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내고향 인천 달동네 화수동

carmina 2022. 9. 4. 22:39

2013년 6월 22일 토요일

 

인천에 있는 교회에서 합창단 친구의 아들이 결혼식한다기에

결혼식 참석하여 축가부르는 것 보다

오랜만에 내 고향을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기분좋게 했다.

미리 다음 지도의 도로검색기능으로 내가 살던 집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해 보았지만

그래도 직접 가봐야지.

 

결혼식 후 동생부부와 같이 찾아가는 내고향 화수동.

인천의 대부분 동네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알아 볼 수 없도록 변했지만

내 고향 화수동 달동네는 거의 변함이 없다.

 

길을 찾아 가는 것도 새로 생긴 도로와 변해 버린 주위 환경으로

도무지 방향을 못 잡을 정도라 네비게이터의 안내로 따라 찾아 간 내 고향.

이 곳에서 태어나고 학창시절을 다 보내고 결혼하고나서야 떠나왔다.

 

이전에는 어느 집이나 모두 대문을 열어 놓고 살던 동네인데

이젠 모든 집이 다 문이 닫혀 있다.

내가 살던 집도 새 주인이 대문과 이층을 모두 빨간 벽돌로 막아 놓아

마치 냉동창고 같은 분위기다.

겨우 밖으로 나와 있는 옥상 계단만이 보일 뿐이다.

장독대가 있던 곳에 빨래가 널려 있고

밖에서도 시원한 마루가 보이던 이층은  조그만 알루미늄 샷시로 된 문하나만이

보일 뿐이다.

 



내 어릴 적 동네의 골목들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어느 곳에서는 새로운 골목이 생기고

골목 안의 낮은 이웃 집들은 모두  2~3층 벽돌집으로 변해 버렸다.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은 그대로 살고 있을까?

모두 문을 닫아 놓았으니 알 길이 없다.

 

어릴 적 우물이 두개가 나란히 있는 쌍우물이 있어

우리 동네를 부를 때 쌍우물동네라 했었는데

이제 새로 난 주소도 역시 '쌍우물로'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제 쌍우물의 흔적은 기념비와 두터운 나무로 막아 놓은 우물만 남겨 두었다.

 

어느 마을이나 사람은 우물 곁에 모인다.

이 곳에서도 쌍우물 앞의 도로는 제일 넓은 도로라 사람들이 많이 오간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모퉁이에 있는 구멍가게를 겸한 담배가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고 어머니가 평생 반찬거리를 사시던 곳

명절이면 받아든 세뱃돈을 들고 제일 먼저 과자 사먹으러 달려 가던 구멍가게는

아직도 조그마하게 영업중이다.

 

그 앞에 할머니 몇 분이 앉아 계시는데 그 중 한 분의 얼굴이 낯이 익기에

다가가 인사를 드리고

"저기 윗 집에 살던 XX이 (큰 형님 이름)네 동생인데 알아 보시겠어요?"

"XX이?  아..반장네 집?"

"네 맞아요"

우리 집은 아버지대부터 동네 반장을 하고 아들이 많아  7남매의 막내까지 이어받아 

거의 몇 십년을 동네 반장을 했다.

내가 그 곳을 떠나 온지는 28년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남은 동생도 떠나온 지 거의 25년되었다.

그런데 아직 우리 집을 반장집으로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가 무척 반가왔다.

 

어머니가 말년에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혼자 빨래하시던 기억을 말씀하시고

그 집에 어느 아들인가 황달 걸려서 고생했다기에 내가 그 아들이라 했더니

나를 보며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하신다.

 

할머니들께 구멍가게에서 박카스를 사서 대접하고 아직 이 곳에 사시는 분들 있느냐 여쭤보니

몇 분 이름을 알려 주신다. 평생 살고 있는 동네를 지키는 사람들.

땅을 가지고 있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닌데

그 들은 아마 어쩌면 떠나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며 사실 것 같다.

