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18일차 (라네로 - 레온)

carmina 2016. 6. 13. 08:55



2016. 5. 6



지난 달 18일엘 파리를 떠나 온 이래 면도를 하지 않았다.

나는 내 턱수염이 아직은 까만 털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온통 흰 색이었다. 그 중 몇 개가 까만 털이었고..

턱 수염이 생긴 이래 이렇게 길게 길러 보긴 생전 처음이다.

이제는 콧수염과 턱수염을 손으로 잡아당기면 살갗이 같이 따라온다.

그 기분이 묘하게 좋다. 이때 아니면 언제 기르랴.

지난 직장생활동안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나이 든 외국인들이

흰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곱게 빚은 긴 뒷머리를 고무줄로 묶어

꽁지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이 부러웠다.

그런데 외국인들처럼 내 수염은 그리 숱이 많이 없어 보기엔 좀 그렇다.

미국의 컨츄리 음악 가수인 케니 로저스같이 되고 싶었는데..

이 곳에서는 내 모습에 대해서 뭐라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이 참에 그런 것도 해볼까?

  

비가 온다.

간밤에 천둥이 치고 거센 바람 소리에

비가 많이 올 줄 알았는데 다행하게도 소낙비는 아니다.


모두 대문을 열기 전 우비를 착용하고 있다.

어둠 속 마을을 지나는데 맑은 날 나를 즐겁게 해 주던

새소리는 사라지고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린다.


도로를 따라 걷는 한적한 길에 그 이른 시간임에도

택시가 마을 쪽으로 가는 것을 보니 어제 레온에 가서 잔다던

이태리 이태리 일행이 택시를 타고 마을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1시간을 넘게 걸어도 승용차는 없이 택시만 몇 대 오고 갔다.

그러다 보니 비에 젖은 도로옆 흙길대신 순례자들은

차도로 걷는 것이 편했다.


이제까지 길 옆은 온통 밀밭이었는데 이 곳에서는

무성한 잡초와 안개꽃같이 흰 꽃과 노란 꽃이 가득 피어있다.

날이 훤히 밝아 오는데 어디선가 기차 소리가 들린다.

어제 알베르게의 벽에 기차 시간표가 적혀 있던데

레온가는 기차가 지나가는가 보다 했는데 비록 멀지 보이지만

차량수가 많은 것을 보니 화물 기관차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한 참 뒤에 다시 기차소리가 들려 보니

이번에는 차량 2개를 달고 다니는 승객용 기차였다.


이제까지 본 밀밭은 바람에 쓰러진 것을 보지 못했는데

이 곳에서는 우리나라 폭풍에 벼 쓰러지듯이 밀들이 군데 군데 쓰러져 있다.

이 곳만 그런걸까?

이 곳은 유채꽃도 마구 자란 야생화같이 자라고 있다.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길가 순례자 쉼터가 모두 젖어 있어

계속 걸어야만 했다. 배가 고파 비 맞으며 먹을까 했으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할 것 같아 참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거의 걷는 순례자가 보이지 않았다.

한시간을 넘게 걸어서야 비를 막을 수 있는 천정이 있는 쉼터를 발견하고

아침을 빵과 쥬스로 먹는데 멀리서 어제 같이 식사한 한국인 청년 두명이

우비를 휘날리며 걸어 오고 있기에 다른 사람은 왜 없냐고 물어 보니

조금 늦게 출발했으니 곧 따라 올거라 했다.

그 한적한 쉼터에도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어 주변이 깨끗했다.


길 가 나무에 누군가 모조 꽃다발을 단단히 묶어 걸었다. 무슨 의미일까?

아마 오랜 세월 동안 순례자들의 카메라의 포커스가 될 것 같다.


무려 13km나 걸어서야 첫번 마을인 렐리고스 마을에 도착했다.

비교적 커피 값이 싼 카페에서 큰 사이즈로 뜨거운 커피를 가득 마셨다.


당초 까미노를 시작할 때 부터 내 일정은 32일에 맞추어져 있어

라네로에서 약 19 km 지점의 마을인 만시야 데 라스 뮤라스에서

멈추기롤 되어 있었는데 그다지 많지 않은 비가 오니

걷기가 편하고 아직 11시경 도착할 것 같아

시간이 일러 알베르게가 문을 여는 시간이 아니라 그냥 더 걷기로 했다.


이 곳에는 야영자를 위한 시설이 있으나 누구도 야영한 흔적은 없었다.

