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들/살며..감사하며..

내 고향 인천 화수부두

carmina 2016. 9. 6. 10:41





고향을 떠난지 30년이 넘었지만

나는 아직도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며 늘 고향을 꿈꾼다.

그리고 고향이 생각날 때 마다 대형 마트나 재래시장을 찾아

어물전 코너에서 생선비린내를 맡아야 기분이 가라앉고

아직도 내게 최고의 반찬은 생선회와 생선구이다.


내 고향 인천은 남들이 인천출신을 짠돌이라 부를 정도로

짠 냄새가 가득한 도시다.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날이나

서풍이 불때는 담을 넘어 오는 짠 냄새로 온 집안은 생선비린내로 가득찼다.

그리고 동네 모든 집은 담장마다 낮은 지붕마다 생선을 말리느라

동네 골목에서 늘 비린내가 났다.

시골에서 자란 애들은 참외나 수박서리를 하는데

우리는 조기같은 생선 서리를 했다. 대충 말라가는 생선 몇 마리를

훔쳐 옹기종기 연탄불에 둘러 앉아 구워 먹으면

그 고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천의 연안부두나 월미도가 번창하기전까지는

인천의 모든 생선들은 화수부두와 만석부두를 통해서 들어왔다.

거무튀튀한 뱃기름에 가득 쩔은 커다란 고깃배들이 늘

항구를 메꾸고 있었다.

우리 집은 화수부두에서 도보로 5분거리였고 지금도

인천의 가장 낙후한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만석부두는 만석동에 있는 곳으로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무대가 된 곳이고 이전에 강화도를 가기 위해서 배를 타던 곳이었다.


밀물이 되어 배가 오는 들어오는 날이면

얼음을 배로 보내느라 제빙소에서 보내는 공중의 긴 파이프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났고, 많은 어부들이 부지런히 갈고리로 찍은

나무 궤짝에 실은 생선을 배에서 부두로 옮기면 아주머니들이

파리떼처럼 들러 붙어 생선을 종류별로 크기별로 분류를 했다.


특히 김장철에는 서해 앞바다에서 잡아 오는 새우가

온 부두에 가득차고 녹슨 드럼통에 가득 가득 채워졌다.

그래서 새우젓골목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녹슬지 않는 플라스틱 드럼통이나 커다란 비닐이 없던 시절이라

당시에는 그렇게 위생적인 것을 따지지 않고  드럼통의 새우를 

커다란 삼지창으로 퍼서 됫박으로 덜어서 팔았다.


뽀빠이처럼 닻 문신이 새겨진 검은 얼굴의 사내들 팔뚝은 굵고 거칠었으며,

머리에 수건을 싸맨 아낙네들은 쪼그리고 앉느라 긴 광목치마 끝이

생선 궤짝에서 흘러나온 물로 진창이 된 바닥에 끌리는 것도 모르고

사내들과 함께 걸찍한 음담패설을 하며 작업을 했다.


그 곳에 가면 내가 무척 싫어하는 육두문자들이 마치

담배연기 내뿜듯이 거칠게 쏟아졌다.

소주는 댓병을 사서 맥주컵으로 마셔야 하고

안주로 나오는 생선 구이는 통째 들고 뜯어 먹어야  

뱃놈인걸로 알았다.


부두에는 늘 색시집이 있었다.

바닷가 허름한 집의 다락방에 새빨간 등이 켜져 있으면

우리는 그집을 색시집이라 불렀다.


내고향 푸른 바다라는 말은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말이고

내 고향 인천 앞바다는 고깃배가 닿는 검은 바다였고 무척 깊었다.

그러다 보니 안전사고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서해 앞의 작은 섬들에서 사는 어부들은 아들들이

자신의 가업을 잇기 위해  인천의 수산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우리 집에도 수산고등학교 학생들이 하숙을 하고 있었으며

그 중 내 형님의 친구 한 명이 졸업 후 화수부두 배에서 작업 중 그만

어두운 밤에 배와 배를 연결하는 나무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아직도 그 때 형님이 슬퍼하며 울던 기억이 난다.


또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 배들이 간혹

납북되었다는 소문들로 동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


내게 화수부두의 검은 바다는 독약같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 혼이 나고 매맞고 집을 쫒겨 나면

나는 늘 화수부두의 뱃터에 앉아 자살을 생각했다.

죽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앉은 자리에서 조금만 미끌어지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수영을 잘 못한다.

