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음악과 삶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공연 참가

carmina 2016. 12. 18. 17:41

2016. 12. 15


올해 10월경 평소 좋아하는 음악가인 바흐 솔리스텐의 음악감독인

박승희씨로부터 12월15일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의 공연에

일반 객원 단원을 모집하는데 참여하여 달라기에

이전에 메시아 원전연주도 내가 객원 단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기에

좋은 기회라며 승락하였더니 혹시 독일어 노래를

해 본적이 있느냐기에 이전 합창단에서 독일 가곡이나 바흐의

유명한 칸타타 '내 주는 강한 성이요'(BWV80)을 한 적이 있다 했더니

미리 독일어 딕션을 가르쳐 주겠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악보를 예술의 전당내에 있는 대한음악사에서 구입해

박승희씨를 찾아가 노래를 불러 보니 도무지 독일어 발음이 익숙치 않아

애를 먹었다. 이전에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사놓았던 책을 꺼내

영어와 다른 발음들을 모두 책 내지에 적어 놓고는 우선

가사를 한국말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쓴 한국말 발음도

맞는 것이 없었다. 발음이란 것이 글로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빠른 리듬과 박자하나에 겹자음이 있는 단어들을 발음하는 것이 힘들었고

테너의 음이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높은 A음을 소화하기도 힘들었다.

이제껏 많은 노래를 해 보았지만 불과 몇 번 연습해 보니 이 곡은

내 노래 수준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에 연습에 참여하다가

정 안되면 그만 두겠다 하고는 11월부터 연습에 임했다.


모두 객원으로 참여한 소규모의 합창단원들이 모였다.

주로 젊은이들이 많았고 머리칼이 희어질 정도로 나이든 이는 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노래를 하는데 모두 초견으로 멜리시마가 많은 부분을 거침없이 이어간다.

모두 바로크 음악 전공자라는 느낌에 순간 더 겁이 났다.

정말 제대로 못하면 민폐가 되겠구나 라는 생각에 그 날 부터 유튜브로

음악들을 찾아 열심히 들어 보고 씨디도 사서 종일 듣고 다녔으나

멜로디는 따라 할 수 있어도 발음이 문제였다.


연주를 들어도 원곡은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기에

윈앰프에 템포를 느리게 하는 기능을 이용하니

조금씩 가사가 입에 붙는다. 뜻도 모르는 단어이기에

무조건 외우는 수 밖에 없다.


매주 토요일 즐겨 찾아가던 트레킹 행사도 포기했다.

우선 당분간은 토요일은 다른 행사는 잡지 않기로 했다.

모인 인원들이 모두 젊은 사람들이고 객원 단원들이라

그냥 와서 연습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는지

쉬는 시간에 마실 것도 간식도 없기에

마침 근처 큰 마트에서 귤을 저렴하게 사서 매주 내가 제공하였다.


연습은 각 파트의 연습시간을 조절하여 미진한 파트는 미리 나와서 하고

그래도 기본기가 튼튼한 소프라노는 늘 늦게 합류했다.

처음엔 전체 규모를 보니 약 30~35명 수준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중 테너를 할 사람이 없는지 당초 인원은 6명이 모집되었지만

정작 연주회때는 한 명이 독감으로 빠져 결국 테너 5명이 베이스 9명

소프라노 12명, 앨토 8명을 상대로 노래를 해야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독일어만의 특별한 발음이었고

빠르게 진행하는 리듬에 많은 가사가 들어 있는 부분이었다.

결국 막판까지 그 부분은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더 어려웠던 부분은


연주 며칠 전에 이번 연주를 지휘할 대전시립합창단 지휘자인

독일인 빈플리트 톨씨가 연습을 시키면서 본인이 요구하는 대로

강조할 부분을 전 곡에서 알려주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했다.

특히 가르칠 때 지휘자의 눈빛이 남들과 달랐다.

눈동자만 보아도 소리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 통하는 것 같았다.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늘 시립합창단원만 가르치던 그이기에 우리 합창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텐데도

그는 두 엄지손가락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몰아칠 때는 매섭게 몰아쳤다.

그 이유는 대개 단어의 뜻을 몰라서 의미에 맞지 않게 부른 우리들의 무지였다.

가사가 의미하는 명확이 모르니 표정이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강조할 곳과 강조하지 말게 레가토로 연주해야 할 곳들의

구분이 아주 뚜렸했다.


매주 토요일만 연습하다가 평일 연습하니 당연이 단원들의 참석이 저조했다.

나 부터도 이사하는 날은 도무지 참석을 하고 싶어도 집 안에 들어 오는 짐들 때문에

감히 그대로 나갈 형편도 되지 않았다.

더우기 테너는 원래 6명의 예정된 인원이 한 번도 모두 모여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연주 전날

모텟트 합창 연습실에서 최종 리허설이 있었다.

바로크 음악 연주 특유의 고악기들이 눈에 보였다.

삐까 번쩍하지 않은 팀파니와 아이들 학습에 쓰는 악기 같은 오보에

언젠가 내가 멕시코 벼룩시장에서 주워 온 것 같은 트럼펫

그리고 활의 길이가 짧은 현악기들...