아마 지난 밤에 비가 오니 야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가 와 강물이 흙탕물로 변해 큰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비가 오니 도무지 앉아서 쉴 곳도 없었는데 만시야 가까이 와서

어느 문닫힌 알베르게 옆 주차장에 천정이 있는 빈 공간이 있어 들어가 한 참을 쉬었다.


길을 가는데 마주 오는 사람이 한 손에는 작은 봉투를 들고

길에서 무언가를 주워 봉투에 넣는다. 들여다 보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니 길에 많이 나와 있는 달팽이를 줍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달팽이가 고급 요리 재료로 쓰인다는데... 


아직 시간은 이르지만 만시야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 가니

동네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우비를 걸친 내가 들어 오는 것을 보고

모두 시선을 내게 주고 있다. 비록 머리칼은 비에 안 젖었지만

텁수룩한 흰 수염에 땀으로 폭 젖은 내 머리가 이상했던지

일하는 종업원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이 곳은 메뉴를 몇 개 골라서 먹을 수 있어 따끈한 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늘 같이 걷던 한국인 청년들에게 비가 와 걷기 최상의 조건이니

오늘 레온까지 갈 것이라 카톡으로 알려 주었다.


식사 후 동네를 벗어나는데 브라질에서 온 여자 순례자가 이쪽으로

가는 길이 맞느냐며 말을 건넨다. 나도 모르지만 이정표를 같이 찾아 걸었다.

길은 마을의 옆을 지나 흙길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듬성 듬성

물 웅덩이가 많아 조심해서 걸어야 했다.


빗길을 한참 걸어 푸엔테 비야렌테를 지나고 이후로도 끝없는 평원을 걸어

아르카우에하 마을입구에 도착해서야 쉼터가 있었다.

오랜 전에 만든 마을 공동 쉼터에 음수대가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먹지 못할

물이라고 적혀있다. 아마 오랜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위에 써있는 반가운 거리표시. 산티아고가 307km 남았다.

아! 이제 곧 300km대로 들어가는구나.

외국인 부부도 이제까지 걷다가 지쳤는지 이 곳에서 한참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을로 올라가는 언덕길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대평원을 거의 오르막없이 걸어왔는데 며칠만에 다시

작은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대평원이라도 해발 800m 에 있기에

이미 그 자체로도 북한산 정도의 높이에서 걷고 있는 것이다.

인적없는 마을길, 문을 연 카페도 없다. 그냥 걷는 수 밖에...


특별한 지형지물 없이 걷기를 또 한 시간.

왼쪽에 듬성 듬성 집들이 보였다. 발데라후엔테.

그런데 대개 까미노는 마을 한 가운데로

지나도록 되어 있는데 이 마을은 알베르게가 있다고 표시되어 있지만

마을의 옆 길을 지나고 있다. 약국도 있고 우체국도 있다고 홍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베르게 외에 다른 요인으로 슨례객들에게 관심을

던져 주고 있다.  그 곳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는 개들이 짖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나 다시 또 조그만 언덕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큰 개 한마리와

작은 개 한마리가 언덕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머리칼이 쭈뼛 솟고

등골이 오싹해진다. 혹시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일부러 발길을 천천히 옮겼다.

개들도 내 눈치를 알았던지 슬금 슬금 옆으로 비켜 준다.


언덕 올라가서 또 한참을 걸어서야 레온이 가까워 지는 듯 특별한 마을 표시도 없는데

집들이 많아졌다. 흙길이 지나니 갑자기 도시 외곽인 듯 주택단지가 아닌

상업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들이 많아지고 외국 유명 자동차 레이블이 붙은

자동차 판매장, 자동차공업사들, 타이어 판매가게,작은 공장 건물들과 각종

시설들. 나는 그 거리에 운송수단이라고는 말과 걷는 것 밖에 모르는

온 중세시대의 순례자일 뿐이다. 자동차를 타 본지 벌써 18일째였다.


차도를 넘어 길 건너편으로 가는 육교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도 되는

지그재그식 경사형 육교다. 대 평원을 건너온 바이크 순례자가 이 길을

지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비가 와 질퍽한 길을 조금 더 걸으니 눈 앞에 레온이라는 대 도시의 위용이

펼쳐진다. 그리고 고속도로가 그 길을 가로 지르고 있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런데 이젠 다리가 뻣뻣해지고 마비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오늘 조금 무리를 하는 것 같다.

이 상태에서 더 걸으면 아무래도 앞으로의 일정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앉을 곳도 없는 다리 입구에서 무조건 주저 앉았다. 다행하게도 비의 양이

잦아졌다. 그렇게 한 참을 쉬며 다리를 맛사지하고 있으니 지나가던

다른 순례자들이 내가 쉴 곳도 아닌 곳에서 쉬고 있으니 걱정스러운

말을 건넨다.