 

마침 우리 앞 집에 사시던 분이 잠시 문 밖에 나와 계시기에 얼른 인사를 드렸더니

머리를 갸웃거리시지만 누군지 확실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용철이네, 현수네, 춘식이네, 동재네 등등 모두 언제 어디로 이사갔을까?

오늘같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초가집 지붕에서 볏집을 빼서 동네 마당에 큰 불을 놓고

달님 달님하며 놀았었고,

겨울이면 비탈진 동네 골목에 내나무를 잘라  미끄럼을 타고

작은 동네 실개천에서 외발 썰매를 타기도 했었는데..

언덕위로 허름한 동네는 모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커다란 공원이 세워졌다.

100년전에 내가 살던 집까지 바다물이 들어왔고 그 곳에 처음 미국 상선이 들어왔다 해서

그 자리에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지고 지금은 화도진이라는 공원으로 변했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던 우리 동네에 우리 집이 제일 처음 양옥집으로 변하고

그 뒤로 한 두 채 씩 초가 지붕을 벗겨냈다.

제일 먼저 금성 흑백티브이를 구입하여 저녁만 되면 사람들이

당시 유행하던 일일 연속극 '여로'를 보기 위해 우리 집 대청마루로 몰려 들었고

전화도 제일 먼저 설치했기에 우리 집 전화는 거의 동네 공공전화 역할을 했다.

 

저녁만 되면 아버님께 저녁진지 드시라고  찾아갔던 주막집도 사라졌고

만화가게와 싸전도 사라져 버렸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지만 거의 와보지 못하는 이 동네.

인천에서도 무척 낙후한 곳이고 발전 가능성이 없는 곳이기에 앞으로도 오랜동안

이 모습만이라도 그대로 간직할 것 같다. 

 

당시 고개위에 제일 큰 집이었고 내가 초등학교부터 결혼 전까지 다녔던 교회는 아직 그 자리에 있고

하얀  교회 건물도 형태는 그대로지만 노란색으로 바뀌어져 있다.

구 성전을 교인들이 이용하는 카페로 만들어 놓았기에

들어가니 오늘은 커피를 팔지 않는단다.

이 전에 다니던 곳이라 들어왔는데 잠깐 앉아 있다 가겠다고 승락받고

혹시 본당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고 했더니 잠겨 있지만 문을 열어 준다.

100년이 이 교회도 그 사이 많이 변했다.  

이 교회에서 자라고 결혼식까지 올렸기에 애정을 가지고 여기 저기 둘러 보았는데

아내도 그런 생각을 가졌었을까?

이전에 군대 휴가 중 나와 특송했던 찬양이 생각 나

그 자리에 서서 당시 불렀던 찬양 첫 소절을 하는데 눈물이 나고 목이 막혀 얼른 포기했다.



 

 

 

교회 앞으로는 멀리 공장지대가 보인다

아버님이 평생 근무하신 제철공장.

야간근무를 하시는 아버님께 저녁이면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들고 찾아 갔던 곳

공장안의 공중목욕탕은 우리 형제들 목욕탕이었고

용광로 옆에서 평생 근무하시던 아버님은 당시 유명한 일동제약이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타이틀로

시리즈 아로나민 광고를 할 때 첫 모델을 하시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가니 제일 먼저 학교 앞에 재래식 목욕탕이 간판도

예전 그대로 달고 영업하고 있다. 얼마나 반갑던지..

학교 운동장은 인조 잔디를 깔았고 허름했던 학교 건물은 말끔하게 변했다.

들어가 볼까 하다가 혹시 의심할까봐 교문앞에서 서성거리다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멀지 않은 곳에 사시는 누님 댁에 들렀다.

갑자기 찾아갔지만 오래전부터 동생 오면 줄려고

미리 준비하신 것 같은 푸짐하고 맛있는 반찬으로 저녁을 즐겼다.

오랜만에 누님의 반찬을 통해 어머니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추억은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는 곰삭은 간장같다.

가끔 그 추억을 추억으로만 두지 말고 직접 찾아가 추억을 들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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