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나 어린 시절의 기억

carmina 2022. 9. 4. 22:41

마당과 뒷뜰이 넓은 집이 있었다.

장독대에는 어릴때 내 키만큼이나 큰 장독에 누런 메주와 빨간 고추 새까만 숯가락이 둥둥 떠다니던 새까만 간장독 뜨거운 햇살에 잘 익은 고추장 항아리에 어느 날 날아드는 새까만 눈먼 풍뎅이가 있는 날은 온종일 그 녀석을 장애아로 만들어 놓고 놀던 우리 집 안마당. 그리고 장독 뒤의 벽돌 담벼락은 가끔 형님이 연 날린다고 올라가서 늘 흔들 흔들. 집을 새로 짓는다고 형님과 내가 그 담을 손으로 밀어서 쓰러뜨려 버렸을 정도로 허술한 담이 있었다.

 

뒷 뜰에는 채송화, 맨드라미, 봉숭아, 분 꽃, 피마자 등의 꽃들이 자랐고, 때로는 돼지감자라는 씨알이 무척 굵은 감자를 심기도 했다. 특히 누님이 그 화단을 잘 가꾸어 해마다 가을이면 씨앗을 모으느라 신경을 쓰기도 했다. 마루에서 뒷 뜰로 나가는 문을 열면 집 안에 늘 꽃 향기가 있어 좋았다.

 

안 마당도 까맣고 고운 흙으로 덮여 있어 동네 애들과 비오는 날은 마당에 침을 뱉고 발로 쓱쓱 문질러 땅을 조금 축축하게 하고는 사각형을 그려 그 안에 구슬을 놓고 엽전으로 던져 씌어 먹는 구슬 치기. 그러나 그 마당도 세멘트로 덮여 버린 날 구슬치기는 부엌으로 장소를 옮겨 하던 때도 있었다.

 

윤이 반질 반질 흐르던 넓은 마루. 마루를 덮고 있는 널판이 조금 엉성해 가끔 동전을 그 사이로 빠져 컴컴한 마루밑으로 기어들어가 꺼내오기도 하지만 그 엉성함이 우리 선인들의 지혜인줄은 자라서야 알았다. 그게 아주 좋은 통풍기능을 한다는 것이...

 

그 마루에서의 낮잠은 늘 나를 포근하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 가장 오래 된 추억은 그 마루에서의 낮잠이다. 한 낮에 그 곳에서 잘 때 잠결에 어머니가 나를 부르시는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마루위 천정아래에는 네모로 잘 다듬어진 커다란 통나무2개가 평행선으로 가로 놓여있어 웬만한 광주리나 덩치가 큰 물건을 주로 그 위에 올려 놓았다. 아주 어릴 적 가난하던 시절, 동사무소에서 구호물자를 배급받아온 노란 가루우유덩어리를 그 위에 얹어 놓았기에 깡총깡총 뛰어 그 우유푸대를 툭툭쳐서 우유 덩어리를 바닥으로 떨어뜨려 먹던 시절이 있었다.

 

나무와 연탄을 때는 아궁이가 있고, 큰 무쇠 솥에서 늘 뜨거운 김이 올라 오던 우리 집 부엌은 늘 30촉짜리 백열 전등하나 만이 달랑거리고 있어 늘 어두웠다. 어느 날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데 셋째형님 밥 그릇 안에 들어 있는 까만 쥐를 보고 모두가 놀란 적이 있다. 아마 어두운 부엌에서 어머니께서 잠시 무쇠 솥의 뚜껑을 여는 순간 생쥐가 들어 갔고, 밥을 풀 때도 김이 많이 나기에 미처 보지 못하신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메리라고 부르던 큰 누렁이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늘 좋은 친구였는데 어느 날 약을 잘 못 먹어 미쳐서 온 집 안을 뛰어 돌아다니며 날 뛰기에 내가 학교 간 사이에 집에서 팔아 치웠는지, 학교에서 돌아 오니 메리가 안 보여 툇마루에 앉아 얼마나 울었던지…

 

집 옆에는 조그만 개천이 있었고, 그 개천 장마에 넘쳐 날 때는 변소의 대변들을 퍼서 개천에다 버리던 생각이 난다. 겨울이면 쪼그리고 앉는 변소의 대변이 얼어 송곳처럼 솟아 삽으로 부수어버리기도 했고, 형제들이 많아 복잡한 아침 등교 길에는 서로 용무가 급해 엉덩이를 마주 대고 서로 일을 보곤 했다.

 

개천과 집 사이에 조그만 공간이 있어 그 곳에 그물로 망을 쳐 놓아 닭을 키웠는데 닭이 알을 낳은 후 우는 소리를 듣고 매일 제일 먼저 달려가 달걀을 꺼내 오는 기쁨도 있었지만, 때로는 그 닭에서 나오는 이 때문에 온 집안 사람들이 힘들어 했던 적도 있고, 유난히 사나운 닭 한 마리가 있어 그 닭을 잡아 먹을 때 무척 힘들었다.

