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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음악 인생

carmina 2022. 8. 7. 21:37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내가 들은 음악은 크게 세가지였다.

하나는 큰 형님의 팝송과 클래식이었고

또 남진, 배호를 좋아하는 둘째 형님이 사온 전축으로 듣는 유행가였으며

누님이 집에서 일을 하며 라디오로 듣고 얼른 가사를 적어서 부르는 트로트였다.

그 세가지 음악 중 내 인생 진로는 11살 터울의 큰형님과 같다.

큰 형님은 같은 국민학교, 같은 중,고등학교, 그리고 같은 대학의 같은 과 선배다.

그러다보니 큰 형님과 같은 방을 쓰는 시간들이 많았다.

그래서인가 클래식 음악은 내가 굳이 알려도,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음악이었다.

나이들어 국민학교의 생활기록부를 볼수 있다 해서 인근 학교의 행정실에 찾아가 확인한 내 기록에는 놀랍게도 1학년때 담임선생님 평가가 '음감이 예민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아마 어릴 때 부터 청력이 약해 귀를 쫑긋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평했을까?

그 때는 생활기록부를 부모님이 보지 못했던것 같거나 혹은 무심했던 것 같다. 

설마 그랬어도 부모님은 내게 음악을 시키지 않았을 것 같다.

책읽기와 국어를 좋아했던 나는 진학 후 교사가되고 싶었지만, 

어머님은 문과와 이과를 결정해야 하는 고등학교 1학년 말기에 학교에 오셔서 담임선생님에게 우리 아이는 졸업 후 공장에 취직시키고 싶다고 하실 정도로 부모님의 삶이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국민학교 5학년에 홈룸시간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약 1시간동안 선생님의 간섭없이 학생들의 진행으로 열리는 자치회의였다.

어느 날 얼굴이 희멀겋고 키 큰 반장이 앞에 나와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불량스런 팝송을 흥얼거리고 다닌다고 비판했다.

나는 큰 형님이 부르는 톰존스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들을 귀동냥으로 듣고 자연스럽게 흥얼거렸을 뿐이다. 

소심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앞에 나와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반성했다.

그리고는 마치 지동설을 주장하여 허황한 소문을 냈다고 종교재판을 받은 코페르니쿠스가 법정에서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고 중얼거린 것처럼, 내 음악에 대한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노래라는 것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이웃집 형님따라 간 교회의 여름성경학교시간이었다.

악보없이 가사만 써 놓은 커다란 종이를 보고 들은 대로 노래하는 주일이 참 좋았다.

그래서인가 처음에 내 밑에 동생 둘과 함께 찾아간 교회는 그해 겨울 쯤부터는 나 혼자만 교회를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동네 친구따라 노래를 배우는 모임이 있는 인천 공보관을 찾아갔다.

매주 목요일마다 인천 YMCA에서 주관하는 Sing Along Y.

인천의 중고등학교 학생 그리고 대학생들이 이 곳에서 포크송들과 외국의 민속들을 번역한 노래들을 불렀다.

당시 주제가가 '긴머리 짧은치마 /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 / 무슨말을 하여야 할까 / 

라고 시작되는 노래였다. 

그 모임에 가기 위해서는 30원을 내고 약 7~8개 곡의 노래 악보가 실려있는 유인물을 사야 했다.

때로는 그 친구의 사촌이 그 모임을 리드하니 악보를 무료로 받기도 했다.

리더가 기타를 치며 노래의 한소절을 부르면 앉아 있는 학생들이 따라하며 배우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 음악적인 재능을 발견했다.

이전까지 내가 악보를 읽을 줄은 몰랐는데...

리더가 먼저 노래를 가르치기 전에 한 번 전체 노래를 불러 주는데

나는 그 때부터 처음보는 노래의 악보를 보며 따라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리더가 노래를 가르치고 나서 제대로 부르는 사람을 앞에 내세워 불러보게 했는데

목청도 큰 내가 꼭 그 앞에 나서게 되었다.

그 모임이 내게는 정말 귀한 시간이었고, 친구 따라서 기타도 배웠다.

그러다보니 레크레이션을 리드하는 기회가 많았다. 

