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부엔 까미노

산티아고 까미노 20일차 (산 마르틴 - 아스토르가)

carmina 2016. 6. 13. 15:11



2016. 5. 8


1000년전에 순례자들은 어떻게 산티아고까지 갔을까?

걸어서, 마차를 타고, 말을 타고 그리고 뱃길 따라서..

그 때도 이렇게 길이 힘들었겠지?

지금은 전 구간이 위험한 길이 아니지만 그 때는 수많은 강도들이 있었고

숙소도 별로 없었을테고, 가는 곳마다 선교의 임무도 있었으니

더 많은 세월을 보내며 산티아고로 갔을 것 같다.

그 당시 누군가 까미노를 걸으며 쓴 책이 있다면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아침에 문을 여니 비가 내렸다. 그것도 주룩 주룩.

마을 끝에서 노란 화살표가 각각 방향이 다르게 그려져 있어

먼저 길을 나선 외국인이 길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직진길이 까미노고 다른 골목길은 알베르게로 가는

화살표일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자기는 골목으로 들어가 보겠단다.


걷다 보니 내 말이 맞았다. 그는 멀리 마을을 돌아 다른 방향에서

내가 걷는 방향으로 나오고 있었다.


도로를 따라 걷는 좁은 오솔길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길이 너무 좁아 내 바지가 계속 풀잎을 스쳐야만 했다.

내 신발이 방수이니 어느 정도 막아주겠지 했지만 그래도

고인 빗물을 밟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계속 좁은 풀숲 길을 다니니 바지가

금방 젖어 버리고 내 신발로 들어 오는 물은 신발이 물에 빠져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바지에 흘러내린 빗물이 신발 속으로 스며 들어 오고 있다.

이미 왼편 발은 물이 흥건해 질퍽거리고 오른 쪽은 아직은 견딜만 하다.


풀숲을 밟으며 걷다가 문득 무언가 내 발에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차. 달팽이를 밟았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욕심같아서는 옆의 차도 위로 올라가 걷고 싶지만

위험 천만한 일이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길이 조금 넓어져 다행이다 싶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흙탕길이 많다. 그것도 피해가느라 도무지 다른 곳에 신경 쓸 틈이 없다.


푸엔테 데 오르비고에서 아침을 먹으며 테이블 위 내프킨을 잔뜩

빼서 신발 속에 쑤셔 넣어 물기를 제거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느라

주인이 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양말의 물을 짜보니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렇게 하고 다시 신발을 신으니 고였던 물이 제거되어 조금은 나은 편이다.

다시 길을 나와 마을을 지나니 폭이 아주 넓은 오르비고 강위의 다리를 건넜다.

다리 건너 마을에는 순례자 외에는 인적도 없다. 마을을 지나 다시 긴 벌판길.

그래도 벌판길은 빗물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피할 수 있다.


마을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는데 두 남자가 배낭도 없이 우산을 들고 까미노를 걷고 있다.

그러다가 작은 언덕에서 흙탕길을 만나니 난감해 하는 표정이다.

물론 나도 그렇지만 그래도 조심 조심 흙탕길 중 발을 딛을만한 곳을

찾아 이리 저리 움직였다. 다행이도 그 흙탕길은 그다지 길지 않아

금방 아스팔트 도로로 나와 길을 걸어 예쁜 집들이 있는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을 지나

다시 진행을 하고 누런 흙탕물이 개울을 넘칠 정도 흘러 내려 도로를 적시는 

산티바네즈 데 발데이그레시아스 마을 카페에서

오렌지 쥬스 한 잔을 마시며 와이파이를 이용했다.


오늘은 한국의 어버이 날이라, 어떻게든 우리 집에 모여 있을

처가식구들에게 카톡으로 영상전화를 해야 한다.

아직 장모님이 안 오셨다기에 다음 마을에서 하기로 하고 다시 나와 길을 걷는데

아스팔트 길에 위에서 쏟아지는 빗물들이

강물처럼 내려오고 그 뒤로 순례자들이 내 쪽을 향해 걸어 오고 있기에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진흙길이 너무 심해 도저히 앞으로 갈 수 없다며

되돌아와 자동차 다니는 길로 가는 중이란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어차피 까미노의 모든 마을은 자통차로

갈 수 있는 곳이기에 바이크 순례자도 그 길을 주로 이용한다.

길은 모르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가면 맞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대로 걷다보니 그 곳에서 노란 화살표가 있었다.

아마 바이크 순례자를 위한 화살표같다.


얼마 가지 않아 큰 도로 옆의 세멘트 길로 된 순례길을 찾았다.

까마득하게 먼 곳에 있는 언덕길을 향해서 가야 한다.

