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걸으면 내가보인다/여기저기 코스

해파랑길 - 부산 구간

carmina 2016. 8. 4. 10:49



2016. 8. 1 ~ 8. 2


올해 6월 트레킹 코스와 관련하여 정부에서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전국을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코스를 산티아고 순례길을 언급하면서

약 4,500km의 코리아 순례길을 만들겠다고 하며 이미 많은 부분이

완성되어 있으니 전 세계인이 찾는 걷기 여행길로 만들겠단다.


생각해보니 거리상으로는 맞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섬을 제외한 전국토를 한 바퀴 도는 것만 해도

대략 계산해도 약 2500km 정도 되겠고 각 지역의 코스도 일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구불 구불하니 길이가 더 길어 질 것이고

각 섬의 트레킹 코스들을 합치면 4,500km 정도 될 것 같다.


그러나 걷기 코스라는 것이 그냥 도로를 걷는 것만을 말하는 것일까?

적어도 '트레킹 코스'라는 말이 들어갈 정도면 모든 인프라가 다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데

트레킹 매니아로서 그 사항이 제일 궁금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긴 트레일 코스라고 하면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그리고

최장 트레일 코스라는 해파랑길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지리산 둘레길은 100% 완주했고 올레길은 약 90% 정도 완주상태다.

해파랑길은 부산의 오륙도에서 시작해 강원도 고성의 통일 전망대까지 약 770km를

걷는다.  부산구간, 울산구간, 경주구간, 포항구간, 영덕구간, 동해-삼척구간, 강릉바우길 구간,

양양-속초구간 그리고 고성구간으로 나뉘어 진다.

그 중 일부인 영덕구간인 블루로드를 오래전에 걷고 좋은 추억이 있기에

이번 기회에 해파랑길이 시작되는 부분을 가보고 싶었다.


부산구간은 오륙도 해맞이동산에서 시작하여 울산쪽으로 올라가는 4개 코스로

약 74km 정도 이기에 3일이면 될 것 같다. 

8월 1일부터 3일 걸으려는 계획과 오륙도에서 일출을 보고 싶은 욕심에

서울에서 밤열차를 타고 내려갔다.

직장 생활중 퇴근할 때 늘 밤 늦게 영등포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맞은 편

국철 노선에서 KTX나 새마을호를 타고 아랫녘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보면

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오늘은 내가 그 열차안에서

맞은 편 전철 플랫홈의 사람들을 보고 있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새마을호는 빈 좌석이 없었고 입석표를 끊어 서서 가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불과 2달전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가는 밤열차를 탔을 때

비록 좁은 자리나마 앉은 채로 푹 잔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려니 했는데

수시로 들려 오는 정차 안내 방송때문에 잠을 설치면서 귀마개를 가지고 오지 않음을

후회했다. 더우기 한참 잠들어 있는 시간에 중간 어느 도시쯤에서 탄 남자가

내 옆에 앉더니 계속 전화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 매너없는 사람.


새벽 4시경 부산역에 도착하니 몇 년 사이에 부산역 건물이 놀랍게 변해 있었다.

아직 시간이 일러 버스도 전철도 없다. 핸드폰 충전을 위해 역사에서 겨우 한 곳을 찾아

충전하며 시간을 보내고 일출시간 5시 반 전에 오륙도에 가있어야 할 것 같아 택시를 탔다.

택시는 어디인지 모르지만 이전에 보지 못했던 전용도로로 달렸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오륙도 해맞이동산앞에 거대한 SK뷰 아파트가 압권이다.

그 곳에 해파랑길 안내센터가 있고 잘 만들어 놓은 동산에는 벌써 다른 사람들이 와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면서 오늘 일출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구름덮인 하늘을 보니 안타까왔다.


바다에 안개인지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눈 앞에 보이는 오륙도의 바위섬만이 몇 개 보일 뿐이다.

해파랑길 안내센터 뒤로 1코스의 출발점인 이기대해안 산책로의 목재 가드레일이

길게 이어져 있다. 해파랑길 코스 안내판에 이기대에서 동생말까지 4km거리가 넘는 것을 보면서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 퍼뜩 생각났다. 물을 안 챙겼구나.

부산역 편의점에서 물을 사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냥 나와 버렸다.