이후 대학 졸업때까지 교회의 모든 친교행사는 기타를 칠 수 있고, 많은 노래를 알고 있는 내가 맡았다.

부모가 교회를 다니지 않으니, 교회를 못오는 날이 많아 내게는 학생회의 회장 자리가 주어지지 못했고 나는 늘 친교부장, 문화부장만 맡았다.

고등학교때 뿐만이 아니라 대학에 가서도 우리 과의 모든 야외행사, 미팅 모임의 사회등은 내가 도맡아 했다. 어느 해 처음에 같이 노래를 했던 동네 친구가 나와 같이 당시 막 붐이 일고 있었던 '연하나로기획사' 같은 레크레이션 회사를 하나 만들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서슬이 퍼런 우리 집안분위기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대학생이 되니, 교회의 찬양대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내 목소리가 너무 유행가같다고 핀잔을 받기도 했다. 

청년부에서는 처음으로 노래를 잘하는 형님과 누님들이 있어 주로 그들과 어울렸다.

그런 젊은 시절이 지난 후 나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대학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들어가고 그런 음악인생이 끝나는가 했는데 음악생활은 직장에서도 이어졌다.

K대 법대출신의 나의 첫 상관이 대학합창부도 다녔고, 클래식성악에 관심있으며 미성을 가진 분이었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몇 몇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이 있어 토요일 오전근무 끝나고 기타를 들고, 여의도 고수부지에 나가 술마시며 노래를 부르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 분을 통해서 어릴 때 큰 형님이 듣던 클래식에 대한 관심을 처음 가졌다.

그 회사에서도 내가 대학시절 Sing Along 을 했다는 특이한 경력이 입사했다는 것은 내 자부심이다. 아울러 이런 능력이 회사의 직원들의 갈등 화합에 커다란 기여를 하기도 했다. 

첫 회사가 경영사정이 힘들어 파산지경에 이르렀을 때 미리 회사를 떠난 첫 상관이 다른 회사로 옮긴 후 나를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후임으로 불렀다.

그 곳에서 회사의 지원으로 합창단을 조직했다. 제대로 성악을 하는 사람을 통해서 노래를 배우고 광화문 앞에 있는 한국일보 강당에서 공연도 했었다. 

외국에 근무하면서 첫 상관과 해외현장에서도 만나 지속적인 음악적인 교류를 갖고, 현지에서 그 분이 추천하는 클래식 음반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회사 근처에 금요일 정오면 직장인들을 위한 예배를 보는 교회에서 잠깐의 시간을 빼서 그 예배의 성가대에 참여했다. 모두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예배에 참석하기에 지휘자가 업무에 바빠 못오는 날은 내가 가르치기도 했다. 

그 시기에 내 음악 취향의 방향을 잡은 계기가 생겼다.

직장인성가대에서 같이 노래하던 친구가 내가 노래를 좋아하고 악보를 잘 보니 같이 가고 싶은 합창단이 있다고 해서 퇴근 후 따라간 광화문근처에 있는 독립문교회를 빌려 노래하는 '시온성합창단'.

모두 직장인들, 음악전공학생들, 그리고 시립합창단원도 있었다. 

가르치는 분은 대전 목원대 음대의 나이가 아주 많은 '이동일교수님.'

합창의 거장 윤학원씨와 약간 앞서거나 동시대에 합창 지휘자의 반열에 계신 분이다. 

아주 독특한 합창 음악을 가르쳤다.

거의 종교곡인데 모테트, 미사곡 등...

일반 교회의 성가대와는 다른 발성과 전문가다운 연습분위기다.

 

악보를 보면 파트연습도 없이 바로 지휘자님이 원하는 발성으로 노래를 해야 한다. 

어쩌다가 음이 틀리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자세가 삐딱하고 자신의 실책에 변명을 하면 악보를 빼앗아 찢어버리고 단원을 내 쫒았다.

그렇게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지고 가르치는 합창음악들에게 내 마음을 완전히 뺏겨버렸다.