 

유난히 형제가 많았던 우리집.

아들 여섯 명에 딸 하나, 부모님까지 합치면 도합 9명 거기에다 사촌형님까지 오랜동안 같이 오손 도손 조그만 방3개짜리 집에서 살았다. 온 식구가 나란히 앉아서 먹는 동그란 상은 둘레에 조그만 못 자국 구멍하나가 걸려 있어 식사 때만 되면 형제들이 그 못자국구멍을 자기 앞에 놓으려고 상을 빙빙 돌리며 쟁탈전을 벌이다가 아버님께 자주 혼나고, 우리 온 식구 밥을 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무쇠솥에 밥을 하나 가득해야만 했다. 그것도 나무를 때서 밥을 해야 하니 부엌은 늘 나무조각들과,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형제들이 많다 보니 옷이나 교과서는 물론 참고서, 가방등은 대물림 해야 했고, 모든 것이 충분치 못한 시대인지라 늘 절약정신이 몸에 박혀 있어, 조그만 몽당 연필 하나 조차도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는 우리 생활이었다. 내 생전 대물림 받지 않고 내 옷이라고 정해진 옷을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셔서 입은 것이 초등학교 6학년 때던가?

 

초등학교 졸업식 날, 누님이 가지고 오신 졸업장통마저 형님이 사용하였던 것을 나에게 물려 주는 것이 서러워 얼마나 혼자 울었던가. 그 우는 모습이 안타까우셨는지 누님은 나에게 처음 농구화라는 것을 사주셨다.

 

어머니는 아버님의 결혼은 그 시대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아버님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이 첫 날 밤 신방의 촛불 앞에서였단다. 결혼 사진으로 맞선을 보셨다는데 이모께서 미리 아버님의 동네에 가서 아버님의 얼굴을 보시고는 무척 무섭게 생긴 분이라고 전해 주셨다. 결혼식때 아버님은 말을 타고 오시고, 어머니는 가마를 타고 오셨다 한다.

 

아버님은 술과 담배를 무척 좋아하셨고, 우리 형제들은 늘 저녁식사 때만 되면 아버님을 동네 선술집에서 모셔와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약주를 드셔도 절대 직장을 빠지는 일은 없으셨고 술을 드시고 다른 곳에 행패를 부리는 일을 절대 없으셨다. 노년기에 직장을 그만 두신 이 후에도 늘 소주를 집의 지하에 쌓아 두고 반주로 드셨으며, 늘 소주 반 병 정도는 아침 저녁으로 드신 것 같다.

 

담배도 늘 하루 두 갑 정도는 피우는 것 같았고, 방의 비닐 장판은 늘 담뱃불을 떨어 뜨려 녹은 자국이 많았고, 아버님의 바지는 담뱃불이 떨어져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많았다. 새로 지은 양옥집 안 방의 도배는 벽지무늬가 있는 베니어판으로 했는데 워낙 집에서 담배를 많이 태우셨기에 벽에는 노란 진액이 손에 묻어 날 정도 였다.

 

아버님이 인천제철에 오래 다니셨고, 주 야간 교대 근무를 하는 날은 형제들이 아버님의 도시락을 싸들고 철길을 따라 아버님의 공장을 찾아가서, 쇠 내음을 맡으며 도시락을 전해 드리고, 때로는 공장 목욕탕에서 아버님이랑 같이 목욕하기를 즐겨했다. 그 목욕탕에는 얼마나 무척 큰 전등이 있었는데 그 등은 너무 뜨거워 자연적으로 목욕실을 따뜻하게 할 정도였다.

 

중학교 2학년까지 우리집은 초가집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리 집의 절반이 소방도로를 만들기 위해 모두 허물고 그 당시에는 보기 힘든 2층 양옥집을 새로 지었다. 우리 집 옥상에 가면 화수동의 모든 곳이 낱낱이 보였으며, 화도고개까지는 물론, 아버님이 일하시는 공장의 굴뚝까지 보일 정도였다.

 

새로 집을 지을 때 우리 집터의 땅을 파니 그 밑에 얼마나 많은 조개껍질 무더기가 있었는지 아주 오래 전 우리 집터 자리도 바닷가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집 바로 옆에 화도진이라고 있었는데 이 곳은 인천에서 약 200년 전 처음 미국상선이 도착한 곳이라 하여,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배가 닿았던 곳이라 하니 우리 집 자리는 당연히 바다였겠지.

