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4일차 (팜플로나 - 푸엔타 라 레이나)

carmina 2016. 6. 7. 23:31



2016. 4. 22


늘 그렇듯이 새벽에 세면을 위해 남여 공용 화장실을 갔더니

외국의 나이드신 아주머니들이 팬티와 티셔츠만 입고 볼일을 보러 나오셨다.

눈을 어디로 둘지 몰라 안절부절할 수 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랜턴 빛에 의지해 배낭을 챙기는데

제일 신경쓰는 것이 혹시 두고가는 물건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다.

모든 물건은 내 침대 옆에 있지만 유독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핸드폰 충전기다. 전기 코드가 많지 않으니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다.

그래서 나는 늘 충전기 밑에 침낭카버를 놓았다.

침낭은 절대 챙길 수 밖에 없는 물건이기에 침낭카버를 찾으러 가면서

늘 충전기를 회수했다.


이른 아침 알베르게 데스크를 지키는 호스피탈레로는 장애인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저런 모습에도 자원봉사를 하려고 애쓰는구나.


어둠 속의 도시를 빠져 나온다. 이제까지는 대개 화살표를 보고 방향을 잡았는데

이곳 팜플로나에서는 보행도로 바닥에 묻은 금속가리비를 따라 가야 한다.

내 앞에서 걸어가는 순례자의 걸음이 아주 부자연스럽다.

아마 발이나 무릎에 심한 부상이 있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힘들어 한다.

저렇게 하고도 떠나고 싶을까? 지금 이른 시간에 떠나는 것으로 보아

병원을 찾는 것이 아니고 몸 상태로 천천히 가야하니 일부러 일찍 나온 것이 틀림없다.


나는 일부러 도심을 걸어갈 때는 스틱을 쓰지 않는다.

스틱 끝의 금속이 딱 딱 소리를 내니 곤히 자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

마을을 벗어나야 스틱을 사용한다. 아직 잠들어 있는 도심 사이를 지나

한참을 걸었다. 아침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만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4월 하순인데도 손이 시렵다. 혹시나 해서 얇은 장갑을 준비했는데

이 것으로는 부족하다.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겠다.


나만큼이나 일찍 출발한 두 외국 아가씨가 길을 가고 있는데 뒤에서 보니

배낭 뒤의 작은 주머니가 열려 있기에 알려 주었더니 무척 고마와한다.

나도 내 배낭을 다시 점검해 본다. 대개 어둠속에서 배낭을 챙겨가지고 나오기에

이런 것이 소홀할 수 있다. 오늘은 내 배낭 옆에 젖은 양말과 팬티가 걸려 있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나 뿐만이 아니다. 모두 그렇다.


도시 끝에쯤 커다란 대학건물이 있다. 얼핏 보기에 대학에서도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것 같다. 대학이라도 해도 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도심의 거리와 연결된 넓은 잔디 속에 커다란 건물이 있어 학교라고 생각될 뿐이다.


큰 도로를 벗어나니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눈 앞에 보이는 노란 유채꽃밭. 이제까지 3일동안 보이지 않던 황금벌판이

지금부터 끝없이 펼쳐진다. 제주도에서 보던 유채꽃밭보다 넓은 것 같은

이 장관이 여기 저기 보인다. 그리고 끝없는 밀밭. 밀밭사이를 걷는다.

이제까지 보아오던 도심의 건물이 전원의 주택으로 바뀌고

동네 아저씨를 개를 데리고 산책나와 아침 밀밭사이를 걸어가고 있다.


"부에노이 디아스" 하니 반갑게 받아 준다.

내가 이렇게 스페인어로 인사하면 그 들은 상당히 반가워하며 내게 되 묻는다.

"아블로 에스파뇰?" (스페인어 해요?)

"운 뽀끼또" (조금 해요)

아주 간단한 몇 마디로 금방 분위기가 좋아진다.

그러나 그 뒤 그들이 쏟아내는 긴 문장들은 잘 모르겠다.

그냥 대충 알아듣고 "씨, 씨" (네, 네) 한다.


이른 시간에 까미노를 걷는 사람보다 바이크를 즐기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누군가 길가 돌로 된 까미노 이정표 위에 중등산화 하나를 올려 놓았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많이 하니 반드시 개의 배설물을 직접 손으로 주워 처리하라는

안내 판과 쓰레기통이 같이 걸려 있다.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애견과 같이 다니는

많은 현지인들이 개가 거리에서 용변을 보면 반드시 손에 비닐 장갑이나 봉투를 가지고

옆에서 용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밀밭사이로 길은 외줄기. 녹색과 노란색 사이로 연한 갈색 도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순례자는 녹색과 노란색은 눈과 가슴에 품고 갈색은 직접 발로 보듬어야 한다.


4번째 날은 그 유명한 용서의 언덕 (Alto de Perdon)을 올라가야 한다.

나무 사이의 이정표가 언덕까지 4.3 km 남아 있음을 알린다.

고도상으로는 팜플로나 출발지보다 약 300m 정도 올라가야 하기에

첫날의 어려움을 생각해서 힘들까봐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그 걱정은 내 입에서 터져나오는 감탄사에

들어 올 틈이 잃어 버리고 만다. 