3분의 형님들과 바닷가로 놀러 나가면 나는 늘

형님들이 바닷가 바위에서 벗어놓은 옷을 지켜야 하는 역할을 하느라

내게 넘실거리는 바닷물로 들어갈 기회도 없었고

그 갯벌과 갯골이 가득한 바다에 들어 갈 용기도 없었다.


어쩌다 태풍이 불면 동네 어머니들은 바다로 놀러 나간

아이들을 걱정했다. 인천 앞바다의 갯벌은 유난히 질퍽해서

갯벌을 밟으면 발이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만약 밀물 시간을 모르고 갯벌로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였다.

나도 태풍부는 줄 모르고 바다를 나갔다가 

갯벌을 빠져 나오느라 정말 죽을 고생를 한 적이 있다.


화수부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바다의 바닥에 깨끗한 모래가 깔린 선착장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변가는 아니고 근처에 판유리를 만드는 공장이 있어

유리의 재료인 모래를 수입해는 배가 닿는 곳인데

모래를 배에서 공장으로 나르면서 선착장에 흘러 내려

자연스럽게 모래가 깔린 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은 배가 도착하지 않는 날에는 

선착장에서 다이빙도 하고 갯벌의 검은 바다에서

절대 누릴 수 없는 축복을 즐겼다.

수영복도 없던 시절이라 마치 유명 화가의 그림들처럼

우린 모두 보통 팬티나 벌거벗은 채로 바다에 뛰어 들었다.

그 곳에 여자애들은 있을 수가 없었다.


화수부두에는 여객선이 드나들지 않았지만

만석부두에는 당시 영종도나 작약도 그리고 강화도로 가는

여객선이 드나 들었다. 나도 중학교 2학년 시절 강화도로 여행을 갈 때

만석부두에서 배를 탔던 기억이 있다.

어느 부둣가나 다 그렇지만 화수부두에는 작은 조선소가 있다.

그 곳에 한 번도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버님이 인천에 오셔서

제일 먼저 직장을 잡았던 곳이기에 눈여겨 본다.

얼마 전 화수부두를 다녀왔는데 조선소만은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우리 나라의 큰 기업 중에 목재회사가 몇 개있었고

인천에는 그런 목재가공회사가 많았다.

그 중 하나가 화수부두에서 멀지 않은 곳의 월미도에 있는 대성목재였다.

화수부두 앞바다에는 대성목재가 수입한 원목을바다위에 하역해 놓고

큰 꺽쇠로 나무들을 연결해 놓았다.

원목들을 통째로 수입하기에 필요없는 껍질은 모두

주민들 차지였다. 주민들은 끝이 넙적한 쇠막대로

껍질을 긁어 땔감으로 쓰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를

팔아 생계를 꾸려 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곳에도 위험은 도사리고 있었다.

어쩌다 작업하다가 실수로 통나무 사이로 빠지면 그야말로

바닷속에서 밖으로 헤엄쳐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려 목숨을 잃기도 했다.

동네의 집 앞에서는 너도 나도 껍질을 말려 땔감으로 쓰느라

바닥에 길게 펼쳐 놓은 모습이 늘 보였다.

우리 집은 가족이 많아도 아버님이 어업이 아닌

인천의 제법 큰 공장인 인천제철에 다니셨기에

비록 집의 모든 부엌의 아궁이가 나무 땔감을 필요로 해도

가족들이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다.

단지 집의 몇 개 있는 아궁이를 위해 남들로부터

그런 땔감을 트럭으로 구입해 옮기는 일은 형제들이 해야 했다.



또한 대성목재다니는 직원들도 작업환경이 열악한 공장이라

사고를 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친한 친구 아버님도

그 곳에서 일하시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동네 아저씨 중에 원양어선을 타는 분이 있어

가끔 먼나라에서 볼 수 있는 뿔이 길고

커다란 가재같은 모양의 박제품과

열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뿔고동같은 커다란 소라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화수 부두 앞바다에는 배가 많이 드나들기에 기름때문인지

갯벌은 죽어 있었다. 그 곳에 살아 있는 생물은 갯강구와

어쩌다 갯지렁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바다 낚시는 

갯벌을 한참 걸어나가거나 배를 타고 나가야 가능했다. 


화수 부두 근처에는 큰 공장들이 많았다.