그 분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노래의 악보를 단원들이 외부로 반출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셨기에 연습 후 악보를 반드시 회수했다. 미국시민이었기에 그 분은 철저하게 지적재산권을 행사하시는 분이었다. 

그 곡들은 모두 외국에서만 구입할 수 있었고, 모두 교수님이 직접 번역을 한 곡들이었다. 

그러나 그 합창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수님이 미국 국적인데 미국으로 가버리셨다.

그 악보가 너무 탐났는데, 미국으로 가시면서 내게는 악보를 주어도 된다고 합창단 총무에게 얘기해 두셨다며 총무가 내게 구하기 어렵고 귀한 악보를 많이 건네주었다. 

 

이후 해외현장 생활하면서 음반을 구입해도 모두 종교 미사곡이나 모테트 음반들을 구입했다.

해외 다녀오고 결혼을 했다. 

내가 직장인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아는 부서 상관이 피아노를 전공하고 이제 막 대학 졸업하겨 피아노 학원을 하는 자신의 처제를 소개시켜 주어 무난히 총각생활을 면했다.

아내도 나도 부모님의 재정적인 도움 별로 없이 아주 검소하게 내가 결혼전부터 혼자 자취하던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혼수품으로 다른 가구는 없어도 오디오는 가지고 오라고 부탁했다.

결혼 후에도 내가 다녔던 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는데, 장인어른이 늦은 나이에 신학공부를 하고 개척교회하고 계시는걸 알면서도 반주자인 딸을 데려가 버려 교회에 반주자도 없이 예배를 드린다기에 아내가 울며 호소하니 어쩔 수 없이 교회를 옮겼다.

그리고 본격적인 내 생활의 바운더리내에 음악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에서는 아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부르는 한국가곡과 이태리가곡들을 같이 부르고 우리 집에서는 늘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또한 이제까지 배웠던 합창 음악의 감성과 경험으로 성가대의 지휘를 맡았다. 

노래를 가르친다는것은 단지 악보대로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다.

결혼 전 다니던 교회의 성가대에서 중학교의 음악선생님이었던 나이든 지휘자가 음악의 종류와 상관없이 무조건(골지게) 크게만 노래하라고 가르치기에 젊은 혈기에 이 노래는 그렇게 부르는게 아니라 반발하며 뛰쳐나오기도 했다. 

작곡자와 편곡자의 의도를 찾아내어 가르치는 것. 늘 악보를 보며 연구했다.

어떤 분이 우연히 예배에 왔다가 작은 교회에 성가대의 찬양이 가장 좋았다고 평했다. 

인터넷이라는 신비한 매개체가 나오고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만나기 시작하고 수많은 음악 이야기들을 파란 화면에 쏟아내고 때로는 오프라인으로도 만나 클래식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 모임을 통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오디오에 대한 상식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아쉽게도 장인께서 일찍 소천하셨기에 교회를 옮기고 부천에 있는 대형교회를 다니며 찬양대를 하고, 금요심야예배 찬양대의 지휘자를 하기도 하며 또 다른 음악의 만남이 있었다.

마침 교회 찬양대의 지휘자가 고음악을 전공한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고음악합창을 좋아하던 내가 고음악 연주회에 갈 일이 많아졌고, 나도 어디 가던 고음악의 아름다움과 트렌드를 역설했다. 

이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역할은 늘 찬양대의 지휘자였다. 때론 시골교회에 가서도 지휘를 하고 어디서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합창을 만드는 일이었다. 

또한 부부들끼리 모여서 노래를 합창단에 들어가 전직/현직 시립합창단 지휘자들에게서 종교음악은 물론 세속음악을 부르는 새로운 합창음악의 세계에 입문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매니아들과 30년동안 어울리며, 내 삶은 음악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늘 음악을 듣고 자란 딸이 어린 나이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하여 대학과 유학을 다녀 온 후 고음악을 연주하는 음악가의 길을 가고 있고, 늦게 음악을 시작한 아들이 어릴 때부터 음악을 자연스럽게 들으며 타고난 음악의 재능으로 남들은 몇 년을 공부해야 가능한 음대진학을 불과 몇 개월 공부하여 음대 작곡과에 합격하고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인정받는 음악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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