다리를 건너니 완전 도시로 들어왔다.

길 옆 성당의 종탑의 꼭대기와 양쪽어깨에 황새들이 집을 지고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마치 우리 나라 숲속 나무의 까치집을 보는 것 같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의 물이 불어 고수부지를 넘어 올 기세로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다.


길을 걷다가 문득 현대식 건물에 있는 알베르게 표시 간판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어 반가움에 들어가 가격을 물어 보니 10유로,

깨끗해 보이기에 마음은 동했으나 대성당과 거리가 멀다 해서

포기했다. 어느 새 브라질 여자가 내 곁에 따라 붙어 서로

대성당 가는 방향과 알베르게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로타리 건너편 간판에 맥도날드와 KFC 선전이 있어 갑자기 힘이 솟았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시내를 한참 걸었다. 복잡한 거리에 알베르게 방향 표시가

여러개 보였지만 공립알베르게는 아닌 것 같아 여기 저기 걸어 보는데

오래 된 성벽과 건물이 있기에 이쯤에 알베르게가 있을 것 같아 두리번 거리는데 

방향을 잡아 가는데 배낭을 멘 사람들 몇 명이 길가 행인에게 길을 물어

우르르 어디론가 가기에 따라 갔더니 그 곳에 산타 마리아 성당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고 호스피탈레로 한 명이

줄을 서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세고 접수하는 이에게 인원 수를 가르쳐주기에

내가 늦게 도착했으니 어쩌면 다른 곳을 찾아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을 보니 내가 오늘 거의 9시간을 걸은 것 같다. 거리상으로는 약 38km.

그래도 평지라 그렇게 긴 거리를 걸었고, 비가 왔기에 덥지 않아 가능했었다.


체크 인을 하며 옆에 주방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거의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방에 빼곡한 침대의 좁은 공간에 짐을 풀고

우선 땀에 젖은 옷을 벗어 양말과 팬티 외에는 빨지도 못하고 그냥 비닐 봉지에

챙겨 넣었다. 워낙 사람이 많고 비가 오니 빨래를 해도 널어 놓을만한 곳도 없다.

문 앞 침대라 밤에 약간 불편하겠다 생각했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틈이 없었다.

비에 젖은 사람들이 많고 지하 공간이라 그런지 너무 눅눅한 느낌이 들어

밖으로 나왔더니 또 다른 안면있는 이태리 독일 친구들이 나보고 한국말로

'안녕'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이 들도 나처럼 오늘 긴 거리를 걸은 것 같다.


문득 아이들 두 명과 남자 두명 그리고 여자 한 명의 가족같이 보이는 

한국인들이 있기에 인사를 했더니 맥도날드로 식사하러 가는 듯해서 

슬그머니 우비를 쓰고 뒤를 따라 나서며 동행했다.


길가 행인에게 물어 맥도날드 대신 버기킹을 발견하여 서로 마주 앉았는데

여자분이 내게 "혹시 까르미나님 아니세요?"하고 묻기에 깜짝 놀랐다.

전혀 초면의 얼굴인데 나를 알고 있다. 네이버 카페 까친연에서

내 얼굴을 보았단다. 한국에서 출발 전에 내가 배낭을 메고

이제 떠날 준비하고 있다며 사진을 올렸는데 그 밑에 댓글을 달았다며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수염도 가득한 나를 알아보는 것이

참 신기했다. 자신의 아이디를 말하기에 내 글에 자주 댓글 단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가족이 학기 중에 나와 조금 이상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도

농아라 내 이야기를 모두 수화로 남편에게 전해 주었다. 그 분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식사 후 그들과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비가 와도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대성당 앞의 넓은 광장에

어느 책자에서 본 레온이라는 상징 표시가 반가왔다. 대성당 관람은

입장료를 받는다기에 나 혼자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난 미국인들 일행을 만나 어린 시절 내 신앙의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 한참 얘기했다. 그는 참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듣고는 내게

"고맙다"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들은 이 곳에서 하루 더 쉬겠다 한다.


성당에서 저녁 식사를 예약한 사람들이 어디론가 몰려 가고 나는 

저녁 9시도 되기 전에 침대로 올라가 잠을 잘려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몸이 무척 피곤할텐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내가 저녁으로 콜라를 먹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알고 후회했다. 

간밤에 방문이 자주 열려 누군가 불평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소리가 비몽사몽 아득하게 들렸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