철도차량을 만드는 공작창이 있었고, 외국에서 고철을 수입해

용광로에서 녹여 철판을 만드는 인천제철 그리고 큰 전기자재를

만드는 회사도 있었기에 그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부두에 와서 술을 마시지는 않는 듯

부두에는 그다지 선술집이 많지 않았다.

 

바닷가 동네이다 보니 어구를 다듬는 일이 많았다.

동네의 처녀들은 거의 다 그물 뜨는 일에 동원 되었다.

그물을 뜨기 위해서는 원사를 받아 오면 그걸 물레에 걸고

종류별로 대나무 바늘에 칭칭감으면 그물 뜨는

아가씨들이 빠른 손으로 마치 망사 엮듯이 그물을 뜬다.

아버님께서 여자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셔서 누님은 국민학교 졸업 후

바로 그물을 뜨는 일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해서 번돈으로 오빠들과 동생들의 용돈을 집어 주셨다.


어머니는 가끔 부업으로 동네에서 가까운 어묵제작 공장이니

김을 가공하는 공장에 나가셔서 일을 하기도 하셨다.

일을 하고 나오면서 김이 무럭 무럭 나는 어묵이나

일본에 수출용으로 만드는 김 통조림을 받아 오면

정말 형제들이 서로 먹을려고 제비새끼처럼 몰려 들었다.

나는 아직도 어묵 반찬에 질리지 않았다.

가정식 식당에 들어가서도 어묵 반찬이 있으면 제일 먼저

젓가락이 그쪽으로 간다.




대개 바닷가가 고향이라면 맑고 푸른 바다와

작은 돛단배가 한가롭게 떠다니는 바다를 상상하겠지만

우리 집 앞의 바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 곳에는 늘 비린내가 가득했고, 생선 썩는 냄새,

기름냄새 그리고 살아 숨쉬는 생선보다는 

이미 죽어 냉장된 생선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 곳에 요즘처럼 수족관을 가진 횟집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에 살았지만 활어회는 거의 먹지 못했다.

요즘 흔한 도다리나 광어, 우럭등은 어릴 때 보지 못한 생선들이다.

아마 그건 남쪽 지방사람들이나 서해안의 섬에서나 있었겠지.

아버님이 바다일을 하지 않으셨기에

배에서 바로 잡아 올라온 생선이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다.

단지 잡으면 즉시 죽는 병어는 가끔 싱싱한 것만 식초로 헹궈서 회로 먹었다

망둥어는 인천 앞바다에서 쉽게 잡히고

요즘 무척이나 비싼 갈치와 꽃게는 당시에는 흔한 생선이었다.


망둥어는 낚싯대로 잡으면 그대로 머리와 꼬리를 잘라

초고추장을 찍어 통째로 먹을 수 있었다.

요즘은 간장게장이 무척이나 귀하고 비싼 음식이지만

당시는 꽃게가 흔해서 간장게장 달이는 냄새가 집집마다 고소하게

풍겨 나왔다. 나는 아직도 싱싱한 게를 사서 간장을 끓여

게장을 직접 달여 먹는다. 또한 흩어져 사는 형제들이 모이면

음식 메뉴에 간장게장이 빠지지 않는다. 


요즘 아구찜이라는 요리의 생선 아구는 어릴 적 물텀벙이라고 불렀다.

부둣가에 나가면 물텀벙이들이 바닥에 축 쳐져서

마치 물채웠던 풍선이 터져서 버린 것 같았다. 

요리 방식은 같지만 원래 아구는 생선이 너무 못생겨서

어부들이 잡으면 재수없다고 버리던 생선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그 생선으로 찜을 하고 양념을 해서

먹기 시작한 뒤로 인천에 아구찜 전문식당이 들어서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에서 제일 많이 먹던 생선은 쥐치였다.

당시에는 어부들이 쥐치를 잡으면 쥐같이 생겼다고 기분나쁘다고

바다에 버리거나 헐값에 팔았다.

쥐치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기름에 튀겨 먹거나 말려서 구워 먹고

말린 후 잘게 찢어 놓으면 오징어포같이 맛있었기에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다짜고짜 쥐고기부터 달라고 떼쓰곤 했다.

그러다가 쥐치로 쥐포가 생산되고 본격적인 군것질 거리로

시중에 나온 이후로는 우리 집도 쥐치를 먹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늘 쥐치를 다듬어 며느리들 집에 보내곤 하셨다.   

 

당시 많이 먹던 생선가운데 박대기라는 몸집이 얇은 생선이 있다.

