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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버스와 함께 한 남도 여행 - 거제편

carmina 2017. 3. 21. 14:04

 

 

2017. 2. 24

 


공장에서 세상에 나와 평생 서울의 종로 일부 구간을 제한속도 60km로 쳇바퀴처럼 달려 거의 수명이 다되어가는 마을버스를 본 여행가 임택씨는 평생 직장생활과 가정을 지켰던 자신의 입장과 같았던 버스에 ‘은수’라는 이름의 날개를 달고 677일간 전 세계를 일주하며 제 2의 인생에 성공했다. 

 

얼마 전 그가 내게 2050세대들이 함께 여행하며 공감을 나누는 남도와 제주여행에 같이하자는 제안에 두말도 하지 않고 승락했다. 나 또한 지난 해 봄에 직장 은퇴 후 스페인의 산티아고 까미노 순례길 800km를 한 달간 걷고 쓴 책 ‘산티아고 까미노 파라다이스’를 펴내고는 무언가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던 참이었다.

 

겨우 7만원 현금과 카메라를 하나 들고 세계의 구석구석 소외된 사람들에게 사진을 찍어 주며 그들이 베푸는 호의로 세계를 일주한 청년, 터키에서부터 아프리카의 모로코까지 배낭에 태극기를 꽂고 약 5,500km를 걸은 도보여행가, 한국을 알리고파 한복을 입고 세계여행을 다닌 대학생, 교편을 잡다가 사표를 내고 무작정 여행을 떠난 당찬 아가씨, 시인과 도예가 그리고 아로마 테라피스트도 참여한 보름 동안의 마을버스 남도여행은 밤새 세계의 구석 구석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서로의 또 다른 여행에 대한 꿈을 나누었다.

 

우리의 이번 여행은 무계획을 원칙으로 했다. 모두가 이런 예측하지 못하는 여행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욱 즐거웠다. 세계의 어느 한 구석에서 하루 몇 천 원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는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이 가득한 이야기와 어른들이 만들어 준 울타리 밖의 세상은 충분히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자신감 가득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지난 안이했던 세월을 후회하기도 했다. 비록 세대는 달라도 여행에 대한 공감은 같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은 언제나 우리의 주된 메뉴였다.

 

모임 장소인 광화문으로 가는 전철안에 가득한 직장인들. 1년전의 내 모습이다. 모두 쥐죽은 듯 앞에 노인이 서있건 말건 스마트폰에 빠져 있고 신도림역에서 문이 열리니 쏜살같이 달려나가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그 넓은 계단을 순식간에 가득 채워버렸다.

 

 

 

광화문근처에는 일반 기업이 별로 없어 사람들의 발길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눈에 익은 녹색 마을 버스. 외국을 여행 중에 자주 보던 담벼락의 그라피티와는 사뭇 다른 낙서가 버스 안밖에  전세계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그 중 지난 해 마을버스가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환영행사할 때 써 두었던 나의 메모도 보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버스의 외모가 이상한지 자꾸 힐끗거리며 호기심있는 이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몇 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이 좀 있는 분과 조금 절뚝거리며 나타난 중년의 남자, 그리고 긴 머리를 뒤로 곱게 땋은 야성미가 넘치는 빨간 옷의 등산인, 그리고 맵시있게 차려입은 어느 여자. 임택 대장님의 사모님과 함께 출발 사진을 찍고 떠난 버스는 시청역에서 환하게 웃는 키 큰 젊은이 한 명을 태웠다. 그는 당연히 앞자리가 자기 자리라는 듯 맨 앞에 앉았다.

 

 

서로 간단히 통성명만 했다. 강병남 시인, 홍순창씨, 이헌준 도보여행가, 김종애 도예가, 이정현 사진작가, 그리고 최헌민 청년.

 

서로 만나 본 적이 없는 우리들인데도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이야기의 물꼬가 터졌다. 여느 여행단체에서 출발할 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린 마치 오래 전 부터 알고 지내며 여행을 같이 다녔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 갔고 버스가 덕유산의 눈 덮힌 흰 산맥을 보이자 모두 카메라를 들이대며 여기 저기 포스팅하기 바빴다. 그러한 화기애애한 대화는 거제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첫 번 방문지는 거제의 해금강 테마 박물관으로 유경미술관이 같이 있다. 이 곳에 왜 낯이 익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아내와 몇 년전 통영과 외도여행을 했을 때 버스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 이 곳 박물관을 보지 않고 바다쪽에 있는 바람의 언덕을 내려가 파도를 즐기고 풍차를 관람했었다.