소리는 작지만 소리가 명확한 쳄발로와 은은한 포지티브 올갠.


우리가 노래를 하지 않았도 이미 악기만으로도 충분한 바로크의 향기가 풍겼다.

지휘자님은 팀파니의 비트에 대한 강약에 중점을 두시고 코칭하셨고

합창단에게는 하루 전날 멋지게 노래하던 소리들이 달라졌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솔리스트로 나오는 복음사가와 소프라노, 앨토, 테너 그리고 베이스이 소리는 최고였다.

어쩜 그리 일반 성악과 다르게 노래하는지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음악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무척 만족해 했다.


연주 전날인데도 긴 연습은 하지 않으셨다.


공연 당일 4시에 모이기로 했지만 합창단은 3시 반부터 모여 연습을 하고자 했으니

악기들 특히 쳄발로의 조율 때문에 연습을 하지 못하고

바로 지휘자님의 리허설로 들어갔지만 그다지 큰 코멘트는 없었고

곡마다 전 부분을 다 부르지 않고 앞에만 부르고는 리허설은 일찍 끝냈다.

아마 그 자리에서 연습을 더 한 들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하는 의도인 것 같다.


공연 바로 전에 합창단원에게 박승희씨가 음악을 즐기라고는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정말 즐기는 사람도 있긴 있을 것이다.


내 옆자리에서 노래하는 테너는 아마츄어인데도 노래를 참 잘하니

내가 편하게 노래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는 내가 자신의 도움이 되지 못하니

불편했을수도 있다.


공연 지원과 스폰서가 많지 않았는지 노래하는 단원들에게 물한병 간식하나 없었지만

모두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노래하는 것만 즐거운 사람들.


대기실에 남성 단원과 오케스트라 남성연주자들도 들어왔다.

그 중 트럼펫을 연주하는 이에게 악기에 대해 물어보는데

이해를 못하기에 얼른 외국인이구나 생각해 물어 보니 일본인이란다.

쳄발로 연주자도 벨기에인이고 그외 악기도 몇 명 일본인들이 보였다.


전체 6부로 나뉘어져 있는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중 우리는 1부와 5부 그리고 6부만 연주한다.

1부가 연주될 때 내가 생각해도 지휘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부분들이 그냥 지나치는 것 같다.

아마 그렇게 연습을 많이 안한 탓일 것이다.


관객도 2층 3층은 비워두고 1층에만 채웠다.

1부 공연 후 인터미션하고 무대로 올라가니 1층 객석은 거의 다 채운 것 같다.

1층에 관객이 가득 차니 음악이 살아나는 것 같다.

어려운 노래들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연주를 하다 보면 과거 연습에 한번도 실수하지 않은 부분에서 틀릴 때도 있다.

악보에 독일어와 영어가 같이 표기되어 있는데

나도 모르게 한 단어를 밑에 써 있는 영어로 부르는 실수를 범했다.

연습 때마다 연주의 속도가 더 빨랐는지 어떤 때는 버걱거리기도 했지만

그다지 크게 하지 않으니 틀린 표식은 나지 않은 것 같다.

연습 때도 지속적으로 틀리던 곳은 일부러 표시를 하고 수없이 되뇌었는데도

여전히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30년동안 합창 연주에 해 보지 않았던 실수들이 몇 번 생겼다.


모든 곡의 연주가 끝나고 커튼 콜을 받으면서

올해 이 멋진 연주를 비롯해서 내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의미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은퇴하고 산티아고를 걷고 책을 쓰고

작가라고 불리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호칭이 되어 버렸다.


예정에도 없던 앵콜을 하시기에 혹 흥겨운 1번 곡을 하실 줄 알았는데

짧은 곡으로 연주를 했다.


연주가 끝난 후 로비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나를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무대에 보니 내가 있더라고..


합창단원들이 오랜동안 활동한 팀이 아니라 연주 후에도

일부만 모여 단체 사진도 찍었고, 연주 후 뒷풀이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우린 이 공연을 위해 단지 모였다가 헤친 것 뿐이리라.


그러나 어느 모임 때는 또 얼굴을 볼 수 있겠지.


연주자들이 밤늦게까지 치킨집에서 생맥주와 함께 여흥을 즐겼다.


밤 12시 정도에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스스로 흐뭇해 하니

어떻게 내 실력으로 그런 합창연주를 할 수 있는지 신기해 했으나

아내도 내가 큰 일을 해 냈다고 인정해 주었다.  


밤 늦게까지 단체 카톡과 페이스북에 관객들의 반응이 단원들을 통해 올라왔다.

모두 평가가 무척 좋았다. 아마 내 작은 실수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어려웠던 연주이면서 가장 보람된 연주였다.

이전에 말러의 부활을 객원 연주로 했을 때도 그다지 뿌듯하지 않았는데

이번 연주는 내게 인생의 큰 훈장을 하나 달아 준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 유행가 제목처럼 '브라보 마이 라이프 (Bravo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