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3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내일이 입춘이란다.
며칠동안 눈이 내리고 국토가 꽁꽁 얼어붙더니 어제부터 날이 풀어지고
오늘은 무척이나 따뜻한 겨울이었다.
대개 내 나이또래의 포크송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내가 길을 걷기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회원 중 오누이가 같이 활동하는 두 여자분이 남편과 함께
나들길에 오겠다고 해서 오늘 특별히 시간을 마련했다.
서울에서 오기에 강화터미널에서 만나는 시간을 조금 늦게잡았고
거의 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나이가 있는 여자분들이기에
코스 선정에 고민을 많이 했다.
늦게 출발하고 중간에 점심을 쉽게 먹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언덕이 별로 없고 중간에 힘들다 하면 돌아올수 있는 코스를 찾다가
나들길 5코스 고비고개길로 선정하고
시내 부분을 택시로 건너 뛰어 출발을 국화교회앞에서 하고
마지막에 덕산코스도 힘들경우 내가면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주말이면 아침 일찍 승객이 없는 정류장은 그냥 지나치던 버스가
평일이라 매 정류장마다 다 정차하고 승객 승하차를 하다보니
약속시간보다 5분 늦었다.
문득 옆을 지나가는 버스가 독특하게 노란색 2층버스다.
그리고 번호도 내가 즐겨 이용하는 강화행 3000 빨간 버스와
번호가 비슷한 3000A. 이게 뭐지? 그런데 코스가 약간다르다.
나중에 택시기사에게 알아보니 새로 투입된 중국버스인데
중간에 마을로 들어가는 종래의 노선대신에 바로 직행도로로
운행하니 더 빠르고 좌석도 무려 70석이 넘는단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기회되면 이 버스를 타야겠다.
바람 한 점 불지않는 포근한 날씨.
공기도 따뜻해 보인다.
그래도 야외니까 두터운 장갑을 끼고 등산복 점퍼의 옷깃을 여몄다.
옆에 도로는 가끔 차가 다니지만
우리가 걷는 길에는 인적하나 없다.
이 호젓함이 소음에 시달린 도시인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는 줄 알까?
길을 걷다가 얻는 다른 즐거움은 그야말로 덤이다.
스쳐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인사드리고
외딴 집 앞에 우리 안에서 우리를 보고 짖어 대는 두 마리 누렁개의 외침은
반가움의 인사로 들린다.
사람들이 다니는 농로에는 눈이 없지만 논밭에 흰 눈이 골골이 남아 있어
완벽한 시골풍경이 보기에도 정겹다.
숲길로 올라가는 낮은 언덕에 눈이 그대로 쌓여 있지만
아이젠없이도 미끄러지지않은 만큼의 눈의 탄력을 발로 느껴진다.
낙엽과 같이 밟아 올라가니 와삭거리는 낙엽소리와
발이 푹 들어가는 느낌이 그제 걷던 오지 임도길의 눈길과는 사뭇 다르다.
눈때문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니 그다지 힘들지 않고
언덕위에 이어지는 평지의 오솔길에 쌓인 소복한 눈을 보며
입에서는 '좋다'라는 탄성이 터진다.
그 곳에 여기 저기 고라니가 다녀간 듯한 발자국들이 보이기에
혹시 먼 곳에서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아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숲길에는 거의 눈으로 가득차 있다.
길 옆 비탈진 언덕에도 눈이 남아 있어 나무들을 감싸고
나무가지에 남아 있는 눈들은 툭 건드리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있다.
학생야영장을 지나 다시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누군가
자전거로 이 곳을 올라갈려다가 포기했는지
초입에만 바퀴자국이 가득하고 조금 지나니
우리보다 먼저 떠난 사람발자국밖에 없다.
고려산으로 올라가는 갈림길 계단 옆의 좁은 계곡길을 눈을 밟으며 내려가는데
중간쯤 서낭당터에 안보이던 오색천들이 묶여 있다.
누군가 이 곳에서 정성을 드린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이 곳에 이런 것을 놓은 사람이 없어
오래전부터 있던 치마저고리가 빛이 바래 보기 흉했었는데
이번 겨울부터 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나 보다.
긴 숲길을 눈을 꼭꼭 밟으며 내려왔다.
드문 드문 눈이 녹아 얼어붙은 길이 있었지만 걷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숲을 지나 마을길로 나오니 외양간 냄새가 가득하다.
요즘 닭들은 모두 사라졌는데 소들이나마 건강하게 살아 있어 반갑다.
한 때는 광우병때문에 이 소도 모두 사라졌었다.
오늘 코스에는 유난히 소가 많이 보였다.
미국에서 35년간을 살았다는 동행자는 한국사람들이 미국소고기가
얼마나 맛있는 줄 모른다 한다. 나는 안다고 했다.