비가 와도 이 정도 길이면 충분히 걸을만 하다.


낮은 경사의 긴 긴 언덕을 꼭대기에 올라 이정표를 보니

내가 걸은 길은 바이크 까미노고 도로 반대편에 원래 갈려고 했던

까미노가 따로 표시되어 있었다. 만약 그 길로 왔다면

아마 우리 모두 바지가 거의 흙범벅이었을 것이다.


그 고개 정상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데 멀리 하늘 끝에

먹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이 있기에 희망을 가졌는데

나중엔 그 먹구름이 맑은 하늘을 덮어 버렸다.


그래도 가끔 내가 걷는 길에 잠시 햇빛이 비치기도 했지만

그냥 잠시뿐. 비는 여전히 쏟아졌다.

언덕 위 평지를 한참을 걸어 산토 토르비오 돌십자가가 있는 곳에 오르니

저 멀리 산 후스토 마을이 보였다. 역시 이 십자가에도

세월호의 상징인 작은 노란 리본이 걸려 있었다.


언덕 위에서 며칠 전 만난 미국인 칼슨을 만나 반갑게 이야기하며

내가 레온 전에서 이틀 걸을 거리를 하루에 걸어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더니 자기는 그것을 "RESET"이라고 부르는데

자기는 두번 리셋했다며 웃었다. 그리고는 오늘 숙박하는 곳에서

같이 다니던 독일 청년의 생일파티를 해 주기로 했다며 기대하고 있다.

그 청년은 자전거를 가지고 다니는데 하루에 가는 거리가

걷는 순례자들의 거리와 같다기에 둘이 한참 웃었다.


산 후스토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집으로 영상통화를 하여

장모님께 어버이날에 외국에 나와 있어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축하를 드렸다. 텁수룩한 수염으로 인사드리는 모여있는

가족들이 모두 이상하다고 웃었다.


커다란 마을인 산 후스토를 지나 아스토르가 가는 길은 편했다.

기차가 다니는 길이 가로막혀 있어 높은 지그재그형 육교를 넘어야 했고

그 뒤로 이어지는 예쁜 야생화들이 참 보기 좋았다.


까미노 마을 중 유명한 아스토르가에 도착했다.

앞서가는 순례자의 바지 아래가 모두 흙범벅인 것을 보니 그는

바이크 도로로 오지 않고 제대로 순례자의 길로 온 것 같다.

마을 언덕을 올라가며 언덕 입구에 성당 앞 알베르게가 있어 지나쳤지만

어떤 이가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면서 그 알베르게 좋다기에

발길을 돌려 찾아간 시에리아스 데 마리아 알베르게는 정말 좋았다.


우선 호스피탈레로들이 친절했고 빗길에 걸어 온 순례자들을 위해서

갖은 편의를 다 봐 주었다. 그 곳 방명록에 누군가 영어로 생장 이후

제일 좋은 알베르게라고 평해 놓았다.  이 곳에 안면있는 이태리와

독일 친구들이 투숙했고 며칠전 레온에서 만난 한국인 가족도 만났다.


짐을 풀고 나와 마을 한 복판에 이 곳에 있는 가우디 작품인 주교관을 보며

점심식사를 했다. 이 곳은 지금 가우디 박물관이라 하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이 명상음악을 들으며 쉴 수 있는 강당이 있었고

히터를 틀어 빨래나 신발을 말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잠시 베란다에 나와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생일축하 노래가 들린다.

알고보니 그 청년이 이곳에 묵었고 모두다 접수대 앞에서 모여

박수치며 젊은 순례자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다. 칼슨은 조금 늦게

들어왔다.


주방에서 하루 여정을 메모하고 있는데 옆에 아주 뚱뚱한 체격의

남자가 와인을 혼자 마시며 니를 길에서 본 적 있다며 내게 한 잔을 권한다.

러시아에서 왔는데 몸집이 너무 커 걷기 힘들어 하루 10km도

걷지 못한다며 말을 할 때도 힘든지 식식거렸다. 영어로 말하기는

하는데 도무지 맞지 않은 영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도 쉬지 않고

내가 미처 대화를 끼어 들 여유도 없이 말을 하고 있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방에 밧데리를 충전할 곳이 없어 호스피탈레로가

알려주는 건너편 방 코드에 연결하고는 아침에 잊을까봐 그 밑에

배낭커버를 올려 놓았는데 다음 날 아침 그 건너편 방에 문이 잠겨 있어

나가지도 못하고 애를 태우니 마침 다른 호스피탈레로가 자기가 챙겨

두었다며 내게 건넨다. 고마운 사람들.


부엔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