르름을 활짝 내어 놓지 않고 있는 길을 따라

서당마을의 주위를 둥그렇게 감싸안은 낮은 산들 사이의 벌판길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키가 큰 마을 보호수 이팝나무가 주위에 둥그렇게

잠시 쉴 곳을 마련해 주어 잠시 앉아 쉬며 망중한을 즐겨본다.

 

마을 하천에 맑은 물이 흐르고 하천 주변에 심어 놓은 매화나무에

활짝핀 매화들이 봄날을 시냇물 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마을 경로당에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데 외출복장이 아닌 것을 보니

아마 경로당 문열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요즘 시골의 모든 경로당은 에어컨을 준비해 두어 마을 어른들이

여름 혹서기에 대피할 수 있는 쉼터로 사용한다.

 

마을의 여기 저기 밭에 이미 밭갈이 작업이 시작되었고

농부가 밀집모자를 쓰고 맨발로 밭고랑을 다듬고 있다.

이미 올해 농사가 시작되었다.

춘분이 지났으니 더 이상 땅이 얼어버리는 추위는 없을 것이다.

비닐 하우스내에 겨우내 자랐던 취나물들은 한차례 수확을 했는지

커다란 비닐에 나물이 가득 담겨 있고 아직 수확하지 못한 비닐하우스엔

탐스런 취나물이 가득 덮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심통이 났을까?

자신들은 힘들게 일하는데 하릴없이 걷고 있는 도시 사람들이 미워 보였을까?

여기 저기 새로만들어 놓은 듯한 둘레길 이정표의 방향 표시가 땅에 떨어져 있다.

떨어진 이정표를 주워 다시 끼워 놓긴 했지만 곧 다시 떨어질 것만 같다.

 

하얀 꽃이 가득 덮인 매화 밭 고랑 사이에 상추를 심어 놓아

농부는 위로 아래로 다른 작물을 재배하여 이중의 소득을 꿈꾸고 있다.

 

문들 약 10미터 전방의 매화꽃 사이로 다른 색깔의 물체가 보인다.

움직이지는 않지만 얼핏 보기에 노루 아니면 고라니다.

그 녀석도 나의 모습을 옆 눈길로 보았는지 잠시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쏜살같이 나무 사이로 도망간다.

나도 그 순간을 잡고 싶어 멈추어 선 채로 얼른

카메라의 동영상 버튼을 눌렀다. 넌 오늘 내게 잡혔어.

그 녀석이 도망가느라 흔들어 버린 매화나무에 하얀 매화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온 산과 벌판에 매화가 가득 피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놀랄만한 것을 보게 되었다.

지난 가을에 수확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밤들이 하얀 부대에 가득 담긴 채

길가에 버려져 있고 겨울을 넘기면서 모든 밤들이 썩어 버렸다.

이렇게 많은 밤을 수확해 놓고 왜 가져가지 않았을까?

돈으로 환산해도 참 많은 금액일텐데 이렇게 버려둔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은 조금 걷다가 또 같은 밤 무더기를 볼 수 있었다.

 

점점 마을이 멀어지고 있다.

노란 산수유가 군데 군데 피어 있고 철망으로 막아 놓은 어느 커다란 농장엔

과실나무들이 가지런히 심겨져 있다. 논농사 밭농사보다 과일농사가 더 편할까?

나이가 드니 자꾸 이런 것만 생각하게 된다.

 

갑가기 역겨운 냄새가 풍긴다.

아마 개를 사육했던 곳인지 어지럽게 놓여 있는 개집들이 커다란 철조망에

놓여 있다. 개가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아마 봄이 되면 다시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관동 마을 근처에는 유난히 대나무가 많다.

길가에 이미 하늘높이 만큼 자란 대나무를 수확하여 마을 사람들이

트럭에 싣고 있다. 이정도 대나무가 자랄려면 몇 달이나 걸리느냐고 물었는데

자꾸 대순만 솟으면 된다며 다른 대답을 한다.

아니면 대순만 나면 순식간에 자라는 것일까?

대나무만 길러서 팔아도 이 마을은 수입이 괜찮을 것 같다.

 

마을에 전망이 좋은 곳에 정자는 못지어도 넓은 평상을 만들어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 참 보기 좋았다.

길을 걷다가 지난 번 이 길을 걸을 때 너무 힘들어 완전히 탈진해

누워 쉬던 벤치가 있어 반가왔다. 비록 그 벤치에 이끼가 가득했지만

일부러 그 곳에 다시 누워 보았다.

 

율동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참 따스했다.

곡괭이로 겨우내 말랐던 땅을 갈아 엎으며 봄을 준비하는

아낙이 보기 좋았고

정성스레 가꾸어 놓고 조경을 해 놓은 산소 하나가 너무 보기 좋았고

가족묘인듯 개인의 묘를 모두 외국처럼 바닥에 뉘운 기념석을 만들어

이쁘게 만들어 보기 좋았고, 파란 하늘 아래 넓은 벌판에 있는

산 비탈을 경사지게 만들어 놓은 푸른 다랭이 논이 보기 좋았다.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율동마을의 정자에 앉아 등산화와 양말을 벗은 채로

한참을 앉아 쉬었다. 지난 번 이 곳까지 걷고 앞으로 넘어야 할 높은 산이

걱정스러워 콜택시를 불러 철수해야만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마을 옆으로 해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접어들었는데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이정표가 이상해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보통 직진길이라면 이정표의 날개가 180도 각도인데

이정표는 약 200도 정도의 각으로 보였고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작은 언덕길이 있었다.