해외 출장 다니면서 무수하게 많이 먹는 소고기들의 맛이
한국 소고기보다 더 맛있다. 티본스테이크와 앙구스 등의 맛을 기억한다.
남미 아르헨티나 레스토랑에서 먹은 소 뒷다리 요리는 얼마나 맛있던지..
나는 한우보다 한돈을 더 좋아한다.
가끔 지나치는 승용차들은 아마 이 근처 펜션을 이용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늘에 구름이 적당히 흐르고 있지만 파란 부분은 눈이 부셨다.
이게 봄 햇살인가?
길가 인적없는 집 마당의 작은 쉼터에서 간식을 나누어 먹고
호젓한 길을 이어간다.
일년에 이 길을 몇 번씩 걷지만 걸을 때 마다 새로 보이는
건물들이 자주 보인다. 오늘도 큰 철문을 새로 설치한 어느 집과
큰 간이창고를 짓고 철문을 만들어 놓은 집이 낯 설다.
지난 해 수확하고 남은 볏짚으로 만든 화사한 색깔의 대형 곤포 사일리지들이
멀리 보이는 눈 덮힌 산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수확 후 제법 많이 남겨 두었던 감나무의 감들이 모두 사라졌고
길 옆에 숨어 있다가 자기들은 죄가 없다며 후두둑하며 날아가는
까투리들이 내 발길을 멈칫거리게 한다.
적석사 갈림길 가기 전에 어느 집 앞에 작은 강아지 몇 마리가
우리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었었는데 오늘은 어미개만 남아
줄에 묶인 채 마치 늑대처럼 주둥이를 하늘을 향하고 슬프게 울고 있다.
우리에게 내 새끼들 돌려달라고 하소연을 하는 것일까?
대형 고인돌을 처음 보는 일행들이 신기해한다.
고인돌은 지나는 숲길에서 내게 노래를 불러 달라했다.
낙엽이 가득 쌓여 있어 '부모'라는 노래를 불렀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 정을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다 생겨나와 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날을
내가 부모되어서 알아 보리라.
나도 이젠 스스로 제 갈길을 찾아 갈 수 있는 자녀들의 부모가 되었다.
내게 굳이 의지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갈 만큼의 능력과 재능을 위해
나는 마치 여기 낙엽처럼 내 인생을 다 쏟아 부었다.
너희들 또한 그렇게 하리라.
나무의 일생이나 사람의 일생이나 다름이 없다.
내가 저수지의 수면이 그야말로 커다란 화폭이다.
그런데 멀리서 볼때는 수면이 모두 얼어 붙어 흰눈이 덮인 것 같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렇지 않다.
옆에 있던 분이 하늘의 구름이 반사된 것이라 하기에
가만히 지켜보고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수면에 하늘의 구름이 투영되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이런 장관은 이런 계절아니면 볼 수 없을 것이다.
지난 해 봄 가뭄 때문에 바닥까지 말라 붙었던 내가저수지가
이젠 물이 가득차 오리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면이 거울같이 얼어 붙어 있다.
소리를 지르면 소리에 놀라 그 고요한 수면이 깨질 것 같았다.
저수지 아래 작은 집 마당에서 겨우내 땔감을 쓸 나무들을
손질하고 있는 나이든 할아버지께서 내 인사를 받으시고
어디서 왔느냐며 반갑게 맞아 주신다.
점심으로 강화에만 있는 젓국갈비를 먹기위해 외내골가든을 찾았다.
일행들은 맛이 있던지 바닥까지 다 긁어 드시고 갈비에 새우젓까지 얹어서
맛있게 드셨다.
점심 후 외포리까지 걸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니
여자분이 힘들다며 그만 걷자하기에 택시를 불러 강화읍으로 나와
평소 잘가는 강화도 김구선생님 거주하시던 곳을 개조해 만든 남문7번지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고 나오는데 여자분이 깔깔깔 웃으며 자신의 신발을 보여주었다.
그만 한쪽 신발의 바닥이 터져서 떨어져 나갔다.
바닥을 떼어 버리고 웃으며 오는 길에
나는 오늘 터진 신발처럼 대박을 터뜨렸다고 말씀드렸다.
산티아고 까미노 파라다이스 책을 내고 여기 저기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는데
오늘 하루만 세 군데서 강의 요청 전화를 받아 내 인생의 커다란 대박이
터졌다고 좋아하니 모두 축하해 주었다.
차로 오는 길에 이 분들에게 북한땅을 보여 드리기 위해
연미정에 잠시 들러 본 후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받은 메시지들을 다시 읽어보며
앞으로 내 인생의 시간들을 계획해 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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