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17일차 (템프라리오스 - 엘 부르고 라네로)

carmina 2016. 6. 12. 21:40


2016. 5. 5


지난 밤 누군가의 스마트폰 벨소리가 나를 몇 번 일으켜 세웠다.

알고보니 일찍 귀마개를 하고 잠든 이지노씨가 벨소리를 못 들었나 보다.

그리고 중대한 일인 듯 열심히 누군가와 문자로 대화하고 있었다.


오늘은 라네로까지 먼 거리라 일찍 출발했다.

그건 나 만의 생각이 아닌 듯 한국 단체 여행객들도 일찍 문을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니 역시 어제같은 긴 길이 이어진다.

차도를 걷게 되어 있는데 오가는 차량은 하나도 없는 시골길이라 굳이

순례자를 위한 길은 따로 확보해 놓지 않았나 보다.

내 등뒤로 보이는 아침 일출 풍경이 가히 환상적이다.

하늘에는 실바람이 부는 듯 새털구름이 아름답고

하늘 빛에 반사되어 흰 도로같은 흙길이 조금씩 물결치는 밀밭처럼

흔들리고 있다.


너무 일찍 출발하여 비록 멀지 않은 마을에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카페가 없을까봐 어제 저녁에 간식을 사 놓았는데 7시 조금 넘은 시간인데

마라티노스 마을에 카페가 문을 열었다. 커피만 주문하여 사 놓은 빵으로

아침을 먹고 카페 마당을 보니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흉칙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의 모형을 보았다. 그 모형은 피를 흘리고 있고

모형 까마귀들이 머리와 팔에 앉아서 살점을 뜯어 먹고 있는 장면이었다.

도무지 카메라에 담기도 싫어 얼른 그 집을 나와 버렸다.


이어지는 평원 길은 그래도 직선도로가 아니라 좋았다.

나보다 늦게 출발한 한국 청년들이 이젠 빠른 걸음으로 나를 추월해서 걷고 있다.

처음엔 도무지 걷기 힘들 정도로 어수룩하게 보였던 진주가 고향이 아가씨도

씩씩하게 잘 걷고 있었다. 이젠 제대로 탄력이 붙은 것 같다.


그 이후로 긴 길을 거의 혼자 걸었다.

작은 차도 옆 오솔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나는 아스팔트길을 오래 걸으면

다리 관절에 무리가 가서 힘든데 청년들 두 명은 오히려 아스팔트 길이 편한 듯

오솔길에서 벗어나 차도로 걸었다.


산 니콜라스 마을을 지나 넓은 광장에 두개의 석탑이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많이 본 음양의 문처럼 석탑은 똑 같은 모양으로

휑한 벌판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한쪽 사람이 든 문서에

"ORA ET LABORA"라고 써 있어 후에 검색해 보니

"기도하고 일하라" 라는 이태리어로  이 곳에 수도원 건물이

있었는데 모두 폐허되어 철거하고 이 석탑만 남겨 놓은 것 같다.


그 길을 지나 걷다가 문득 발에 무언가 밟힐 것 같은 느낌에 얼른 피해

땅을 바라보니   큰 달팽이 하나가 검은 궤적을 그리며 진행하고 있다.

그 흔적이 얼마나 오랜동안의 기간인지 모르지만 아직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달팽이의 진행 속도도 빠른 것을 처음으로 감지했다.


까미노중에서 제법 큰 도시인 사아군에 도착했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호텔이 도시의 규모를 말해 주는 것 같다.

오랜 동안 걸었기에 갈증이 나고 쉬기도 할 겸 호텔의 지하 카페에 들어가

오렌지 쥬스를 마시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른 순례자들도 모두 이 곳으로

쉬기 위하여 들어 왔다. 순례자들의 생각은 모두 똑 같은 것인가?


도시 외곽으로 기차가 다니고 있고 크지만 조용한 도시를 지나가는데

길가의 작은 가게 앞에서 쉬고 있던 스페인 아가씨가 이제 자기는

집으로 돌아간다며 나보고 끝까지 잘 가라며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었다.


까미노는 사아군의 중앙로를 통과하지는 않는 듯 조용한 주택가 골목을 지나

도시를 빠져 나가니 세아강을 건너는 큰 다리를 지나고 도시 외곽으로 길게 뻗어

나가는 끝없는 도로 옆길을 걸었다.


길가의 일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숲도 정확한 간격으로 조림이 되어 있고

마치 방역을 하는 듯한 차림의 남자들이 동네 잔디를 기계로 깎고 있다.

이런 노력이 도시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 같다.


차라리 들판길을 걸어가면 조금 편하련만 라네로를 향해 가는 긴 길은

한 낮의 뜨거움을 더 뜨겁게 만드는 아스팔트 도로 옆을 계속 지나게 되어 있어

순례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차가 자주 다니니 소음도 있어 더 불편했다.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도로 옆길을 걸을 뿐이다.

사아군에서 한 시간 정도를 걸었는데 커다란 보드에 까미노 방향이

하나는 실선 하나는 점섬으로 그려져 있다. 미리 숙지한 바에 의하면

여기서 라네로로 향하는 일반까미노와 로마도로를 이용하여 먼길로

우회하는 길이 갈라진다.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 망설이다가 소변이 급해 간판뒤에서 막 일을 보고 나왔는데

바로 루타 모녀가 뒤에 있었다. 하마터면 나를 좋아하는 모녀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줄 뻔 했다.