대개 껍질을 벗겨 말려서 구워 먹거나 익혀 먹는데

그 박대기의 껍질이 끈끈해서 연실을 튼튼하게 만들 때 

껍질을 끓여서 연실에 입히고 그 위에 사금파리를 갈아

연실에 입히면 연싸움에 절대 필요한 질기고 강한 연실이 되기도 했다.

그걸 우린 '연실매긴다'라는 말을 썼다.    


많은 이웃들이 그렇게 바다일에 종사했다.

배를 타는 남자들의 아내도 역시 남편따라 부둣가에서 일을 하느라

자녀들의 가정 교육은 늘 뒷전이었다.

부모가 종일 집에 없는 애들은 집에서 종일

방에서 뒹굴었으며 굳이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네친구들의 대학 진학 수준은 상당히 낮았다.

동네 내 또래 애들 중에서 대학을 진학한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은 엄하고 성실하신 아버님의 영향으로

큰 형님이 무척 성실했기에 동생들을 잘다스렸고

동생들도 잘 따라주었던 까닭일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가정들이 많아 가끔 이웃집에

도피중인 범인을 잡으로 경찰이 찾아오기도 하고

헌병들이 찾아와 탈영병을 찾기도 했다.


우리 뒷집은 무당이 살고 있었는데

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사람들은 어부들은 종종

굿을 해야만했다.

굿을 하는 날은 초저녁부터 잘강잘강 방울소리가 들리고

점점 꽹가리와 징소리가 커지면 굿이 절정에 달했음을 알았다.

언젠가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기에 가보니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선 가운데

무당이 드럼통위에 날이 시퍼런 작두 두개를 올려 놓고

하얀 버선을 신고 막 그 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무당의 딸과 나는 같은 학년이고 잘아는 이웃이라

때론 무당아주머니가 굿하는데 교회다니는 내가 옆에 있으면 안된다며

나가라고 눈짓을 주곤했다. 


연안부두가 본격적인 어항으로 생기기 이전에는

모든 배들이 화수부두와 만석부두로 들어왔기에

어떤 이들은 배를 몇 척 소유하고 하는 부유층에 속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친구네가 배를 소유하고 있어 그 녀석의

도시락 반찬은 당시에는 부잣집애들이나 먹는 기름이 잘잘 흐르는

햄소세지가 들어있어 그 애는 늘 점심을 먹을 때 팔뚝으로

도시락을 가리고 먹어야만 했다.


아버님은 농사짓는 시골에서 결혼하시고 인천으로 이사 오신 후

역시 배만드는 일에 잠시 종사하시다가 제철회사에 옮기셔서

용광로옆에서 평생을 근무하셨다. 


어린 시절에 우리 집 옆으로 소방도로가 생긴다 해서

우리 집터의 반을 떼어 주고 남은 터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이층양옥집을 짓는다고 기초를 다지기 위해 우리집터를 파헤쳤을 때

어마어마하게 많은 조개껍질더미가 묻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록에 의하면 100년전에 우리 집 있는 곳까지 바다였기에 

처음으로 미국의 상선이 우리 동네에 도착한 곳이라고 알려진 뒤

1982년도에 화도진이라는 공원을 세우고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아버님은 은퇴 후 인천의 가까운 갯벌에 나가셔서

늘 조개와 망둥어를 많이 잡아오셨다.

동네 친구와 나는 살아 있는 조개의 살을 발라내

조개회를 소주 안주로 삼아 먹으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리고는 그 바닷가로 나갈 기회가 없었다.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가끔 인천을 가도

그냥 돌아오기 바빴다.

지난해 였던가.

그 곳을 혼자 찾아가 보았다.

지저분한 도로는 모두 포장되어 있었고

부둣가에는 낚싯배로 보이는 작은 배들만 정박되어 있었다.

무척이나 넓었던 화수부두는 공장지대쪽에 커다란 담을 세워 답답했고

이전에는 없던 간이 횟집도 생겼다.

작은 조선소는 아직 그대로 있지만

어릴 때 그 골목의 번잡함은 사라져 버렸다.

부두 앞에 집들 중 몇 채는 아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반가왔다.


그러나 아직 그 곳을 떠나지 못한 할머니들은

마당에 좌판을 벌려 놓고 작은 고기들을 말리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좌판앞에서 파리를 쫒고 있는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이 곳에서 평생을 보내셨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