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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앞에선 아직 젊은이다

전철을 많이 타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피곤하거나 아플 때를 제외하고는 노인석에 잘 앉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앉아 있더라도 노인들이 내 주위에 계시면 다른 이들보다 먼저 자리를 양보한다. 나는 아직 그 들에 비하면 양보해도 될 만큼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나이 70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내 나이 쯤 사진을 보았더니 아주 많이 늙으신 얼굴과 구부정한 모습이다. 아마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사신 분이라 자신의 건강을 위해 보낸 시간이 없으셨을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아버님이 운동을 위해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가 운동하신다거나, 다른 분들하고 야외로 놀러 나가시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오로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평생 일만 하셨을 뿐이다. 아버님은 그 피곤함을 늘 술과 담배로 푸셨다. 그..

인생에 거저 먹는건 없다

어느 보이스 피싱 관련 블로그에서 퍼온 글이다. ​ 취업준비를 하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단순한 작업만으로 높은 시급을 받을 수 있다는 아르바이트 채용 공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지원을 하고 다음 날 부터 출근을 하기로 했습니다. ​ 그리고 출근을 한 첫날 회사에서는 업무적으로 통장이 필요하다면서 이모씨 명의의 통장을 요구하였고 해당 통장으로 돈이 입금되면 그 돈을 인출하여 상품권으로 바꾸는 것이 이모씨의 업무라고 했습니다. ​ 알고보니 그 회사는 불법으로 모은 돈을 세탁하는 곳이었다. 졸지에 그 청년은 신용불량자에 범죄자가 되어 버렸다. ​ 요즘 젊은이들이나 혹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기능이나 재능보다 제일 먼저 배워야 할 사항이 바로 이런 편한 직업은 절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 통..

멋지게 산다는 것

요 몇 년 간 내가 제일 자주 듣는 말이 '멋지게 사는 모습이 보여요' ​ 그런가? 내가 남들에게 그렇게 보였나? 특히 은퇴한 뒤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남들은 은퇴한 뒤로 별로 소일거리가 없어 잠잠한 편인데 나는 이것 저것 내가 즐거움을 찾아서 다니고 그걸 늘 글로 표현하고 있어 사람들은 나의 좋은 면만을 보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을 때도 많은데... 나도 때론 외롭고, 화를 내고 싶기도 하고, 때론 사람과의 만남에서 기분이 상할 때도 많다. 표현을 안한다 뿐이지... ​ 직장 다니던 시절에는 그저 하루가 일이었고 가끔 주말에 걸으러 다니는 것 뿐. 직장에서는 좋으나 싫으나 같이 일해야 하지만 은퇴하니 내가 싫은 사람은 가능한 피할 수 있어 좋다. 직장을 또 다니기 시작했지만 큰 부담이 없는 일..

나는 양고기 매니아다

내가 양고기 타령하지만 결국 아들이 관심이 있다며 사역으로 나섰다. 아내는 지레짐작하여 냄새나서 불호란다. ​ 평소 운전하면서 자주 봐온 부천 IC근처 꼬미양. 뉴질랜드산 양고기란ㄴ 네온사인이 마음에 들어 주일 예배후 찾아갔다. 내가 양고기 매니아가 된것은 결혼 전과 후 사우디에서 2년동안 생활하면서 양고기 holic이 되어버렸다. 돼지고기를 좋아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양고기를 따라 오지 못했다. 또한 2000년대 초 호주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양고기의 맛을 알았다. 이후 어떤 고기보다 양고기를 으뜸으로 친다. 중동지방에 출장가던 시절에는 늘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양고기다. 통상 한국의 식당에서 파는 양꼬치 구이보다는 무언가 알짜부위를 빼고 난 짜투리 고기 같아 숯불 양갈비 구이를 선호한다. 그보다 그 어..

아버지의 연인?

어린 시절에는 가끔 형제들끼리 놀리고자 할 때 '너는 다리밑에서 주워 온 자식이야' 하며 이야기할 때 진짜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 난 자식이 아니고 경인선 철교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고아로 생각해 눈물을 쏟았던 기억들이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 모든 형제들은 어머니의 다리밑에서 주워 온 자식들이었다. 나중에야 그걸 알고 '형도 다리밑에서 주워 왔잖아' 하며 맞받아치며 허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 초가집 우리 집 안 방의 문위에 걸린 액자에는 여러 개의 작은 사진들을 넣어 두었는데 그 중 늘 시선을 끌었던 사진 한 장이 아버님이 낯모르는 여인과 서로 선 채로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는 사진이다. 아버님은 늘 하시는 포즈로 양팔을 등 뒤로 넣으시고 몸집이 좀 있고 그다지 이쁜 ..