 

우리 집에서 한 10분만 걸어 나가면 고깃배가 닿는 바다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배들이 그곳에 정박하여 잡아 온 고기를 얼음으로 채워 어디론가 실려 보내고, 또 새로운 바다를 위해 떠나가는 배를 자주 보아왔다. 특히 그 곳은 새우젓이 많아, 속칭 새우젓 거리라 칭하기도 했다. 늘 바람이 불면 비릿한 내음이 집에까지 전달되었으며, 동네에 많은 이웃들이 고기 잡는 일에 종사했다. 집에는 어느 먼 바다에서 잡아 온 크고 뿔이 긴 바다 가재가 박제되어 벽에 붙어 있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에 처음 교회를 나갔다. 바로 이웃집에 고등학교 다니는 형님이 우리 형제들 중 나와 내 동생 둘을 데리고 여름 성경학교를 다녔다. 여름 성경학교를 지내고 난 뒤 나는 계속 교회를 다녔지만, 동생들은 더 이상 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은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형님들의 끝없는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이제껏 지켜 왔으나, 그 오랜 세월동안, 성경과 찬송가가 불 속에 들어가기를 몇 번, 성경을 몰래 품 속에 끼고 교회나가는 것은 아주 잦은 일이었다.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교회를 나가지 않으니 찬송가가 없어서 무척 궁색하던 때에 누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다 주신 찬송가가 얼마나 좋았던지…

 

그러나 그 찬송가도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식구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교회로 가는 골목길의 굴뚝 밑에 땅을 파 묻어 놓고 교회에 갈 때 파 내서 가고 올 때 묻어 두곤 했는데 어느 날 비가 와, 그만 찬송가의 두꺼운 표지가 다 떨어져 나갔을 때 얼마나 상심했는지…

 

우리 집은 형제들이 많다 보니 몇 십년동안 동네 반장일을 맡아서 해 왔다. 명목상의 반장은 아버님이었지만 큰 형님부터 막내에 이르기까지 거의 다 동네 반장을 하며 동네에서도 모범 집안이었고, 착한 형제들로 통했다.

 

그러던 형제들이 나이가 들며 한명 두 명씩 군대 생활을 위해, 혹은 지방에 있는 직장을 위해 집을 떠나고, 아버님도 오랜 세월을 다니시던 직장도 은퇴하고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며 소일을 하고, 그 토록 시끌 법적하던 집안도 조용해져 갔다.

 

나도 군대 생활을 위해 집을 오래 떠나 있던 중 동생이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고 오랜만에 동지가 생겼다.

 

중 3 때부터 처음 노래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 뒤로, 노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의 일부가 되었고, 그러한 노래는 나의 미래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교회에서 찬양을 하고, 군대에 가서도 자매교회에 나가 찬양하고, 내가 가는 곳엔 늘 노래가 있었다.

 

아버님도, 형님들도 모두 기계를 만지는 분들이라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만 해도 교사가 되기 원하였던 나는 2학년때 진로를 바꾸었다. 공대에 진학하기로 결정하고 역시 큰 형님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고등학교, 대학교 같은 과. 그러나 아무리 대학을 다녀봐도 공대라는 것은 내 적성에 그다지 맞지 않았음을 알게되고 고등학교 2학년때의 진로 변경을 평생 후회하게 되었다.

 

대학시절엔 공부보다 건전 노래를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서 다녔고, 군대위문공연, 고아원, 양로원, 근로자위문 공연 등을 위해 늘 기타를 들고 나니느라 공부를 등한시 하기도 했다. 대학의 과행사를 위해 늘 레크레이션이나 모든 행사는 도맡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내 인생의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대학시절 활발한 봉사활동과 어학실력으로 나의 재능을 유심히 간파한 교수님이 나를 어학을 필요로 하는 엔지니어링회사의 영업에 필요한 사람으로 국내의 유명회사에 추천하고,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무사히 대기업에 입사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그토록 자신없었던 영어였지만 회화에 관심이 생겨 군대 졸업후 열심히 영어회화를 다니기 시작하여 대학 졸업 때 쯤엔 그래도 외국 사람과 만나 대화도 할 수 있었고, 군 시절 보초를 서면서 틈틈히 배워 두었던 일어회화도 직장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학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이전에 몰랐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어학에 재미를 붙여서 중국어도 열심히 하고 또한 스페인어도 계기가 있어 배우려 많이 노력했다.

 

첫 번째 다니던 직장이 이란 이라크 전쟁으로 말미암아 어려운 처지에 있어 다른 회사로 넘어가고, 직원들도 하나 둘 난파선의 쥐처럼 모두 빠져 나갈 때 나도 내 상관을 따라 다른 건설회사로 옮겨 처음으로 사막의 열풍이 있는 중동의 해외 현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날아가, 모래 바람을 마시며 처음 외국의 맛을 본 뒤로 내 인생동안 수없이 날아 다닌 하늘. 그리고 많은 국가들. 이런 것들이 나의 꿈이 되고 소중한 기억들을 모아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노래 인생, 내가 노래에 소질이 있었던 것은 중학교 시절 건전노래를 배우러 다닐 때부터 미리 알게되었고, 노래가 있는 곳엔 항상 내가 있었다. 교회의 찬양대, 인천 YMCA 모임, 각종 레크레이션 지도자. 등등…

 

이러한 나의 음악인생도 나의 홈페이지의 커다란 부분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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