안내센터옆의 깨끗한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출발하니 아파트 주민들이 산책차 오르내리고 있다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다 내려오는 나이 지긋한 분이 내게 먼길 가는 것 같다고 말을 걸더니

지금 보이는 바다가 남해인지 동해인지 묻는다.

위치상으로 남해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더니 오륙도를 기점으로 왼쪽은 동해이고

오른쪽은 남해라 알려 준다. 길을 걷다보면 누구나 다 내게 스승이다.


이기대 해안길은 원래 없던 길을 만들어 놓아서인지 절벽길에 가드레일을 설치해

안전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아쉬웠던 것은 연무로 인해

파란 수면을 볼 수 없어 금오도의 비렁길과 비슷한 형상이었지만 걷는 느낌은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다.


해가 바다 안개속에서 한참 높은 곳에서 연한 붉은 색으로

겨우 고개를 내밀었다. 자기 색이 완전하지 못하니

수면에 비친 긴 그림자도 역시 연한 붉은 빛으로 드리울 뿐이다.


끊임없는 나무계단과 나무 데크가 이어진다.

나무들이 우거져 아주 가끔 바다 안개 속에 갇힌 커다란 화물선이 보일 뿐이다.

드디어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다. 목이 마르다. 물이 없다.

거의 5km를 걸어야 첫번 경유지인 동생말이 나오는데

걷기 시작한지 1시간도 안되어 갈증이 치솟는다.

어쩔 수 없이 내 앞을 마주오는 이가 손에 물병을 들고 있기에 한 모금을 신세지고 나서도

이젠 앞으로도 뒤로도 돌아갈 수 없을 때 쯤 동네사람인 듯 한 이에게 물을 물어 보니

15분 정도 걸어가면 약수터가 있다기에 힘을 얻었다.


그러나 15분도 못가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약수터가 나왔다.

물을 음용이 가능하다는 표지판도 없지만 산에서 내려 오는 물일테니

그냥 손으로 받아 벌컥 벌컥 들이 마셨다.

심한 갈증을 풀고 지나가면서 혹시라도 근처에 빈 물병이라도 있으면

받아갈려고 두리번거리니 마침 10미터 전방 쯤 나무 의자 위에 물병을 발견하여

들어 보니 물이 가득차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물병에 어떤 종류의 액체를 담았는지

적혀 있는 라벨이 전혀 없다. 마개를 손으로 따보니 따닥하고 소리나는 것이

사용하지 않은 듯 싶었지만 확실하지 않아 내용물을 다 버리고 약수를 받아

몇 번 헹군 후 물을 채우고 다시 길을 떠나니 여유가 생겼다.


새벽부터 걸었기에 아침을 먹지 못했는데 마침 간이 매점이 있어

문 앞에서 사람을 불렀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다가 한 참 뒤에야

뒷편 간이 건물에서 아주머니가 나오시더니 컵라면을 판다기에

돈을 지불하고 뜨거운 물을 받고 물도 한 병 비싼 가격주고 사고는

기분 좋게 탁자에 앉아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데... 이런..

컵에 받은 물이 그다지 뜨겁지 않아 라면이 익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문을 잠그고 사라져 버리고..

두 젓가락 들었다가 라면을 그대로 두고 왔다.

물 한병도 거의 3배 가격을 주고 샀고 라면도 두 배 정도 가격으로 사서 먹지고 못하니

기분이 씁쓸했다.


그 곳 부터는 평탄한 길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차를 동생말에 세우고 산책삼아서 걸어 오는 것 같다.

동생말이 가까이 오니 커다란 바위들을 나무덱크로 연결해 놓은 스카이워크 길을

걸을 때 다리가 출렁거린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용호부두에서부터 이어지는 도심 거리.

이 곳에서 해양스포츠를 운영하는 곳이 고가의 해양장비들을 가득 갖추고 있다.

뜨거운 태양 열이 도로에서 스멀 스멀 올라와 솥단지처럼 이글거리는 것 같다.

도로의 붙어 있는 이정표가 헷갈린다. 해파랑길인지 갈맷길인지..

거기에 구역마다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바닥에 가끔 노란 페인트로 그린 해파랑길 표시는 사람들이나 발길에 거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갈림길이 자주 나오지만 알아서 찾아가야 하는 것 같다.