나의 음악 인생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내가 들은 음악은 크게 세가지였다. ​ 하나는 큰 형님의 팝송과 클래식이었고 또 남진, 배호를 좋아하는 둘째 형님이 사온 전축으로 듣는 유행가였으며 누님이 집에서 일을 하며 라디오로 듣고 얼른 가사를 적어서 부르는 트로트였다. ​ 그 세가지 음악 중 내 인생 진로는 11살 터울의 큰형님과 같다. 큰 형님은 같은 국민학교, 같은 중,고등학교, 그리고 같은 대학의 같은 과 선배다. 그러다보니 큰 형님과 같은 방을 쓰는 시간들이 많았다. 그래서인가 클래식 음악은 내가 굳이 알려도,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음악이었다. ​ 나이들어 국민학교의 생활기록부를 볼수 있다 해서 인근 학교의 행정실에 찾아가 확인한 내 기록에는 놀랍게도 1학년때 담임선생님 평가가 '음감이 예민하다'라고 ..

오타는 기회였다

2000년대 초반 작은 사업을 할 때... 평생 직장생활 중 영어 관련일을 하다보니 문서를 작성할 때 오타가 자주 나와 늘 관심을 두는편인데... 한 때 직장생활이 여의치 않아 개인 사업을 하던 시절에 바로 옆 집이 간판 집이었다. ​ 어느 날 그 분이 간판 마무리작업을 하는데 상호 밑에 써 있는 작은 영어 단어에 오타가 있었다. 그걸 지적하니 어쩔 수 없이 간판 작업을 다시 하더니 다음부터는 영어를 쓰는 간판이 있을 때는 꼭 내게 가지고 와 검증을 받았다. ​ 대개 자영업을 하는 이들이 영어에 익숙치 않은 것을 알고는 내게 틈새시장이 생겼다. 단지내에 사무실 하나 놓고 무역업을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기에, 그 들에게 영문 해석과 작문을 도와주겠다고 안내를 했더니, 의외로 부수입이 많이 생겼다. 때로는..

[영화]사랑후의 두 여자, After Love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보면,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흐르며 최종적으로 제작회사의 로고가 뜰 때까지 극장에 불이 꺼져 있고, 관객들은 일어나지 않는 전통이 있다. 그런에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배경음악대신 희미하게 갈매기소리만 들리니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 나가고, 내가 제일 늦게 나왔다. 오래전 국내에 중동지역의 남자들이 많이 근무하는 공단에서 유독 잘생긴 남자들이 한국인 여자와 만나 결혼을 하고 이후 같이 남편의 나라에 갔는데 그만 그 곳에 또 다른 아내가 있는 것을 알고 크게 후회를 하는 일이 가끔 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그건 중동의 이슬람국가들은 남자가 율법상 4명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고국에 이미 결혼한 여자가 있어도 한국에서 또 다..

그래, 내가 할께

집에서나, 밖에서나, 어느 모임에서나, 회사에서나... 내가 잘 하는 말이다. ​ 그래. 내가 할께.. ​ 그렇다고 모든 일에 그런 것은 아니다. ​ 직장다닐 때 어떤 일을 동료나 아래 직원에게 얘기하면 우선 핑계나 변명부터 한다. 그럴 때 나는 그 들에게 그 일을 해야 하는 타당성을 설명하여 이해시키느니 내가 직접 하고 만다. 나는 말을 조리있게 잘 하지 못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능한 관리자가 못되었고, 통솔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못한 것 같다. 임원은 지시를 잘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직접 일하기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조금 불편한 일은 내게 임무가 많이 떨어졌다. ​ 그리고 내 말을 듣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면 대개 하기 싫어서 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

코로나 투병기

(이 글은 확진 격리기간 동안 매일 올린 글입니다. ) 3월 27일 (일), 코로나 확진 7일차 무사히 일주일간의 격리를 마무리하는 날 참 감사한 날이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조금 불평도 나온다. 아침 식사 후 보건소에서 보내 준 약의 마지막 남은 약 몇 개를 먹으며 왜 격리 기간은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식으로 계산하는지 불평 격기 통보받은 시간이 오전 7시 10분이니까 그 시간되면 마치 타임워치처럼 딱 해제 통보가 와야 하는가? 그러나 오늘은 할 일이 많다. 내일 아내와 딸이 집으로 복귀할텐데... 적어도 내 손길이 묻었던 곳은 다 락스로 청소해 놓으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집안에서도 내 생활반경을 최소화했다. 내 방은 나갈 때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했고 아내와 딸의 방에는 열어보지도 않았으..