 

유경미술관의 1층에는 근현대전시관으로 50년대와 60년대의 생활 속 물건들이 가득했다. 나 어린 시절 우리 집 부엌에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들, 마루위에 있던 뒤주와 쌀 까부르는 키들, 우리 동네에 내가 쥐새끼처럼 드나들던 만화가게와 동네 연탄가게, 라디오방, 구멍가게, 담배가게, 추웠던 시절의 교실풍경, 아직도 우리 집에 남아 있는 풍금이 여기도 있었고 회칠한 벽에 붙어 있던 선거구호 종이들, 아이스께끼 통, 선데이서울 잡지 등등. 인천의 달동네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다 수집했을까? 누군가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 집 허물면 없어질 물건들을 열심히 모으느라 애쓴 노력이 보였다.

 

 

 

2층에는 1층과는 정반대로 화려한 유럽풍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미술품과, 향수병들 고급 찻잔들들과 궁정에서 쓰던 접시등등..

같은 세대였을테지만 아래층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윗층은 상상이 안될 정도로 화려한 물건들이었다. 그러한 확연히 다른 세대차이의 문화는 이제 우리 나라의 물건들이 유럽의 물건들과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박물관측에서 준비한 차 한 잔을 마시고 급히 오늘 저녁 행사장인 거제광림교회를 찾았다. 이 곳은 해오름이란 이름으로 지역아동센터를 겸하고 있었다. 서울의 대형교회인 광림교회가 교회를 지어주어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하지만 현재로는 아무 관련이 없다한다.

 

전면에 조금 구부러진 나무십자가가 걸려있는 교회안에서는 이미 어린이들이 교회 바닥에 앉아 연주하는 사물놀이의 밝은 리듬들이 가득했다. 한 눈에 보아도 여러 명의 외국인 이주민의 자녀들이 보였지만 이런 곳에서는 흔한 풍경이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 들의 연주는 절도가 있었고 힘이 있었다. 하다 뭇해 연주하며 숨을 고르는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추고 누구 하나도 건성치는 아이가 없을 정도로 진지한 모습에서 연습을 많이 한 것을 느꼈다. 수염이 가득한 목사님이 우리 일행을 소개하고 2부 순서인 마술이 준비 되는 동안 젊은 사진 작가가 아이들에게 세계 여행에 대한 꿈을 심어 주는 명 강연의 시간을 가졌고 또한 우간다에서 오셨다는 선교사님이 선교지에서의 사역을 설명하는 시간도 가졌다. 행사 참관을 마치고 나오며 얼마 되지 않지만 교회봉투에 선교헌금을 넣어 드렸다.

 

 

 


아이들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부산에서 오셨다는 마술사는 긴 검은 외투에 중절모자와 검은 안경을 쓰고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의 눈까지도 완벽하게 속일 정도로 흔히 보는 카드마술과, 독심술, 비둘기 등의 마술로 애들에게 신기한 모습들을 선물했다. 우리도 마술을 보고 어떻게 우리 눈을 속였는지 한참을 추론해야만 했다.

 

 

저녁은 인근 굴전문식당에서 맛있는 굴찜과 굴전 그리고 굴탕수욕을 즐겼다. 해마다 부천의 먹자골목에 있는 여수굴집에서 아내와 함께 맛있는 굴찜을 즐겼는데 올해는 건너 뛰나 싶었는데 이 곳에서 기회가 생겼다. 식사 중에 조금 특이한 복장의 현지 주민이 동참했다.

머리를 땋아 비녀로 고정시키고 복장도 시골 장마당의 아주머니들이 입는 옷에 목소리가 가녀린 여자음성이었다. 조정제 시인이라고 소개한 그는 식사 후 우리일행을 자신들이 운영하는 카페로 초대하여 찾아간 외진 곳에 있는 넓은 카페에 마치 노래방같은 무대와 소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사는 법을 구수한 입담으로 얘기하고 마이크를 들고 노래들 들려 주었다. 그리고는 각종 의상 소품을 입고 흥겨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카페는 있지만 벌이는 시원찮고 시집은 냈는데 팔리지 않는다며 우리에게 두 권의 시집을 나누어 주었다. 일행 중 시인이 시집의 시 한 편으로 펼쳐 낭독하고 나는 짧은 시에 즉흥적인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했다. 자유롭게 사시는 이 분과 같이 사는 여자 분은 곁에서 조용히 바라다 볼 뿐이었다. 자유에 자유를 더했다. 그 분은 우리가 다음에 거제오면 꼭 들리라는 당부인사를 잊지 않으셨다.