하긴 길은 단순하다. 그냥 해변만을 따라 가면 된다. 높은 광안대교로 가는 것 말고..


오늘 같은 날 나처럼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내가 잘 못된 것일 것이다.

때를 제대로 찾아 오지 못한 풋내기 하이커가 지금 고생하고 있다.


커다란 아파트 단지의 뒷길을 걷는다. 이 더운 날 간이 체육시설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신기해 보인다. 어떤 외국인은 조깅을 하고 있다.

아파트 뒷길에는 폐타이어로 도로를 덮고 녹색물감을 잔뜩 풀어 놓았다.

그 길도 아주 길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런 곳에서는 축제가 열리면 좋을 것 같다.


SF영화처럼 바다위를 달리는 광안대교가 장관이다.

정확히 40년전 여름에 나는 이 곳 광안리에 몇 번 왔었다.

1976년 당시 대학 3학년 여름 방학때 부산의 동명산업으로 한달간 실습을 왔고

그 회사의 하계 휴양지로 이 곳 광안리 바다에 텐트 하나를 쳐 놓았었다.

당시 한국의 수출산업 중에서 큰 역할을 하던 동명목재를 가지고 있던

동명그룹은 우리나라 30대 재벌 그룹중 하나였다.


광안리 바다에 가기위해 버스에서 내려 작은 동네 뒤로 가면 모래사장도 별로 없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편의 시설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부산 지역 대학생들고 같이 이 곳에서 수영을 하다가 갑자기 부산학생 한 명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다에서 뛰어 나왔다.

물 속 바위사이에 어린 아이의 시체가 있다고..

나는 수영을 잘 못해 물속에 들아가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이상해져

모두 메스꺼움을 느끼고 급히 그 바다를 빠져 나왔다.


그 뒤  광안리는 급속한 속도로 개발되어 여름 피서지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젊은이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그야말로 유흥의 메카로 바뀌어 버렸다.

마치 서울에서 논밭뿐이던 강남땅이 금싸라기 땅이 된 것 같다.


그런 개발은 끝내 광안리에 이런 거대한 수상다리를 건설하였고

광안리 근처에는 우리나라의 최고 높은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길 건너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편의점에서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다리 위를 걷지 않는 이상 길은 이 길뿐이라 해변길을 따라 가니

그 끝에 작은 쉴 곳이 있기에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화단 옆 의장에 누워

너무 피곤해 잠에 빠져 버렸다. 걸은지 2시간만에 발에 물집이 잡히는 것 같다.

아마 이제껏 길을 걸은지 이렇게 단시간내에 발에 물집 잡히기는 처음인 것 같다.


광안리 해변길을 간다.

이른 아침이라 물이 차가운지 아직 해수욕객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모래 사장이 온갖 색깔의 물놀이 기구로 바다빛깔보다 더 아름답다.

발 바닥에서 불이 나고 있다.

뜨거운 세멘트길을 걸으니 샌들을 가지고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해변을 걸으며 내 모습을 보니 난 우주에서 온 외계인같이 보였다.

모두 편한 슬리퍼나 운동화 차림. 편한 옷과 고급차들..

나는 두터운 등산화, 스틱이 있는 배낭에 머리에 등산모자.

그 사이에서 나는 투명인가처럼 보여야 한다.


광안리 백사장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 아름다운 여름 낭만의 거리가 내겐 고역이었다.

다음 코스에 있는 해운대 해변은 안걸을거야.


다리가 멋있다.

혹시 저 다리도 개통 하루전에 일반인에게 다리걷기행사를 하지 않았을까?

영종대교도 개통 하루전에 그런 행사가 있어 걸었던 적이 있기에

그런 행사를 하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부산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안개속에 우뚝 솟아 있는 주거용빌딩과 상업용 빌딩들이 멋있다.

여기는 완전히 구 멸망 후 살아남은 자들이 별나라에 세운 도시 같다.

공기부양 택시가 내 앞에 와서 멈출 것만 같다.

높은 빌딩 위에서 누군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뛰어 내릴 것만 같다.


해변 끝까지 걸었다.

누군가 해변에서 무슨 용도인지 모르지만 물수건이 담긴 팩을 나눠 주기에

신나게 얼굴과 팔뚝의 땀을 닦아냈다.


광안리 해변의 뒤로 돌아가니 높은 주차타워에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조금 지적인 얼굴인데 누구일까?

