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빵칼과 아버님

carmina 2022. 8. 14. 22:45

아침에 빵칼로 빵을 썰다가 문득 아버님이 그리워졌다.

생전 직장생활만 하신 아버님은, 다른 사회생활이 거의 없으셨고, 그 어디에도 아버님의 사진 속에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없는 것을 보면 여행이라는 것도 해 보신 적이 없는 분이다. 

전체 식구 9명을 먹여 살리려면 그렇게 개인의 사생활을 즐길 시간이 없으셨을 것이다. 

또한 국가의 기간산업인 제철회사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 용광로옆에서 평생을 사셨으니 용광로 불이 꺼지지 않는 한 아버님께 휴일이라는 것은 없었다. 

약주를 좋아하셨지만, 아무리 취하셔도 다음 날 아침에 자전거를 끌고 출근하는 일은 절대 건너뛰는 적이 없으셨다. 

어머님도 여행사진은 오래 전 동네 어른들과 창경궁에 개나리 배경으로 사진 찍은 것이 유일한 사진이다.

그런 아버님께서 어느 날 누군가 가지고 온 날이 뭉툭한 양식용 빵칼을 보시고는...

칼이 너무 안든다며, 그걸 숯돌에 열심히 갈아 날카롭게 만드셨다.

그 칼은 그런 용도가 아니라며 말씀드려도 자고로 칼이라는 것은 날카로워야 한다며...

 

그러나 빵칼은 손에 잡는 그립이 안 좋아 아무리 날카롭게 갈아도 손잡이와 날 부분의 거리가 있어 과도로 쓰기에는 영 불편했다. 

결국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지만, 이후로도 아버님이 아시는 세상 안에 다른 세상이 들어 올 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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