그리고 길 바닥에 그 쪽이 맞는 길인 듯 빨간 페인트로 표시도 해 놓았기에

그 방향의 길이 아무리 봐도 둘레길이 아닌 것 같았으나

일단 가르키는 곳으로 가보자 하고 새로 포장되어 햇빛에 빛나는

가파른 세멘트 언덕길을 올라가니 길이 다시 갈라지는 곳에 이정표가 없다.

멈추어 서서 먼 곳의 오래된 길 높은 곳에 희미하게 둘레길 이정표가 보여

다시 내려와 바른 길로 방향을 돌려야만 했다.

이 길이 세상의 사는 이치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바르게 세상을 살다가 잠시 다른 길에 미혹되어 빠져들다가

혹시 이 삶이 내가 가는 바른 길인가 하고 먼 미래를 보면

제대로 길을 찾아 돌아오듯 이번 작은 계기로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 라고 쓴 내 트레킹 에세이의 제목처럼

길을 걷다보면 나 자신의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다.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와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힘들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녔음직한 길을 천천히 올라간다.

언덕에 올라오니 내가 잘 못 갔던 길이 보였다.

물로 그 길로 올라가다 다시 제대로 오는 길이 있는 듯도 했다.

그러나 그 길은 반대편 산 넘어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뒷밤골마을 이정표가 있는 끝에 도착해 또 오름길을 걷다가 보면 

또 다시 언덕이 나오기를 몇 번.

 

길 가 숲 속에 흙벽으로 만든 작은 너와집이 눈길을 끌었다.

저런 곳에서 민박을 할까? 인적은 하나도 없었다.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오니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이

내 시야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한참을 올라가다 하늘이 보이는 언덕 끝이 보여

이제 다 올라왔구나 하고 분지봉으로 가는 갈림길인

바람재 고개에서 잠시 쉬고 일어나 이제 하산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정표를 보니 길은 또 옆에 산으로 가라한다.

헛헛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이게 삶이다.

세상살다가 겨우 살만해도 어깨 좀 필려하면 또 다시

다가오는 어려움같이 지리산 둘레길의 모습이 어찌 이리도 닮았는지..

 

그래도 산 속 숲길로 올라가니 올해 처음 보는 진달래 꽃이 피어

있어 기분이 좋아 카메라의 줌렌즈를 들이 밀었다.

그 높은 곳에 산소가 있고 더 올라가니 아주 오래된 관을 쓴 비석이 있는

무덤이 있다. 비석 옆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을 읽어보니  

대정3년 (大正三年)이라고 써있기에 한국사에 대정이라는

연호가 없는 줄로 아는데 언제적일가 하고 확인해

보고 싶어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일제시대 약 1911년 다이쇼연호를

대정연호라고 쓰인 것을 알았다. 혹시 일본 사람의 무덤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묘비의 관을 보니 우리네 비석의 관 모습과 사뭇 달랐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은 한국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비문이 학생(學生)으로 시작되었으니 유교적인 한국식 표기였다.

추측해 보건대 일제시대에 한국인이 일본의 장묘문화를 접목한 것 같다.

산소와 비석은 가꾸지 않은 것을 보니 후손들이 사라졌거나 잊은 것 같다.

묘비 앞에 커다란 둥그런 바위가 있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무언가 감출려 했거나 혹은 보호할려고 했던 것 같은 인상이 들었다.

 

이제 편안한 숲길이 이어진다.

일부러 작은 오솔길 옆에 푸른 나무를 심어 놓았다.

산길은 나즈막하게 오르락 내리락하고 간간히 멀리 아래로 마을이 보인다.

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걷기도 하고 이끼가 가득한 돌무더기가 있는

부드러운 흙길을 걸으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한참을 걸었더니 멀리 하동읍이 보였다.

산기슭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의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노는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언덕을 넘어 내게 들린다.

 

이 곳에도 역시 손상된 이정표를 볼 수 있었다.

누가 이렇게 못된 짓을 했을까?

이렇게 길이 끝나는가 했는데 길은 다시 숲속으로 이어진다.

포장된 길을 따라 그대로 내려가면 하동읍이 될 것 같은데

둘레길은 일부러 숲길로 가는 길을 택해 숲을 선호하는

길벗들의 마음을 달래 주고 있다.

 

이 길은 동네사람들도 산책을 많이 하는 듯

길은 좁지만 길바닥이 잦은 발자국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숲을 나오니 동네 뒷산이 입구가 되어 버렸다.

커다란 나무가 동네를 지키고 있고 그 밑에 내가 평생 되뇌이던

하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하동읍사무실로 가는 골목 입구에 이정표는 아예 양 날개를 다 사라졌다.

다른 곳에서는 부러진 날개라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이 곳은 그마저 사라져 버렸다. 역시 도심은 각박한 세상인가 보다.

 

지리산 둘레길 하동안내센터에 들어가 인사하고

달콤함 커피한 잔 대접 받고 기념으로 둘레길 지도와 리본을 받았다.

 

이제...

나의 지리산 둘레길은 완성되었다.

이제 또 다른 대망을 길을 찾아 다음 달이면

대륙 저편으로 날아가 산티아고 까미노 순례길을

한달을 넘게 마음껏 걸어볼 참이다.

이제까지 길은 단지 예행 연습에 불과한 것이었다.

더 큰 트레킹 세상을 위해...나를 위해 건배 Salud...

부엔 까미노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