이 곳 출신 문학가인가?

광안리를 대표하는 문인이 누가 있을까?

나중 검색해 보니 그건 어부의 얼굴이라 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어부의 얼굴이 아닌 것 같다.


이정표가 또 실종되었다.

워낙 사람들과 차들이 많이 다니니 주위의 모든 시설이 복잡해서

어디엔가 리본이나 바닥표식이 있을텐데 찾을 수 없다.

트레킹이라는 것. 참 단순한 일인데 여긴 너무 복잡하다.

그냥 대충 이 길이려니 하고 찾아갔다.

바닷가로 나무데크로 별도 산책코스가 있지만 너무 그늘이 없어

도로의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며

왜 자전거도로가 일반 도보랑 같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덥다.

다시 바닷가 정자에 앉아 쉬다가 그냥 또 누웠다.

이러다 일사병 걸릴라.

생전 이런 일 별로 없었는데 내 체력이 약해진건가?

하긴 산티아고를 다녀온 뒤 2달동안 두문불출했으니 약빨이 사라졌을 법도 하다.


긴 긴 길을 걸었다.

바다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민락교를 지나 해운대 방향으로 가는 넓은 길에서

한참을 걷다가 도무지 흥미를 잃어 버렸다.

해운대 백사장이 시작되는 영화의 거리 앞에 앉아 한참 생각했다.

계속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론은 점심먹고 오늘 걷기는 끝내자.

부산에 왔으니 돼지국밥으로 맛있는 점심을 즐기고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해 보니 도무지 여유가 없다.

연산역 쪽에 비교적 저렴한 호텔을 인터넷 아고다로 예약하고

오후 내내 쓰러져 자 버렸다.


잠결에 아주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나 보니

천둥 번개가 부산을 휩쓸고 있다. 창 밖으로 내려다 보는 거리의

빗방울이 마치 물을 쏟아 붓는 것 같다.

양 발바닥 같은 부위에 물집이 크게 잡혔다.

세상에...불과 몇 시간 걷지 않았는데 이 정도일줄이야..

마트에서 실과 바늘을 사서 물집을 터트렸다.


부산오면 늘 가고 싶은 곳. 자갈치 시장.

주섬 주섬 마른 옷 찾아 입고 전철을 타니 주위에 정겨운 사투리들이

들려 온다. 부산 사투리는 여자들의 억양이 참 좋다.


역시 자갈치 시장에 오면 사람이 사는 것 같다.

싱싱한 생선들처럼 모든 것이 살아 있다.

이런 곳에 혼자 오면 참 불편하다.

회를 좋아하는 내가 회를 먹더라도 한가지 회만 먹어야 하니..

자갈치 시장 빌딩 5층에 회부페를 하는 곳이 있다 해서 찾아갔더니

월요일이라 장사를 안한다. 이런 것도 오늘은 내게 빗겨 가네.

회 부페를 하는 곳이 그 곳 밖에 없는 듯 했다.


다음 날.

아무래도 해운대 백사장길을 걷는 것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버스를 타고 2코스가 시작되는 문탠로드를 찾았다.

2코스는 미포에서 송정해변을 거쳐 대변항까지 걷는 약 14km의 거리다.

몇 년 전 부산 사는 페북 친구의 안내로 잠깐 걸었던 적이 있는 이 곳은

그래도 숲 사이를 걸으니 조금 발이 편해질 것이다.


아래로는 동해남부선 철도길이 보이고 위로는 부산의 명소

달맞이길이 있는 곳. 그 사이 경사진 언덕 숲에 길을 만들어 놓았다.

해운대 바닷가에서는 사람들이 햇빛으로 선탠을 하고

이 곳에서는 달빛으로 문탠을 한다 해서 문탠로드.

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길이지만 부드러운 흙을 밟는 기분이 좋다.

그리고 어제 오후에 내린 비로 흙이 아직 습기를 머금고 있어 길이 촉촉하다.

어제 걸었던 도로 위를 걸었던 불만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이 곳에서 산책을 하는 사람도 가끔 보였다.

가끔 길 옆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넓은 바다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비가 오면 좋겠다. 비오는 바다를 보고 싶다. 오늘 비예보가 있었는데..