멀리 보이는 산은 낮은 구름에 쌓여 있고 끝없는 밀밭은 심은 시기가 다른 듯

중간에 어떤 부분은 진한 녹색 그리고 어느 부분은 약간 연한 녹색으로 선을 그리고 있다.


발바닥이 아프다. 국내 트레킹을 할 때도 오래 걸으면 오른 발 바닥이 아파서

가끔 신발을 벗고 발바닥을 지압해 주면 괜찮아 지곤 했기에 앉을 곳 없지만

배수로 둑에 앉아 발바닥을 주무르고 있는데 중국인 순례자가 내 앞을 지나간다.

이제까지 중국인은 보지 못했기에 호기심으로 국적을 물으니 호주인이라 한다.

그러니까 호주에 사는 중국인이다.


길 가에 또 누군가의 무덤인 듯 나무십자가가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눈에 익은 노란 리본하나가 보인다. 세월호 상징 리본. 어제도 이 것을

어디에선가 봤는데 누군가 이 리본을 많이 가지고 다니면서 이렇게

세월호를 추모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언덕으로 가는 중간 마을인 자리꾸이에구이 마을에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배낭 속에 있던 오렌지로 하나로 갈증을 달랬다. 어제 길에서 반갑게 인사했던

이태리의 팔레리아와 어제 길에서 만났던 프랑스 여자가

오늘도 나보다 늦게 여기를 도착해 반갑게 인사한다.


마을 성당에서는 매시마다 종을 울리고 매 30분마다는 한 번 혹은 두 번 종을 울리는데

실제로 종을 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녹음된 소리는 더 더욱 아니다.

대개 이런 중간 마을의 카페에 앉아 있으면 오늘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있다.


다시 벌판 속을 걷다 보니 멀리 길고 비스듬한 산 위에 풍력 발전용 바람개비가

연속적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용서의 언덕이 저기 보이는 멋 곳인가?

안내지도의 거리상으로는 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 그렇게 멀리 걸어야 하나?


언덕을 오르는데 길이 아닌 곳에서 순례자 한 명이 걸어 올라오고 있다.

아마 급한 일을 보고 오는 것이리라.

순례길을 걸으면 일반 사회생활에서 자주 가던 화장실을 별로 안가게 된다.

몸의 분비물이 모두 땀으로 배출되기에 그만큼 대소변으로 나오는 것이 적다.

중동 현장의 사막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화장실을 별로 안가는 이유와 같다.


어느 정도 올라왔는지 저 멀리 건너편 산의 구름의 높이가 내 눈의 높이와 비슷하다.

그 아래 펼쳐진 파란 밀밭과 노란 유채꽃밭 그 사이에 이어진 도로들.

참 심플한 구조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평화를 느낄 줄이야. 


드디어 용서의 언덕에 올랐다.

산티아고 까미노를 얘기할 때 늘 대표적으로 보여지는 상징물이다.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순례자들의 지친 모습을 그린 철 구조물인데

바람에 그들의 머리와 옷들이 휘날리는 모습인지

혹은 지쳐서 쓰러지는 형상인지 모르지만 그 들의 모습이 힘들어 보인다.


오래 전 부터 Perdon 성당이 있던 자리에 성당이 없어지고 20년전에 스페인의

까미노 연합단체인 '까미노 친구들 연합'에서 세웠다 한다.

기념비에는 '별들이 바람에 따라 흐르는 길을 지나'라는 글이 써 있다.

누구나 이 곳에 오면 숙연해 진다고 한다.

나는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로부터 용서 받아야 하는가?  

나는 과연 용서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 사람은 과연 나를 용서해 줄까?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별들이 알리라,

바람이 알리라.

지금은 사라진 Perdon 성모가 알리라.

높이 세워진 바람개비들이 그 모든 용서할 것들을 다 날려 보내리라.


한참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제 보았던 두 명의 젊은이가 올라왔기에

같이 사진을 찍고 그 들에게 간이 카페에서 음료수를 하나씩 사 주었다.

그 언덕에서 체구가 건장한 사람이 오늘의 목적지에 있는 마을의

알베르게 선전물을 나누어 준다.


용서의 언덕에서 내려가는 길은 온통 자갈길이다.

용서 받았으니 조금 마음이 평화로워져야 하는데 발 길을 더 조심해야 한다.

용성 받았으니 앞으로 조심하라는 무언의 뜻인가?


길가 이정표 돌담에 누군가 점퍼를 벗어 돌로 눌러 놓았다.

아마 무언가 뜻이 있을 것 같다.

오랜 세월동안 순례자들이 하나씩 던진 놀이 커다란 돌무더기가 되고

결국 까미노 이정표는 머리만 간신히 보일 뿐이다.

가파른 언덕을 내려 오니 또 유채꽃의 평화가 밀려 온다.


오늘 아침부터 걷기에 조금 불편해 보이는 건장한 남자와 자주 마주쳤다.

허름한 옷에 얼굴의 모습도 무척 지친 모습이다. 어디까지 걸을 것인가?