방향을 라네로가는 길로 잡고 걸어가는데 그간 보이지 않던 아주 넓은 유채꽃 밭이

도로 양옆으로 펼쳐지고 풍경이 아름다워 졌지만 먼 길을 걷는데 지쳐 어디 앉아

쉬고 싶어도 쉴 곳이 없다. 그늘도 없고 앉을만한 간이 의자도 없다. 어떤 이는

다리 밑에 그늘에서 쉬고 있긴 한데 루타가 조금 더 가면 마을 있으니 힘들더라도

거기까지 가자기에 계속 걸었다.  


다행하게도 중간에 베르시아노스 마을에서 점심을 샌드위치로 해결하며

내 신발과 옷을 보니 정말 가관일 정도로 먼지투성이였다. 이 모습으로

알베르게에 들어갈 수 있을까?


걷기 외에 또 다른 방법의 순례자가 앞에서 오고 있다. 말을 타고 있다.

스쳐 지나가기에 순례자냐고 물었더니 맞단다. 생장을 향해 가고 있다 한다.

얼굴이 검게 그을은 것으로 보아 아마 산티아고 순례 후 되돌아가는 것 같다.


겨우 라네로에 도착하니 넓은 중앙로 한 켠에 쌍용자동차의 무소가 보여 반가왔다.

인적 없는 마을에 다른 순례자에게 물어 공립알베르게를 찾아 방을 내정받았는데 

미리 도착했던 포르투갈의 파르코가 주방에 있다가 내 자리가 자기 방인 것을

알고는 항의를 했다. 지난 밤에 내가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단다.

난감한 주인은 다른 방을 배정해 주며 미리 여장을 푼 다른 이들에게

이 사람이 코를 조금 곤다고 하며 양해를 구했다.


문득 아침에 내가 왜 이지노씨를 못봤을까 궁금해 졌다.

지난 밤에 이지노씨가 남들 곤히 잠든 시간에 핸드폰을 이용하고

전화를 걸었다고 파르코가 불평했는데 혹시 이지노씨랑 언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시 늦잠을 잤나?  그 이후 그를 보지 못했다.

내가 그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10년 뒤에 까미노를 다시 찾아 오면

당신과 같은 방법으로 걷고 싶다고...

참 오래 만나고 싶었던 사람인데...


라네로는 조그만 마을 인 듯 알베르게가 부족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르게는 금방 만원이 되고

늦게 도착한 이태리 팀들 중 절반은 여유가 있었지만

나머지는 자리가 없어 택시를 타고 큰 도시 레온으로 가서 잔다고 떠났다.


여장을 풀고 옷을 갈아입으려다 문득 밤에 잘 때 입는

오렌지색 반팔 티셔츠가 보이지 않았다. 아차! 오늘 아침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 입는다고 침대 옆 라디에이터에 걸어 놓은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늘 숙소 방문을 나서다가 다시 되돌아와

내 침대 주변과 밑바닥을 살피는 습관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이런 실수가...이제까지 조심했는데... 


저녁에 청년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 만들어 먹기 위해

마트에 갔다가 또 다른 형태의 순례자를 보았다.


당나귀에 온갖 숙식용 생활용품과 당나귀 먹이통까지 매단

헝가리 남자가 당나귀 먹이를 주고 짐을 정리하고 있기에 물었더니

당나귀를 데리고 노숙을 하며 산티아고까지 다녀 온 후 지금

부르고스로 돌아간다며 그 곳에서 일본에서 온 사람에게

당나귀를 팔기로 했다한다. 그 일본인은 친구가 역시 당나귀를 한 마리

더 가져와 둘이 산티아고를 걷기로 했다며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당나귀의 엉덩이를 막대로 치며 걸어가 버렸다. 


알베르게가 만원이 되어 호스피탈레로도 장부를 치우고 나가버렸기에

다른 순례자들이 찾아와 문에 붙인 'Completo (완료)'라는 표시를 보고

발길을 돌렸는데 독일 아가씨 한 명이 무작정 쪼그리고 앉아 호스피탈레로를 기다렸다

우리가 마트를 다녀 온 뒤에 여장을 풀고 옷을 갈아 입어 이상해서 물었더니

호스피탈레로 방에서 그녀와 같이 자기로 했다한다. 참 대단한 아가씨다. 


알베르게 앞 의자에 앉아 쉬는데 파르코가 지나가기에 웃으며 얘기했다.

까미노 필수품이 귀마개인데 안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자느라 꺼낼 틈이 없었단다.

코고는 소리 외에 누군가 전화벨소리도 들리고

스마트폰 불빛과 또닥 거리는 소리에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다.

그래서 나도 때로는 다른 사람 코고는 소리에 잠을 못잘 때도 있다 했다.

까미노에서는 다 그런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했더니 기분이 조금 풀어졌는지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식사 후 갑자기 누군가 '비 온다' 하기에 우리 청년들이 서둘러 나가 빨래를 걷고

남의 빨래까지 걷어 실내로 옮겼다. 착한 청년들.


밤에 자는데 누군가 나를 건드리는 느낌을 두 번 느꼈다.

아마 내 코고는 소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밤새 천둥치는 소리와 창문 흔들리는 소리로 잠을 더 설쳤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