숲속에서 낮은 톤 높은 톤으로 들리는 새소리들과 풀벌레 소리들과 함께

길도 오르락 내리락 하며 걷는 기분이 좋다.

비록 바람한 점 없는 길이지만 손에 들고 있는 부채로 억지 바람이라도

만들어 걸으며 숲속길을 즐긴다. 그래도 더운 것은 더운 것이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등과 머리에서 흘러 나온 땀이 멜빵을 적시고 배낭까지 스며들어

윗부분이 흥건하다.


한참을 가다 작은 쉼터에서 약간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고

맨발로 벤치에 길게 누웠다. 잘려고 한 건 아닌데 저절로 잠이 들었다.

30분정도 잤나? 자고 일어나 내가 누웠던 벤치를 보니 내 등에서 흐른 땀이

모두 나무벤치에 스며들었다.

 

청사포로 내려가는 길로 가면 어렵지 않게 송정해변으로 갈 수 있지만

제 코스인 구덕포로 가는 길을 택해 긴 길을 걸었다.

봄 가을에 이 길이 참 좋을 것 같다.

도심지에서 바로 이어지는 조용한 숲길.

그런 곳에 좋은 집들이 많다.


구덕포에 도착해 해월정사를 지나니 송정해변이 이어진다.

어제와는 다르게 이 곳에는 해수욕객들이 많다.

군 휴양지도 있고 해변에는 수없이 많은 파라솔과 물놀이 기구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이 긴 해변을 걸을 필요성을 못 느껴 버스를 타고 대변항으로 이동했다.

지도상으로 3코스 출발점인 대변항에서 다시 숲길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

그 곳에서 점심을 먹고 걸을 예정이다.

비교적 먼 길을 버스를 타고 가며 내가 걸어 갈 도로를 보며

저 도로를 따라 길을 걸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대변한 해파랑길 안내판 앞에서 지도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내 옆에 내 나이 또래 쯤의 사람이 트레킹 복장으로 왔다.

그는 해파랑길을 반대로 걷고 있다 한다. 그도 참 열성이다.


같이 식사라도 할려 했지만 아직 밥 생각이 없다기에 혼자 식당을 찾아

좋아하는 물회를 먹었다.


대변항은 오래전 멸치털이를 보기 위해 홀로 밤열차를 타고 내려 오던 곳이다.

시인 곽재구의 에세이 '포구기행'을 읽고 이 곳에 오고 싶었다.

새벽에 나가 멸치를 잡아온 배들이 바닷가에 정박하고 그물에 걸린

멸치들을 서너명이 그물을 잡고 멸치를 털어내는 장면이 아름다웠다.

멸치가 하늘을 날며 아침 햇빛에 은빛 비늘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던 그 풍경을 잊지 못한다.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숲길로 들어갔다.

새 도로가 생기기 전에 옛날 사람들이 걷던 길이라 한다.

잡초가 무성하여 길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파묻혀 있지만 그래도 그런 길이 좋았다.

한참을 숲길을 걸어와 월전으로 가는 길 옆에 어떤 분이 밧줄을 손보고 계시기에

목례로 인사를 드렸더니 '욕봅니다' 라고 말을 건네준다.


젊은 시절 부산에 와서 제일 낯설었던 말이 이 말이었다.

"욕 본다"

"내가 욕을 했나?"

"내게 욕을 한건가?"

그 것이 고생했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부터는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다.


월전에서 마을을 지름길로 가로 질러 기장군청으로 가는 길을 걷다가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하늘이 검은 구름이 덮고 우르릉하고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곧 떨어질 기세다.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더 가야 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고민 중 마을 버스가 오기에 그냥 타 버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걸을 4코스는

임랑해변에서 진하해수욕장까지 해안길로만 걸어야 하니

날씨가 덥지 않아도 긴 해안길 시멘트 도로를 걷는 것은 

그다지 원하지 않는 길이라 진즉 포기해 버렸다.

차라리 해안으로 차가 다니는 길이라 해도 산티아고 까미노처럼

별도로 도로와 나란히 가는 흙길을 마련해 주면 걷기 편할 것 같다.

해파랑길 코스들이 이런 도로 조건이 계속 이어진다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부산이지만 발에 물집도 잡혀 걷기 불편하고

휴가 시즌이라 숙소 잡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아 고속버스로 서울로 와 버렸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