 


 

교회 옆 친교관을 우리에게 숙소로 허락해 주어 밤늦게 교회로 다시 돌아와 불편한 공간이지만 마을버스 내에 가지고 다니는 여러개의 침낭을 이용하여 따뜻한 방에서 길게 누워 잠을 청했다. 젊은 시절, 교회의 여름 수련회를 다닐 때 시골 교회에 가서 여름성경학교 봉사와 수련회를 하며 교회 안 마루 바닥에 누워 자던 추억을 무려 40년만에 재연하고 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세워 둔 버스 옆에 옛날 거제현 관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들어가 보니 공덕비를 돌이 아닌 두터운 철판으로 세워 놓아 이색적이었다. 언젠가 강진에서 이런 공덕비를 본 적이 있다.

 

 

 

교회 옆에 있는 동네 시장을 찾았다.

이미 상인들은 바닥에 좌판을 펼쳐 놓고 채소를 다듬고, 조개를 까고 잡아 온 생선들을 가지런히 놓으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시장이 좋다. 아주머니가 조개를 까며 보이는 조개의 하얀 속살을 보며 나는 먹고 싶어 침을 삼켜야만 했다. 아버님이 은퇴후 소일삼아 인천 앞바다의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 오시면 저녁에 동네 친구와 그 조개들을 일일이 까서 소주를 같이 즐기던 추억이 떠 올랐다. 그 때 많은 조개를 까보았기에 지금이라도 내게 칼이 주어진다면 바지락 정도는 쉽게 깔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지락을 손에 잡으면 어느 편에 칼날이 들어가야 하는지 한 눈에 보이고 그 곳에 칼을 집어 넣어 조개를 관자를 자르고 다시 한 번 조개를 돌려 칼로 안으로 휘저으면 조개살이 다치지 않게 살을 뺄 수 있다. 조개를 까며 나온 물을 모아 조개를 씻으면 조개가 머금었던 갯벌흙들을 쉽게 제거하는 것은 기본이다.

 

상인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거닐다가 문을 연 동네 미장원에 우르르 몰려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머리 파머를 하러 나오신 할머니와 정겨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몹시 수줍어 하시는 할머니는 사진찍기가 부끄럽다며 연신 고개를 돌리셨다.

 


 

시장 끝에서 다시 걸어 나오다가 시장 입구에 좌판을 벌인 아주머니가 싸가지고 나오신 아침밥을 넉살 좋은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그 밥을 숟가락으로 같이 나누어 먹으니 모두 주위로 몰려 들어 밥을 한 숟가락씩 먹으며 연신 맛있다고 하니 아주머니는 무척 기분좋아하셨다. 일행들은 내게 노래를 청했다. 내가 숫가락을 마이크 삼아 '두만강 푸른 물에'를 부르니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춤을 추며 시장이 흥겨워 졌다. 이런 것이 여행의 재미인가?

 

아주머니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버스를 타고 오늘의 다음 목적지인 여수로 가는 길로 나서다가 어제 이 곳에 오다가 본 길옆에 커다란 돔 형식의 건물이 궁금하여 찾아 갔더니 거제 농업개발원이었다. 잘 가꾸어진 커다란 정원에 풍차가 있어 잔디밭에 오니 배경이 좋다며 우리들의 본능이 도발해 모두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섬진강변을 따라 가다가 만난 섬진강 휴게소에 잠시 들러 수입산이 아니라는 맛있는 재첩국을 먹고는 강 건너편 휴게소로 이어진 다리가 있는 공원으로 올라갔다. 예쁘게 그림을 그려 놓은 계단위로 작은 꼬마가 힘들게 올라간다. 그 공원에 세워진 높은 탑의 명판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김재규소장. 1974년. 섬진강은 알겠지. 역동의 그 세월들을...    

 

 

 

가는 길에 보이는 다리밑에 보이는 거대한 공장 지대. 포스코 광양제련소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공장 저편 바다로 커다란 배가 서서히 육지의 곶을 돌아가고 있다. 이 척박한 나라에 제련소를 건설하여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뛰어 난 건설강국, 제조산업 강국이 되었다. 다른 이들에게 '공장이 있네' 라는 생각만 들겠지만 평생 해외플랜트건설업에 종사하는 나로서는 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가 무량하다. 철강의 가격과 품질은 경쟁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라 포스코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잇점인지 남들은 알까?

길을 걸으면 내가 보인다.

(내용 중 일부는 일행이 찍은 사진들을 인용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