그러나 그도 틀림없이 산티아고까지 걸을 것이라 확신한다.

일단 길을 나서면 내 발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의지로 가는 것이니

발은 그냥 따라만 와 주면 된다.


우테르가 마을 입구에 성당없이 성모상이 있다.

그 옆의 작은 철 십자가도 누군가의 묘지일 것이다.

그 곳의 넓은 돌 의자에 앉아 발바닥 마사지를 하면서 지나는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우테르가 마을은 들어서는 순간 눈이 부심을 느꼈다.

집들의 벽이 모두 하얀 색깔이고 도로 바닥도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하다.

단지 들리는 것은 마을 광장에서 끝임없이 나오는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뿐이다.


이 곳에서 점심을 위해 카페를 찾았다.

조용했던 마을이 갑자기 카페 건너편 집의 수리를 위해 인부들이 사용하는

전동공구 때문에 시끄러워졌다.

파스타 하나를 시켜 맥주와 함께 즐기고 있는데

한국인 단체 그룹으로 온 사람 한 명이 진한 사투리로 여기 앉아도 되느냐며

합석하고는 내 앞에 있는 한국 청년들에게 반말로 말을 건다.

그러면서 내 나이를 묻기에 환갑이라 했더니 자기는 62세라 한다.

금방 내게도 반말을 할 기세다.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라 말을 아꼈다.


식사 후 나서는 긴 벌판 길. 길이 저 멀리 언덕끝까지 이어진다.

멀리 보이는 길에 순례자 한 명이 점같이 걸어가고 있다.

나도 그가 간 길을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

길을 가다가 문득 옆의 풀 숲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새끼 손가락만한 하얀 생쥐다.

어쩌면 이렇게 같은 동물이라도 나라마다 다를까.

한국의 조그만 달팽이에 비하면 여기 달팽이는 왕달팽이 수준이다.

검은 민달팽이도 한국에서는 아주 작은 편이다.


벌판을 지나 만나는 무루자발 마을에서 보이는 알베르게들은

하루 묵고 싶을 정도로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 의자에 앉으니 내가 걸어 왔던 길들이 발아래 펼쳐진다.

오늘 목적지에 늦게 도착해도 이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배낭을 내려 놓고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오랜동안 건너편 벌판을 바라 보았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며 웃고 지나간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오바노스 마을로 올라가는 언덕에는 노란 화살표대신

길 바닥에 모두 가리비로 표시를 해 놓았다.

오바노스 마을은 세워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모든 건물이 깨끗하고 하다못해

성당도 최근에 지어진 듯 하다. 성당의 공터에서 쉬고 있던 프랑스 여자가 나와

사진을 같이 찍고 싶어 하기에 같이 포즈를 취하고 또 한 참 이야기했다.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 세워진 철 조형물은 아무래도 서울의 어디쯤 세워진 

조형물 같아 보인다. 그 주위에 예쁘게 피어 있는 양귀비꽃들이 반갑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 있는 알베르게가 길가에 나무 이정표를 세워 놓고

불어, 영어 그리고 한국말로 순례자를 호객하고 있다.

오늘의 목적지가 멀지 않다는 표시다.


오붓한 숲길이 끝나는 곳에 조금 큰 마을이 하나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알베르게가 하나 있고 거리에서 만난 제주도 아가씨들은 그곳에

묵고 있다기에 안부를 물었더니 괜찮다 한다.

나는 아까 용서의 언덕에서 받은 전단지의 알베르게를 찾아가기로 했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왕비의 다리'라는 뜻이다.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마을의 중심도로 양 옆에 있는 집들이 참 고풍스럽다.

그 곳에 멋진 성당이 있고 그 앞을 한참 걸어가면 커다란 돌다리가 있다.


내가 알베르게를 찾다가 길가는 순례자에게 물었던 자기도 그 곳을 찾고 있다며

같이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끝나는 곳에 언덕을 조금 올라가니 커다란

알베르게가 있고 내부도 넓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같이 올라간 오스트리아인이 자기랑 같은 2인용 방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권하기에 가격은 1불이 절약되지만 내 코고는 소리로

민폐가 될 것 같아 나는 다인실을 쓰기로 했다.

 

마을 중심과 거리가 멀어 저녁을 사서 해 먹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순례자 메뉴를 먹기로 하고 샤워하고 빨래하고

식당 겸 거실에 나와 일기를 쓰는데 오스트리아 인이 내게 말을 건다.

자기 이름은 '조'라기에 나는 '까르미나'라고 했다.

그 때부터 우린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며칠을 같이 다녔다.


저녁식사는 고급 서양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듯 품격이 있었고

제대로 격식을 차린 테이블 매너가 있었다.

같이 묵는 한국 사람들은 그 식사를 신청하지 않았기에

나는 많은 외국인들 중 한 명의 동양인이었다.


유난히 나이 들어 보이는 독일 여자가 있기에 나이가 궁금하다 했더니

77살이란다. 놀라웠다. 배낭을 지고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인생의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금발머리의 그녀는 웃는 모습이 우아했다.


그 곳에서의 저녁은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